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 전태국의 얼굴은 정말 진지했다.
아빠는 살짝 놀라서 되물었다.
“태국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정도 맛이면 프랜차이즈 해도 충분히 성공할 것 같아서요. 프랜차이즈 사업 관심 있냐고 물어본 거예요, 아저씨.”
전태국에게도 저런 면모가 있었나? 조금 놀랍기까지 했다.
[아무리 글로벌 호구라고 해도 삼전 그룹의 후계자 교육을 받아서 보는 눈은 있는 건가?]
나는 침착하게 전태국을 주시했다.
지금 당장 아빠가 전태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은 아니지만, 전태국이 얼마나 진지하게 이 일을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아빠는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근데 아빠, 왜 나를 쳐다보는 거야?]
“안 그래도… 성국이랑 의논할 일이 있었는데… 사실은 효진 푸드 쪽에서 <원아저씨 보쌈>으로 프랜차이즈 이야기가 나와서… 태국 씨, 미안해요. 제가 효진 푸드 쪽이랑 편의점 간편식도 계속 내고 있어서 태국 씨 제안은 어려울 것 같아요….”
아빠의 말을 들은 전태국은 빙긋 웃더니 다시 보쌈을 김치와 함께 한입에 넣었다.
“뭐… 지금 삼전 그룹에 식품 사업팀도 없긴 해요. 식품 사업팀만 있었어도 제가 바로 보쌈 프랜차이즈 내는 건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사실 음식 프랜차이즈 사업처럼 자잘한 사업이 삼전 그룹과는 어울리지 않잖아요.”
전태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괜히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전태국 최고의 선택은 이렇게 막을 내리는군….]
나는 속으로 잠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빠는 전태국 앞으로 보쌈 고기를 더 밀었다.
“태국 씨, 말이라도 고마워요. 그만큼 우리 보쌈이 맛있다는 거죠?”
“왠지 종종 생각날 것 같아요. 저희 비서팀 가게에 보내면 특별히 신경 더 써서 해주셔야 해요.”
“당연하죠. 태국 씨 보쌈은 특별히 신경 쓸게요.”
전태국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보쌈을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이때, 불쑥 내 입으로 보쌈이 들어왔다.
엄마가 옆에서 보쌈을 싸서 내 입에 밀어 넣었다.
“성국아, 왜 이렇게 못 먹어? 밥 먹을 때는 엄마가 딴생각 좀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식사 중에도 멍하니 있고… 그러니까 살이 빠지지. 키만 크면 뭐 해.”
“엄마, 내가 먹을게.”
나는 입안 가득 찬 보쌈을 오물오물 씹으며 말했다.
“먹는다고 하고는 지금 몇 입 먹지도 않았잖아.”
나는 엄마가 싼 보쌈을 열심히 씹었다. 하지만 너무 커서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옆에 앉은 엄마는 연신 보쌈을 싸서 내 접시에 놨다.
“자기야, 성국이 안 본 사이에 키는 더 컸는데, 몸은 완전 뼈밖에 안 남았어.”
“성국아,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지?”
아빠도 걱정스레 물었다.
“아빠, 형아. 맨날 밥도 잘 안 먹고 일만 해! 계란프라이도 하나밖에 안 먹어. 나는 두 개 먹는데!”
민국이가 옆에서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종알거리는 민국이를 엄마가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민국아, 방학 동안에 밥은 잘 챙겨 먹었지?”
“엄마, 나도 볼이 쏙 들어갔지?”
민국이는 불쌍한 얼굴로 엄마를 올려다봤다.
“뭔 소리야. 민국아, 너는 미국 오더니 아주 볼이 터질 것 같네.”
그 말에 보쌈을 입에 넣던 태국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하하하. 민국아, 너 맨날 우리랑 저녁에 피자 한 판씩 먹더니… 살이 오르긴 했어.”
“내가 이래서 인기 투표에서 졌나 봐! 이거 다 마크 형 때문이야! 맨날 피자 시켜서는….”
민국이는 괜히 한국말도 못 알아듣는 마크 탓을 했다.
“민국아, 그게 왜 마크 탓이야?”
“형아, 그거야. 마크 형이 너무 미국식으로 살찔 것만 먹잖아. 맨날 햄버거 아니면 피자. 내가 그러니까 살이 찌지.”
“민국아, 네가 모르는 게 있나 본데… 마크는 미국 사람이야. 미국식으로 먹는 게 당연하잖아.”
