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민국이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살아오면서 본 민국이의 모습 중 가장 진지했다.
그만큼 이 인기 투표에 진심이란 이야기겠지?
[전민국, 어쩌냐. 보나 마나 인기 투표는 내가 이길 게 뻔한데. 나, 전성국이야. 프롬킹도 한 사람이라고….]
나는 민국이의 저 의지를 짓밟는 형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젊은 양 비서가 나와 민국이를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민국아, 이런 작은 거에 너무 심각해질 필요는 없어. 동영상을 올리는 목적은 사람들의 호응도랑 네가 부족한 점을 알아서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면 될지를 확인하는 거잖아.”
젊은 양 비서의 말이 백번 맞다.
하지만 민국이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도 형을 한번 꼭 이겨보고 싶어요.”
민국이는 두 손을 꼭 쥐었다.
[민국아, 이미 넌 아이큐로 나를 이겼어….]
하지만 이건 정말 무덤까지 가지고 갈 나의 치부였다.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젊은 양 비서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네가 민국이 설득해봐.”
“흠… 인기 투표는 하되, 민국아 벌칙을 조금 낮추자. 예를 들면 진 사람이 매일 방 청소를 한다든가. 그런 거 있잖아. 솔직히 지금은 누가 봐도 내가 이길 게 뻔하잖아. 넌 아직 12살에 귀여운 것 빼고는 얼굴도 형보다 못하고, 키도 나보다 작잖아.”
“성국아….”
젊은 양 비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들은 꼭 진실을 말하면 이러더라. 내가 이러니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끊을 수가 없지!]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철수 형, 전 민국이의 의견을 따를게요. 민국이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봤으면 좋겠어요.”
“형아, 나 이번에 진짜 자신 있어!”
젊은 양 비서도 체념한 듯했다.
“형제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면 우선 일상 동영상을 찍어보자. 성국이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민국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정도면 어떨까?”
[그래도 내가 더 주목받을 건 뻔하지만. 한번 해보지.]
나는 애써 어깨를 쭉 내렸다.
“철수 형, 그럼 가수가 꿈인 대한민국 소년의 미국 어학연수라는 콘셉트로 동영상을 찍어보는 게 어떨까요?”
“제목이야 좀 더 관심을 끌 수 있으면 좋으니까. 대한민국 소년의 빌보드 공략. 뭐, 이런 제목을 쓰면 더 많이 볼 것 같아.”
[역시 양 비서야.]
젊은 양 비서는 확실히 연예 비지니스 쪽에 재능이 있었다.
“카메라는 나도 찍긴 할 건데, 민국이가 셀프 카메라 찍는 형식으로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카메라에 대고 친구들에게 편하게 이야기하듯이 떠들면 사람들이 더 친근하게 느낄 것 같아.”
“저 그런 거 엄청 잘해요!”
민국이는 디지털카메라를 들더니 이리저리 자신의 얼굴이 제일 잘 나오게 각도를 맞췄다.
“형아, 이게 바로 얼짱 각도라는 거야.”
찰칵. 찰칵. 찰칵.
민국이는 셀카를 여러 장 찍어서는 곧 자신의 ‘페이스 노트’에 올렸다.
* * *
“안녕하세요. 전민국의 하루를 여러분과 오늘 공유해 보려고 해요. 그럼, 10년 후에 빌보드를 정복하는 가수가 될 전민국의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민국이는 발랄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놓고 일상을 찍었다.
“제 일상은요.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다 늦게 잠든 형아를 깨우는 일부터 시작해요.”
민국이는 웬일로 새벽같이 일어나서는 나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형아, 일어나. 아침이야! 회사 출근해야지! 형아!”
나는 부스스한 눈으로 이불을 걷어차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순간, 민국이가 놀라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형아! 이건 반칙이잖아! 왜! 웃통을 벗고 있어!”
이 순간을 위해서 나는 어젯밤 잠옷도 안 입고 상의를 벗은 채 잠들었다.
“전민국, 너도 반칙이잖아. 네가 언제부터 날 깨웠어? 내가 맨날 널 깨웠지! 동영상이라고 거짓말로 막 찍으면 돼? 안 돼?”
“진짜! 형아 못됐어.”
민국이는 카메라를 꺼버렸다.
* * *
문을 열고 나가자 리미미가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곤 나를 보자 피식 웃었다.
“사장님, 그렇게 꼭 동생한테도 이겨야겠어요?”
“경쟁에 형, 동생이 어디 있어요?”
“진짜 형제가 아주 승부욕이 장난 아니에요.”
나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벌컥 들이켰다.
곧 민국이가 한 손에 디지털카메라를 들고나와서 나를 한번 째려보고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리미미를 찍었다.
“여기는 저희 형아 회사에 다니는 리미미 누나예요. 누나는 북한 출신이세요. 누나, 카메라에다 대고 인사 한번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우리 민국이 많이 사랑해 주세요!”
마침, 부스스한 얼굴의 마크도 방문을 열고 나왔다.
“마크 형! 여기 카메라 좀 봐주세요.”
“민국아, 찍으면 안 돼! 나 엉망이야!”
쾅.
마크는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갔다.
민국이는 카메라에 대고 연신 종알거렸다.
“마크 형이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찍지 말라고 하는 것 같네요. 이상! 제가 미국에서 지내는 숙소는 형아가 일하는 회사 사람들이 함께 사는 숙소예요. 그럼, 이따 또 만나요!”
민국이는 카메라에다 대고 연신 손을 흔들었다.
나는 혀를 끌끌 찼다.
“민국아, 너무 오버하지 마.”
“형아나 오버하지 마. 오늘은 꼭 잠옷 입고 자!”
민국이는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곧 민국이가 방에서 내 핸드폰을 들고나왔다.
