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57화 (157/231)

제157화

민국이는 내게 안겨서 훌쩍였다.

“형아, 나 꼭 1등 해야 하는 거지?”

“흠….”

나는 턱을 매만졌다.

“민국아,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설마 1등 안 해도 될 거라는 말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 전민국?]

민국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더욱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학원 끝나고 오면 형이 특별 과외를 해줄게. 아마 형이 가르쳐주면 성적 바로 오를 거야.”

하지만 민국이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싫어?”

“그게 아니라…”

“전민국, 전교 1등 한 번은 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해야지!”

“아, 알았어. 형.”

민국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민국, 내가 널 꼭 전교 1등으로 만들고 말겠어!]

* * *

방과 후 수업 3일째.

어학원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앉는 시각은 정확히 오후 7시.

5학년 2학기 과정을 나가기에 앞서 1학기 내용을 복습하는 과정이었다.

정확히 30분 후, 나는 민국이가 푼 문제집을 채점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그러다 찌익-.

민국이가 얼른 변명을 했다.

“형, 내가 원래는 2번 같았거든.”

“민국아, 수학의 답은 딱 한 개야. 2번 같은 게 아니고, 2번이라고 확실히 생각했어야지. 우선 채점하고, 형이 마저 설명해줄게.”

“어….”

나는 다시 채점을 시작했다.

틀린 문제는 세 개.

“형아, 나 완전 잘하지 않았어? 세 개밖에 안 틀렸잖아. 학교 시험에서도 이렇게 못 했어. 와, 85점이면 내 인생 점수인데?”

나는 팔짱을 끼고 민국이를 싸늘하게 쳐다봤다.

“형아,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봐?”

“민국아, 형아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뭔데?”

“너, 백 점 맞기가 싫은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쉬운 것을 어떻게 세 개나 틀리는 거야?”

“형아! 이건 형아한테나 쉽지. 난 엄청 어렵다고!”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됐다.

평범한 아이큐의 소유자인 나도 다 맞히는 문제를 아이큐 160 넘는 민국이는 왜 틀리는 걸까?

민국이가 자리에서 툴툴거리며 일어났다.

“봐! 형아는 자기가 천재니까, 내가 세 개밖에 안 틀렸는데도 뭐라고 하잖아.”

“민국아, 형아는 천재가 아니야. 형아는 엉덩이에 땀띠 나게 노력한 거라고!”

똑. 똑.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빼꼼 열리더니 리미미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장님, 제가 민국이 공부 좀 봐줄까요? 거실까지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가 다 들리거든요.”

“그래 줄래요? 민국이가 제 말은 참 안 듣네요.”

“원래 가족끼리는 서로 못 가르쳐주는 거잖아요. 저희 아버지가 평양에서 수학 선생님이었는데, 저 가르쳐주시다가 혈압으로 쓰러지실 뻔했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국이는 격하게 리미미를 반겼다.

“미미 누나! 어서 와요! 정말 형한테는 못 배워먹겠어요.”

[전민국, 나보다 리미미가 더할걸?]

나는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 * *

정확히 30분 후, 민국이가 뛰쳐나왔다.

[예상보다 오래 있었네.]

그리곤 내게 달려와 폭 안겼다.

“형아! 나 다시 형아에게 배울래!”

“민국아, 형아가 리미미 씨보다 잘 가르치지?”

“그게 아니라… 리미미 씨 너무 무서워. 설명마다 이것도 못 풀면 아오지 탄광 가서 석탄 캐야 한다고 협박해. 형아, 나 문제 못 풀면 아오지 끌려가는 거 아니지?”

“민국아,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미국에서 겨우 수학 문제 몇 개 틀렸다고 아오지에 끌려갔으면 살아있을 학생 몇 없어.”

“형아, 나도 그렇게 따졌어. 여기 미국인데, 무슨 소리냐고. 그랬더니 리미미 씨가 나도 북조선 사람인데, 여기 있지 않냐며… 그랬어.”

이때, 리미미가 뒤에서 걸어 나왔다.

