제151화
전태국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전민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회사 변호사가 이 계약 너무 불공정 계약이라고 하지 말래. 난 ‘페이스 노트’ 인턴이니까, 네가 형한테 잘 좀 이야기해서 계약 조건 좀 조정해봐.”
“아저씨, 우리 형 짤 없는 거 몰라요?”
“이건 너무 하잖아. 손해배상 금액이 왜 이렇게 많아? 이거 완전 횡포야.”
“아저씨, 아저씨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면서 겨우 변호사들에게 휘둘리는 거예요?”
“뭐어? 그게….”
민국이의 말은 듣고 보면 뭔가 묘하게 맞는 것 같았다.
전태국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민국이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아저씨가 삼전 그룹 후계자라고 해서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수가 될지, 뭐가 될지도 모르는 겨우 12살짜리 아이와의 약속마저 저버리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전태국은 결심한 듯 민국이를 쳐다봤다.
“그래, 지금 계약서 그대로 사인하자. 공증은 니네 쪽 변호사가 하면 되지.”
“아저씨! 정말요?”
“나 12살짜리 아이라도 무시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이대로 계약하고, 이제 그만 아저씨라고 불러.”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잖아요.”
민국이는 딱 잡아뗐다.
전태국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넌 정말… 형보다 더 독한 거 같은데….”
“전 형 따라가려면 멀었어요.”
민국이는 찡긋 웃고는 계약서를 챙겼다.
* * *
알라바바스 마운과의 계약은 정확하게 마무리가 됐다.
손정훈 대표가 옆에서 어린 투자 새싹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조건으로 해주라는 조언을 마운에게 해준 덕분에 나 역시 손정훈 대표의 계약과 똑같은 계약서로 사인을 마쳤다.
나는 계약서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0년 후에 보자고! 마운 그리고 손정훈 대표!]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곧 민국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아!”
“그냥 들어오면 되지. 노크는 왜 해.”
“형아가 뭔가를 보는 것 같아서…. 참, 형아. 이거 계약서.”
“태국이 형이랑 한 계약서?”
“응. 아저씨가 불공정 계약이라고 삼전 그룹에서 말린다기에 내가 아저씨 그 정도 능력밖에 안 되냐고 그랬더니, 단번에 이 계획서 그대로 진행하래. 공증은 우리 쪽 변호사 통해서 받고….”
[한심한 놈….]
겨우 12살짜리 어린애의 말에 놀아나서 불공정 계약을 진행하다니.
전태국은 저번 생이나, 이번 생이나 싹수가 노랬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민국이가 내 앞에서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분명 뭔가를 바라는 제스처였다.
“전민국, 어학원 숙제는 다 했어?”
“응! 숙제 다 했어.”
“주말에는 근처 동물농장에서 체험할 거야. 어서 일찍 자.”
“형아….”
민국이는 큰 두 눈을 깜빡거렸다.
“왜?”
“형아, 형아가 저번에 동영상 올리는 플랫폼, 나 구경시켜준다고 했잖아.”
너튜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거기는 왜?”
“나, 태국이 아저씨랑 계약도 했잖아. 거기 구경시켜주면 안 돼?”
“흠….”
나는 턱을 매만졌다.
[이제 슬슬 전민국 아이돌 만들기 프로젝트에 착수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민국이를 괜히 들뜨게 할 수는 없었다.
“계약서에 도장 아직 안 찍었잖아.”
“하아… 정말 형은 나보다 더하다니까.”
대신 적당한 떡밥도 필요했다.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 너튜브 회사에 데리고 갈게.”
“진짜지, 형?”
“형이 약속 안 지키는 거 봤어?”
“아니!”
민국이는 어느새 들떠서 방안을 방방 뛰어다녔다.
나는 채드 천에게 연락을 해서 주말에 사무실 구경 간다고 약속을 잡았다.
채드 천은 흔쾌히 허락했다.
* * *
꾸욱.
민국이는 조금 촌스럽지만 사인 대신 지장을 찍었다.
“형아, 이거 봐.”
“잘했어.”
“치이, 촌스럽긴….”
전태국은 계약서에 사인을 휘갈겼다.
[스타일 따지다가 망하는 건 너지.]
드디어 전태국과 전민국의 역사적인 계약이 성사됐다.
전태국과 전민국 둘 다 뿌듯한 얼굴로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이제 된 거지?”
“네, 형!”
민국이는 얼른 태세를 전환을 했다. 심지어 방글방글 웃기까지 했다.
