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를 다 하고 수도를 껐다.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나를 포옥 안았다. 그러곤 내 허벅지에 얼굴을 박았다.
누군지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오빠… 오빠, 왜 안 자?”
지희가 내 허벅지를 잡고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지희야, 자다 깼어?”
“응. 오빠, 나 물.”
“잠깐만.”
나는 얼른 물을 따라서 지희에게 내밀었다.
지희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캬아-”
지희는 시원하게 입을 닦고는 컵을 내게 건넸다.
“오빠, 컵.”
“응.”
컵을 건넨 지희는 불쑥 내 손을 잡아당겼다.
“지희야, 왜 그래?”
“오빠, 오늘 엄마랑 아빠랑 민국이 오빠랑 다 같이 자자. 응?”
지희는 동그란 두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우리 집안의 모든 유전자가 빗나간 줄 알았던 지희의 눈이 제법 커졌다.
[크면서 얼굴은 열두 번 변한다던데, 지희도 그럴까?]
내 손을 잡은 지희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오빠, 어서!”
“그럼, 지희야. 오빠 씻고 갈게.”
“응. 그럼, 지희는 안 자고 기다릴게.”
“알았어!”
물을 마신 지희는 뚜벅뚜벅 방으로 걸어갔다.
마침 아빠가 욕실에서 나왔다.
아빠는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면서 방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성국아, 다른 방 또 있지?”
“아빠, 지희가 다 같이 한방에 모여서 자자고 하는데요.”
“성국아, 우리 오랜만에 그럴까? 옛날 생각도 나겠네.”
[옛날 생각이라… 아빠, 단칸방 생활 기억하는 건 나밖에 없다고… 진짜 나 엄청 예민했는데, 그때 많이 참았어. 아빠 코 고는 소리 장난 아니었다고!]
아빠는 신이 나서 머리를 말리더니 지희가 들어간 방으로 갔다.
“성국아, 어서 씻고 와.”
“응.”
* * *
나는 샤워를 한 후 밖으로 나와서 짧은 머리를 말리면서 우리 가족이 모두 잠든 방 안을 바라봤다.
큰 침대 위에는 엄마와 민국이 그리고 지희가 잠들어 있었다.
다들 엄마를 꼭 안은 채였다.
[지희 녀석, 안 자고 기다리겠다더니.]
그리고 바닥에는 아빠가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나를 발견한 아빠가 손짓을 했다.
“성국아, 너랑 나랑은 여기서 자자.”
“응, 아빠.”
나는 머리를 대충 말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아빠가 미리 마련해둔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아빠는 나를 대견하게 쳐다봤다.
[아빠, 시선 부담스러워,]
“성국아, 이렇게 누워보는 거 너무 오랜만이다. 그치?”
[아빠, 지금 말도 부담스러워.]
나는 괜히 말을 돌렸다.
“아빠, 안 피곤해? 오늘 비행기도 오래 탔는데, 오자마자 음식 준비했잖아.”
“성국아, 아빠 아직 젊어.”
[알아, 아빠 아직 새파랗게 어린 30대잖아. 난 나이 마흔에 죽었었다고.]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아빠는 조용히 깊은숨을 뱉었다.
“성국아, 아빠가 정말 삼십대에 이런 인생이 펼쳐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하아, 아빠 사연팔이 또 시작인가… 오랜만이니 들어줘야지.]
아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고아원에서 막 독립할 때 돈 얼마 주거든. 그걸로 작은 고시원에 들어갔는데… 식당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가 돈 좀 급히 빌려달라고 해서 그 돈을 빌려줬어. 근데… 그 동료가 돈 갚는다고 그러고는 다음 날 식당도 안 나오고 잠수 타버린 거 있지.”
나는 잠시 뒤척였다.
[오호, 이건 새로운 사연팔이네.]
아빠는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때, 정말 고시원 월세 빼고 다 빌려준 거라 일하는 식당에서 먹는 밥 한 끼 빼고는 한 달 내내 굶다시피 했어. 하아- 성국아. 아빠 말이야. 그때 진짜 앞날이 캄캄했어.”
[지금 아빠는 가게도 있고, 집도 있고, 돈도 벌었잖아!]