“아… 그런가.”
내 말에 민국이는 모른 척 목덜미를 긁적였다.
아빠가 얼른 상황을 정리했다.
“자, 다들 그만 떠들고 많이들 먹어요.”
엄마는 내 입에 다시 보쌈을 집어넣었다.
나는 엄마의 보쌈을 받아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엄마, 천천히.”
“엄마가 있는 동안 밥 잘 챙겨 먹여서 살 좀 찌워야겠어. 아, 진짜 속상해 죽겠네.”
그때, 오늘따라 유독 조용한 한 사람이 보였다. 바로 리미미였다.
* * *
아빠의 각종 요리가 나간 뒤로 술까지 곁들어져서 집안은 왁자지껄해졌다.
민국이와 지희는 곯아떨어졌고, 나는 우유를 마시며 테라스로 향했다.
이제 여름이 가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밤에 제법 불었다.
드륵.
문이 열리더니 리미미가 나왔다. 한 손에는 맥주병을 쥔 채였다.
“사장님, 혼자 여기서 뭐 하세요?”
“그러는 리미미 씨는 뭐 하세요?”
“화목한 사장님 부모님 보니까 저희 부모님 생각나서요.”
오늘따라 리미미가 조용한 이유가 있었다.
북한의 해커였던 리미미는 미국으로 겨우 도망친 후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서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나는 피터를 통해서 그동안 리미미 부모님을 볼모로 잡고 있었던 정치범 수용소의 간부들과 브로커를 알아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연락을 받았다.
“리미미 씨, 브로커 연락받았죠?”
“사장님… 왜 저한테는 계약서 쓰자는 말씀 안 하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장님은 주고받는 거 확실한 분이잖아요. 저희 부모님 빼주시는 조건으로 저랑 ‘페이스 노트’에서 평생 일하겠다는 노예 계약 같은 거 체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우유를 한 입 머금었다. 그리고 마치 위스키를 마시듯 입안에서 돌리곤 꿀꺽 삼켰다.
“리미미 씨, 저는 사람 목숨 가지고는 거래 안 합니다.”
“사장님….”
리미미의 목소리는 꽤 놀란 눈치였다.
[뭘 또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보고 그래? 나 좀 멋있지, 리미미 씨?]
나는 내가 뱉은 말에 도취 되어 잠시 고개를 저었다.
순간 리미미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강타했다. 탁! 그리곤 고개까지 젖히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사장님, 너무 웃겨요!”
“리미미 씨, 뭐가 웃겨요?”
[나름 좀 멋있는 대사 아니었나?]
“사장님, 요즘 영화나 드라마 보세요? 너무 오글거리잖아요, 그 말. 하하하.”
하지만 리미미는 곧 웃음기를 감추고 진지하게 나를 쳐다봤다.
“사장님, 너무 고마운데… 제가 워낙 무뚝뚝한 북조선 사람이잖아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몰라서 웃어봤어요. 사장님 덕분에 다음 달이면 부모님께서 북조선에서 나오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짜 다행이네요.”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노예 계약 같은 거 안 했지만, 저 ‘페이스 노트’에 평생 충성할게요!”
“그 말 제가 평생 기억할게요, 리미미 씨.”
리미미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뒤돌아봤다.
“사장님, 근데 그 말이요. 정말 오글거렸어요. 어디 가서 쓰지 마세요.”
드륵.
리미미는 얼른 테라스 문을 닫고 들어갔다.
나는 홀로 쓸쓸하게 우유를 마셨다.
[흠… 나는 진짜 사람 목숨 가지고 거래하는 그런 악덕 업주 아니라고!]
* * *
모두 돌아가고 밤이 어두웠다.
오랜 비행에 지친 엄마도 민국이와 지희 곁에서 잠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을 보니 아빠가 홀로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나는 얼른 아빠 곁으로 가서 팔을 걷어 올렸다.
“아빠,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빠는 요리하느라 고생 많았잖아.”
“회사 일 때문에 하루 종일 바쁠 텐데, 넌 거실에서 쉬어.”
“아니야. 아빠….”
나는 얼른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저번 생에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봤는데, 이번 생에서는 기숙사 생활에 숙소 생활까지. 손에 물이 마를 틈이 없었다.
“성국아, 설거지 많이 하는구나?”
“식기 세척기 있는데, 밥은 주로 사 먹으니까 간단한 건 그냥 바로바로 설거지해.”