“사장님, 남조선 학생들은 이렇게 나약해서 어찌 공부한답니까? 저희 북조선에서는 진짜 이 문제 하나 틀리면 바로 아오지행이다. 이런 각오로 엉덩이에 진물 나게 공부했습니다.”

“봐봐, 형아. 나, 무서워.”

민국이는 다시 내게 더 꼭 안겼다.

“민국아, 그럼 네가 선택해. 나야, 리미미 씨야?”

“사장님, 인기 투표인가요?”

주방에서 음식을 하던 마크가 흥미롭게 이 광경을 쳐다봤다.

“성국아, 나 같으면 그래도 미미 씨 선택할 거 같아. 네 형의 잘난 척을 견딜 수 있겠어?”

민국이는 턱을 매만지며 나와 리미미를 번갈아 봤다.

“한 명은 잘난 척이 좀 심하고. 한 명은 협박을 하고…. 이거 너무 어려운 문제잖아!”

“민국아, 나는 잘난 척을 좀 할 뿐이잖아. 아오지 탄광 보낸다고 협박하진 않잖아?”

“형아, 그 잘난 척이 무척 견디기 힘들단 말이야.”

“그럼, 민국아. 이 누나지? 누나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민국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방에 있는 마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영어로 마크에게 말했다.

“마크 형, 나 좀 가르쳐줘. 마크 형이 가르쳐주면 영어도 배우고, 수학도 배우는 거잖아.”

“성국! 미미 씨! 민국이는 나를 선택했는데요.”

마크는 싱글벙글 웃으며 민국이의 손을 꼭 잡았다.

나와 리미미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마크, 민국이 성적 안 오르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성국, 뭘 각오해?”

“못 가르치는 선생도 아오지 탄광에 가야죠!”

리미미가 나 대신 대답했다.

* * *

전재형 회장은 양 비서에게서 아들 태국의 행적에 대해서 듣고 있었다.

“철수 말에 따르면 회사 생활은 무리 없이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성국 군과 마크 등 ‘페이스 노트’ 직원들과도 잘 어울리고요.”

“회사 생활을 잘한다고 리더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양 비서? 내가 궁금한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

양 비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입을 열었다.

“태국 도련님이 생각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페이스 노트’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어 하신다고 합니다. 아직은 대학생이시다 보니 사람들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전재형 회장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항상 부족한 아들이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다른 재벌 3세들도 문제는 많았다.

한국에서 공부 못해서 조기 유학 간 애들은 수없이 많았고, 미국에서 약과 여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녀석들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태국이는 머리도 좋지 않고, 약삭빠르진 못했지만 큰 사고는 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고?”

“성국 군 일행과 친해져서 매일 그 집에서 식사도 같이 하고, 주말이면 근교로 같이 나가기도 하신다고 합니다. 확실히 유타에서 학교 다니실 때보다는 건전하게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똑. 똑. 똑. 전재형 회장은 손등으로 책상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양 비서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유타에서 대학 다니실 때는 친구도 못 사귀시고 매일 집에서 술만 드렸는데, 성국 군 일행과 지내시면서 많이 밝아지신 것 같다고… 철수가 그렇게 전했습니다.”

“양 비서, 나는 태국이에게 친구가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삼전 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순간, 친구들은 자연스레 생길 거야. 내가 원하는 것은 철수가 ‘페이스 노트’의 투자자가 되는 거라고!”

전재형 회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양 비서는 이럴 때일수록 차분한 목소리로 전재형 회장을 달랬다.

“회장님, 태국 도련님은 회장님과 성정이 많이 다르십니다. 어릴 적부터 친구가 없어서 많이 외로워하시지 않았습니까. 삼전 그룹의 후계자란 이름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진정한 친구는 없었죠. 하지만 성국 군은 솔직히 아쉬울 게 없는 상황입니다.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그룹들이 앞다퉈 ‘페이스 노트’에 투자하고 싶어서 안달이니까요.”

“흠….”

전재형 회장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그것이었다.

자신이 놓아준 고기가 바다에 나가 범고래가 되어 돌아온 느낌이었다.