전태국은 민국이 말 한마디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쭉 형이라고 불러.”
“당연하죠, 형!”
전태국이 나를 잠시 쳐다봤다.
“주말인데, 뭐 일 시키고 그러는 건 아니지?”
“주말은 쉬어야죠. 전 무엇보다 워라밸을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워라밸? 그게 뭐야?”
2004년에 워라밸은 아직 한국에서는 낯선 개념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개념이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춘 삶을 살아야죠. 그래야 행복하게 오래 살죠.”
이때, 민국이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전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말이네. 앞으로 회사 경영할 때 참고해야겠어, 워라밸. 그럼, 주말이니까 난 쉴게.”
“그러세요. 태국이 형, 그래도 인턴 마지막 주에 회장님이랑 임원분들 앞에 두고 프레젠테이션 해야 하는 것은 틈틈이 준비하세요.”
“걱정 마, 나 전태국이야.”
전태국은 손을 흔들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때, 민국이가 내 손을 슬쩍 잡아끌었다.
“형아, 태국이 형한테는 워라밸인지 뭔지 지키라고 하고는 형은 왜 하나도 안 지켜?”
“민국아, 태국이 형은 삼전 그룹 회장의 아들이잖아. 태어날 때부터 일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없는 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하지만 나와 넌 아니지?”
“응….”
민국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이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들은 몇 배로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는 거야.”
“형아….”
“응?”
“형아는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이야?”
“그거야….”
[당연한 건데, 그걸 왜 묻는 거지?]
나는 의아한 눈으로 민국이를 내려다봤다.
“형아, 난 HAT 같은 아이돌이 되고 싶은 게 꿈이잖아.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랩도 하고. 근데 형은 이제 겨우 14살인데. 뭐, 외모는 철수 형이나 태국이 형이나 비슷한 나이 같지만. 암튼….”
민국이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측은하게 보는 거야?]
“형아, 나는 비행기 타면 비행기 기장이 되고 싶기도 하고. 변호사 아저씨 만나면 변호사가 돼 보고도 싶거든. 근데, 형은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인 게 이상하잖아. 돈은 내가 일한 결과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거 아니야?”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돈은 일의 결과이지, 목적은 될 수 없다고?
나는 속으로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큐 160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하아- 나 같이 겨우 아이큐 120은 역시 생각이 부족해.]
민국이가 내 손을 꼭 잡았다.
“형아, 난 형아가 가끔은 친구 형아들처럼 철없고 떼쓰고 그런 형아였으면 해.”
“흠….”
나는 민국이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내 동생 전민국을 너무 잘 알았다.
이렇게 어른스러운 척, 남의 마음을 꿰뚫는 척 이야기할 때는 분명 목적이 있었다.
“전민국, 원하는 게 뭐야?”
“히잇, 형아, 어떻게 알았어?”
[형이 머리는 너보다 나쁘지만, 삶의 연륜이라는 게 있어.]
“어서 말해봐.”
“형아, 나 어학연수 끝나고 한국 가기 전에 디즈니랜드 같이 가고 싶어. 친구들한테 미국 가서 디즈니랜드 갈 거라고 엄청 자랑했단 말이야.”
“전민국, 어학원에서 마지막 주에 시험 보지?”
“형아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민국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형이 다 전화해서 알아봤지.”
“형아, 설마…?”
민국이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어학원 마지막 시험에서 90점 넘으면 디즈니랜드에 데리고 갈게.”
“형아, 너무해!”
“싫으면 디즈니랜드는 아주 못 가는 거야.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
“형아, 나빠!”
“싫으면 말고.”
민국이는 입을 꼭 다물고 있더니 화난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알았어! 알았다고! 90점 넘으면 되잖아!”
“민국아, 넌 머리가 좋으니까 조금만 노력하면 90점 쉽게 넘을 수 있을 거야.”
“형아, 병 주고 약 주지 마.”
민국이는 축 처진 어깨로 방으로 들어가며 슬쩍 뒤돌아 나를 원망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나는 그런 민국이의 모습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전민국, 세상에 공짜는 없어! 동생도 예외는 아니야. 돈이 인생의 목적은 될 수 없지만, 돈이 없으면 꿈꿀 기회도 사라진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 * *
너튜브 사무실은 아플 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지막한 건물의 2층에 위치해서 창밖으로 나무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사무실은 ‘페이스 노트’와 크기는 엇비슷했지만, 직원은 좀 더 많았다.