“우리 아들 고생이 많았네.”
“고생은 무슨. 가게 하는 아빠가 더 고생이 많지.”
아빠가 빙긋이 웃었다.
“우리 성국이 아빠 생각도 다 하고… 너 갓 태어났을 때 말이야. 다른 애들은 그 나이 때에 다 아빠, 아빠 하는데 너만 유독 아빠라고 말도 안 해서 서운한 적 많았어.”
[그땐 내가 이번 생에 적응 못 할 때였고… 솔직히 재벌로 평생 살았는데, 눈 떠보니 단칸방에 고아 부모라니… 어떻게 엄마, 아빠가 단번에 나오겠어, 아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릇을 닦았다.
“참, 아빠. 효진 푸드에서 프랜차이즈 하자는 이야기는 뭐야?”
“아… 그건… 안 그래도, 너 만나서 그것도 상의하고 싶어서 여름휴가 일주일 빼서 온 거야. 만약 프랜차이즈 하면 지금 레시피를 좀 더 계량화하고, 더 대중적으로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해서 각종 패키지까지 가게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하잖아. 그 전에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고… 재충전도 필요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미 아빠의 마음이 프랜차이즈 사업 쪽으로 기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프랜차이즈 하고 싶은 거지?”
“그게… 그래. 우리 아들 앞이니까 솔직해지지 뭐. 솔직히 아빠, 해보고 싶어.”
아빠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수유 사장님이랑 의논해 봤는데, 수유 사장님은 조금 겁나긴 하신대. 자칫 프랜차이즈 사업했다가 잘못되면 원래 가게마저 이미지가 하락할 수도 있잖아.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평생을 일구신 가게가 망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도 아빠가 하겠다고 하면 같이 해보자고는 하셔. 망해도 둘이 같이 망하면 덜 외롭지 않겠냐면서.”
사실 지금 아빠의 가게는 어느 때보다 잘됐다.
1인 가구가 늘고, 편의점 안주 시장이 커지면서 효진 그룹과 합작해서 낸 간편식은 편의점 인기 메뉴가 됐다.
그리고 수유와 잠실에 위치한 두 가게는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는 아빠가 원하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고아로 태어나서 공부 대신 선택한 요리. 그 요리로 성공하고픈 아빠의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이해했다.
[역시, 아빠도 남자였어!]
“아빠, 난 아빠가 한번 도전해 봤으면 좋겠어.”
“정말?”
“응. 나도 처음에는 미국 유학 올 생각도 없었잖아.”
이미 저번 생에서 유학까지 다 다녀왔는데, 이번 생에서 가족의 품을 떠나 유학 갈 생각은 처음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유학을 왔으니까 마크도 만나고, 새로운 길도 찾았잖아. 아빠가 어린 나이에 나 낳고 잠잘 시간도 없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하루도 편히 못 쉬고 일만 했잖아. 난 이제라도 아빠가 꿈을 찾았으면 좋겠어.”
“성국아….”
아빠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울먹거렸다.
[아, 정말. 우리 아빠 너무 감동 잘 먹는단 말이야.]
“아빠, 이젠 내가 돈 많이 벌게! 아빠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때, 아빠가 내 머리에 꿀밤을 날렸다.
“이 녀석아, 그건 아빠가 할 말이지.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누가 하면 어때서 그래? 참, 아빠두.”
하지만 아빠는 마냥 기쁜 얼굴이었다.
“성국아, 아빠가 이번 일 진짜 열심히 해볼게. 그래서 우리 성국이가 아빠 걱정, 동생들 걱정 덜하게 해줄게.”
[아빠, 내가 가족 걱정 엄청 많이 하는 거 알았던 거야?]
울컥.
심장이 또 요동쳤다.
[감동 잘 받는 건 아빠 닮은 건가….]
나는 괜히 어금니를 꽉 물고 고개를 처박고 설거지를 했다.
“아빠, 나 이거 마저 하고 잘게. 아빠 먼저 씻어.”
“그래, 엄청 피곤하네. 성국아, 아빠가 씻고 나와서 마저 정리할 거니까 설거지만 해. 알았지?”
“응, 아빠.”
아빠가 욕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괜히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를 가지고 평생 가족들을 위해서 하루도 편하게 쉬지 않고 달려온 아빠가 드디어 꿈을 찾은 것 같아서였다.
나는 욕실을 흘깃 봤다.
[아빠, 힘내세요! 성국이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