“비록 ‘페이스 노트’에 투자는 못하더라도 성국 군과 이런 인맥을 만들어놓는 것만으로도 태국 도련님에게는 사업가로서 작은 시작일 수 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군, 양 비서. 알았네, 태국이 인턴 끝나는 주가 언제지?”

“2주 후입니다.”

“미국행, 차질 없이 준비하게.”

“네, 회장님.”

* * *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알람시계를 끄고, 민국이를 깨우기 위해서 옆자리를 더듬었다.

더듬더듬 손을 뻗은 곳에는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녀석 침대에서 떨어졌나?]

침대 옆 스탠드를 켜고 눈을 뜨자, 책상에 앉아 있는 민국이가 보였다.

“민국아, 언제 일어난 거야?”

“2시간 전에. 형아도 어서 일어나서 출근 준비해.”

민국이는 문제집을 열심히 풀고 있었다.

바로 오늘이 어학원의 마지막 시험날이었다.

“민국아, 공부는 미리미리 해두는 거야.”

“형아, 나 이틀 동안 하루에 세 시간 자면서 공부해서 지금 엄청나게 예민한 상태거든. 90점 못 넘으면 디즈니랜드 못 가니까, 형아도 말 시키지 말고 어서 출근 준비해. 나 문제집마저 풀어야 해.”

“알았어. 형이 아침 만들어줄게.”

“팬케이크 세 장. 계란프라이 두 개. 베이컨 세 줄에 메이플 시럽 듬뿍.”

“네, 네. 동생님. 얼른 만들어서 올리겠습니다.”

나의 장난에도 민국이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야.]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 * *

치이익- 프라이팬에 계란프라이 두 개가 익어갔다.

마크가 슬쩍 보더니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성국, 네가 아침을 다 만드는 거야?”

“민국이 오늘 시험이잖아. 자기 공부한다고 말도 못 시키게 해.”

“민국이도 가만 보면 독한 건 너랑 똑 닮았어. 너도 고등학교 때 시험 기간에 아침도 안 먹고 공부했잖아.”

그땐 그렇게 공부했어야만 1등 할 수 있었다.

“겨우 어학원 시험에 저러는 게 기특해서 아침 내가 해주려고. 만드는 김에 마크 네 것도 해줄게.”

이때 득달같이 리미미가 방문을 열더니 소리쳤다.

“사장님, 제 것도 부탁합니다!”

“리미미 씨, 민국이 공부해요. 조용히 말하세요.”

“네에.”

리미미는 목소리를 잔뜩 줄였다.

민국이는 식탁에 앉아서도 책을 보면서 팬케이크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민국아, 우유.”

“응.”

우유도 책을 보면서 마시고, 어학원에 가는 내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드디어 어학원에 도착하자 민국이는 비장한 얼굴로 가방을 멨다.

“민국아, 편하게 시험 봐.”

“형아, 거짓말하지 마.”

“들켰나? 공부 그렇게 요란하게 했으니, 90점은 당연히 넘겠지?”

“형아, 이번 기회에 나 전민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겠어! 기대해!”

민국이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다.

* * *

오후 6시가 조금 넘자 아이들이 어학원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두 손에 오늘 본 시험지가 들린 모습이었다.

조금 후, 민국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민국아, 여기!”

마크가 반갑게 반겼다.

민국이는 우리를 보더니 갑자기 울컥한 얼굴로 걸어왔다. 눈물이 눈에 맺히는 게 보였다.

“성국아, 민국이 시험 잘 못 봤나 봐. 많이 혼내지 마.”

마크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곧 차 문이 열리고 민국이가 차에 올라탔다.

그러곤 나를 눈물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민국아, 시험 못 봐도 형아가 안 혼낼게.”

도리도리.

민국이는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시험지를 내밀었다.

내민 시험지는….

“형아, 나 백 점 맞았어!”

“민국아!!!”

“형아!!!”

나는 민국이를 얼싸안았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한 줄 알겠네요, 사장님.”

“그러게. 백 점 처음 맞아보는 사람처럼 촌스럽게 왜 그래.”

순간 민국이가 눈물을 훔치고 전태국을 쏘아봤다.

“형, 저 백 점 처음 맞았어요! 처음이라고요!”

민국이는 기쁨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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