주말인데도 모두 분주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채드, 주말인데도 모두 나왔네요?”
“어… 내년에 오픈하는 게 목표라서 요즘 정신이 없어. 베타 서비스 곧 시작할 거거든요. 참, 이 꼬마가 네 동생이야?”
“네.”
채드 천은 민국이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민국아, 반가워. 여기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며?”
“네, 형이 이 플랫폼에 자기가 직접 찍은 동영상 올릴 수 있다고 해서요.”
“와우, 민국이가 이런 데 관심이 많구나.”
“제가 꿈이 가수거든요. 노래만 하는 가수가 아니라 춤도 추고 하는 그런 가수요.”
“엔싱크 같은?”
“네에!”
민국이는 크게 대답했다.
그 바람에 너튜브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이 기분 좋게 웃었다.
채드 천이 잠시 고민하더니 나를 쳐다봤다.
“성국, 곧 있을 베타 서비스에 동생이 노래하거나 춤추는 동영상 한번 올려보는 거 어때?”
[내가 바란 것도 바로 그거야, 채드.]
민국이가 하고 싶다는 얼굴로 내 손을 꼭 쥐었다.
“형아….”
“채드,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올리면 되는 거죠?”
“응. 편한 방식으로 올려봐. 영상 편집 프로그램 써서 올리면 좋지만, 아직 초창기니까 굳이 안 그래도 될 것 같아. 안 그래도 다양한 분야에서 동영상 올릴 사람을 모집 중이었거든. 민국이가 해주면 난 너무 좋을 것 같아. 우리 채널은 어쨌든 다양성이 생명이거든.”
나는 민국이를 내려다봤다.
“민국아, 한번 해볼래?”
“네에! 형아!”
민국이는 손을 번쩍 들었다.
* * *
“형아, 제대로 찍어야 해. 알았지?”
“응, 알았어.”
나는 아빠가 미국 올 때 사진 많이 찍으라며 준 디지털카메라로 민국이의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숙소 거실에서 민국이는 대한민국의 유행곡을 틀어놓고 최선을 다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쿵쿵쿵.
일요일 아침부터 요란한 비트가 숙소 안을 가득 채웠다.
마크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성국,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미안. 시끄럽지?”
“어차피 일하려고 일어나던 참이었어.”
순간, 마크는 춤추는 민국이를 보고는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
곧이어 리미미도 옆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민국이를 넋 놓고 보고 있었다.
민국이의 춤이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민국아! 대단해!”
마크의 환호에 민국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가. 버릇까지 닮다니….]
“사장님, 제가 동영상 찍은 거 한번 봐도 될까요? 제가 한국 드라마와 한국 가수 덕질 좀 했잖아요.”
“리미미 씨가 보고 어떤지 냉정하게 판단해 주세요.”
리미미는 심각한 얼굴로 동영상을 쭉 돌려봤다.
솔직히 JP에서 연습생 생활을 한 달이나 한 우수 연습생이었던 나의 견해로 민국이의 춤에는 근본이 없었다.
TV 가수들을 무작정 따라 한 춤이다 보니 기본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리미미 씨, 어때요?”
“흠… 우선 기본기가 좀 약해 보이긴 하는데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요.”
“뭔데요?”
“동영상 화질이 너무 구려요, 사장님!”
이건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성국, 동생을 위해서 카메라 하나 사는 게 어때? 민국이 꿈이 가수면 앞으로 이런저런 오디션 나가려면 동영상 많이 찍어야 할 텐데….”
“흠….”
돈이 아깝다는 게 아니라, 카메라 화질이 오디션의 당락을 좌우하는 큰 문제는 아닐 거란 판단에서 고심이 됐다.
이때, 초인종이 울렸다.
젊은 양 비서와 전태국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얼른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전태국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음악 소리가 들려서 아침부터 무슨 파티 하나 구경 왔지.”
전태국이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민국이도 뒤에서 전태국을 반겼다.
“형! 나, 춤추는 거 동영상 찍고 있어요.”
“동영상 찍은 거 나도 봐도 돼?”
“물론이죠.”
나는 얼른 전태국에게 카메라를 넘겼다.
전태국은 심각한 표정으로 동영상을 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화질이 너무 구리잖아. 이번에 삼전에서 새로 나온 카메라 내가 가지고 왔는데, 그걸로 다시 찍는 게 어때?”
[전태국, 역시 너는 글로벌 호구였어!]
나와 민국이는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