“형아, 전화 받아! 아침부터 진짜 시끄러워 죽겠어!”
민국이는 핸드폰을 건네곤 또다시 툴툴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봤다.
일론 머스트였다.
무슨 일이지?
* * *
일론 머스트는 자신이 천재를 또 한 명 만났다면 들뜬 목소리로 나에게 자신이 알려주는 위치로 올 것을 부탁했다.
나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일론 머스트가 알려준 실리콘밸리의 사무실로 향했다.
일론 머스트가 알려준 건물은 벤처 회사들이 모여 있는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건물 중 하나였다.
일론 머스트가 망상가이기는 하지만, 범죄자는 아니어서 나는 별 의심 없이 사무실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곧 일론 머스트가 상기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성국! 어서 와!”
“일론,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성국! 내가 정말 멋진 사람을 만났어. 난 이 사람이 너만큼 천재 같거든. 그래서 소개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지.”
누구지?
나는 의심 가득한 마음으로 좁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몇 대의 컴퓨터가 놓여있는 책상과 서점을 옮겨놓은 것 같은 한쪽 벽.
그리고 몇 개의 간단한 의자들이 놓인 사무실이라기보다는 교수의 방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에는 동양인인 것 같으면서도 미국인인 것 같은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나이는 일론의 또래로 보였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내밀었다.
“일론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난 제임스 사카모토예요.”
[제임스 사카모토? 설마 비트코인의 창시자!]
비트코인의 창시자는 사카모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아무도 그 실체를 몰랐다.
나는 순간 얼음이 된 채 제임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성국, 왜 그래?”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이름이 독특해서요. 전성국입니다. 한국 사람이에요.”
“일론한테 들었어요. 전 미국 사람이긴 한데, 아버지가 일본 사람이거든요. 아버지랑은 어릴 적 헤어져서 솔직히 얼굴도 기억도 안 나요. 그래도 어쨌든 성은 성이니까요.”
제임스 사카모토는 일본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일본에서 유학 온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어머니는 결혼까지 해서 제임스를 낳았지만, 일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맞지 않아서 제임스가 세 살 때 이혼했다고 한다.
그 길로 아버지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미국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영어를 엄청 잘하는 일본인 정도로 저를 생각하기도 해요. 하지만 전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 땅을 거의 벗어난 적이 없어요. 대학생 때 배낭 메고 유럽 간 거 빼고는요.”
제임스 사카모토는 약간 일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릴 적 헤어진 점. 그리고 자신의 치부일 수 있는 이야기를 남들에게 스스럼없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면도 있었다.
“참, 오늘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마 평생 우리만 아는 이야기가 될 거예요. 그래서 계약서를 작성했으면 해요.”
그러곤 나와 일론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철저한 성격은 나와 같네, 제임스.]
계약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눈 모두 대화는 비밀로 간직한다. 만약 이 이야기를 후에 유출한 것이 밝혀질 때는 1억 달러의 손해배상을 한다.
일종의 비밀 서약이었다.
일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억 달러라고? 제임스 너무 하잖아.”
“일론. 그만큼 이건 중요한 이야기야.”
“아직 발명도 안 해놓고는 무슨….”
일론은 작게 타박을 했다.
하지만 제임스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지금 준비 중인 가상 화폐가 세상에 나오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찾으려고 안달이 될 거야. 그러면, 난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도 수없이 많을 거고… 어차피 실패하면 아무 소용없는 거지만, 성공할 때는 대비 안 할 수도 없어. 이건 가상 화폐 모임의 불문율이기도 해.”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제임스, 가상 화폐 모임이라면 이걸 개발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거예요?”
“여러 명이 있어. 그중에서 서로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우린 모두 이 계약서에 사인을 한 상태야. 나중에 가상 화폐가 실제로 세상에 퍼지게 되면, 분명 사람들은 미친 듯이 가상 화폐에 투자를 시작할 거고… 개발자인 우리를 찾으려고 할 거잖아.”
“근데 일론이랑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신 거예요?”
“사실은 내가 테슬론과 스페이스 Z에 관심이 많거든. 자율주행하는 전기자동차나 우주여행. 마치 공상 과학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일을 벌이는 미치광이라면 나와 통할 것 같아서….”
가상 화폐 열풍이 일었을 때 일각에서는 일론 머스트가 가상화폐의 발명가인 사카모토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일론이 짹짹이에다가 가상 화폐에 대한 언급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일론이 나를 슬쩍 쳐다봤다.
“성국, 난 당연히 사인할 거야. 난 제임스한테 이 가상 화폐에 대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거든.”
“제임스. 이건 너무 불공정한 계약 같은데요. 침묵에는 대가가 따르는 거잖아요.”
제임스가 빙긋 웃었다.
“일론이 말한 대로 천재네. 흠… 침묵의 대가로 가상 화폐를 발명하면 100 가상 화폐를 줄게. 어때?”
“좋아요. 그럼, 제임스. 계약서도 좀 고칠까요?”
나는 얼른 계약서에 첨부할 내용을 덧붙였다.
- 이 대화의 비밀 조건으로 제임스 사카모토는 가상 화폐를 발명하는 순간 일론 머스트와 전성국에서 100개의 가상 화폐를 아무 조건 없이 증여한다.
제임스 사카모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일론 말처럼 빈틈없는 천재네. ‘페이스 노트’ 나도 잘 보고 있어. 아마 두 사람은 10년 후쯤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되어 있을 것 같아.”
[그건 나도 아는 이야기라고…]
제임스 사카모토는 얼른 계약서를 다시 작성했고, 나와 일론은 사인을 마쳤다.
그리고 나는 비트코인의 창시자로부터 그 시작의 거대한 내용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이 이야기는 평생 나와 일론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게 될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