나는 다시 한번 뒤척였다.
“그땐 외국 같은 데 나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순간, 아빠에게로 쿠션이 날아왔다. 그리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애들 다 자잖아. 맨날 성국이 붙잡고 사연팔이 좀 그만해. 성국이 잠도 못 자잖아!”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기야, 어서 자. 성국아, 너도 피곤할 텐데 어서 자.”
“응, 엄마.”
[아빠, 미안하지만 역시 엄마가 최고야!]
나는 곧 눈을 감았다.
아빠는 몇 번 뒤척이더니 곧 요란하게 코를 골았다.
다들 오랜 비행에 피곤했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나는 오랜만에 가족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행복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 * *
“형아! 내 댓글 좀 읽어줘!”
민국이가 아침부터 요란하게 노트북을 들고 달려왔다.
보나 마나 부모님께 자신의 너튜브를 자랑하고픈 마음인 것 같았다.
“형아, 내 동영상에 댓글 엄청 달렸어. 그치?”
민국이의 말대로 동영상에는 댓글들이 엄청 달렸다.
베타 서비스이기 때문에 영어로 달린 댓글들이었다.
- 민국이! 춤선이 예사롭지 않아. 아직 기본기는 부족하지만 저 정도면 좀만 갈고 닦으면 좋은 춤꾼이 될 거야!
- 와, 대박! 저 형제 유전자 내가 다 부러워해도 되는 거야?
대부분은 민국이를 응원하는 댓글이었다.
그때 눈에 띄는 댓글이 하나 있었다.
- 나는 가수들의 연예 기획자인 스캇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제 연락처예요. 관심 있으면… 아니 제발, 연락주세요! 민국이의 재능이 너무 탐나네요!
스캇 브라운이라고?
혹시 내가 아는 그 스캇 브라운인가?
저스트 비버를 너튜브에서 발견해서 키운 그 연예 기획자?
나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
민국이가 옆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형아! 왜 댓글 안 읽어줘?”
“어… 다들 민국이 춤에 반했다고 해.”
“형아, 이번에는 제대로 노래하는 동영상 좀 올려야겠어. 형아, 이 사람 나 만나고 싶다는 거 아니야?”
“어….”
민국이는 더듬더듬 스캇 브라운이 남긴 댓글을 읽었다.
“형아,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연예 기획자라고 하는데….”
“형아! 그럼, 나 이 사람이 캐스팅하는 거야?”
“그건 아직 모르는 거야.”
“형아, 이 사람 만나보고 싶어! 어? 나, 이러다가 미국에서 가수 데뷔하는 거 아니야?”
“흠….”
미국의 연예계 시스템은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거기다 이건 내가 생각한 민국이의 미래랑은 좀 달랐다.
나는 방무혁과 함께 민국이를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자, 세계 최고의 아이돌 그룹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민국이가 옆에서 졸라대기 시작했다.
“형아! 형아! 형아! 제발! 만나자! 만나자고 해봐!”
“민국아, 사기꾼일 수도 있어.”
이름만으로 진짜 스캇 브라운인지 확인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사기꾼이든 아니든 만나봐야 아는 거잖아!”
[이건 민국이 말이 맞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해볼게. 하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마. 한번 해본 말일 수도 있어.”
“응! 형아!”
민국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나는 댓글을 단 스캇 브라운이 남긴 메일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뭔가 영 석연치 않았다.
* * *
띵동.
나는 처음으로 전태국 숙소의 초인종을 눌렀다.
곧 전태국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성국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태국이 형, 저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 진짜? 나한테 하는 거 맞자?”
“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태국이 의외라는 얼굴로 들어오란 손짓을 했다.
“들어와서 얘기하자.”
숙소 안에서는 젊은 양 비서가 한창 아침 준비 중이었다.
“양 비서가 아침 준비 중인데, 먹고 갈래?”
“아니에요. 아빠가 아침 하고 계세요.”
“흠… 맛있겠는데. 혹시 나도 가서 먹어도 돼?”
“대신 제 부탁 좀 들어주세요.”
“겨우 아침밥 대가로 부탁 들어달라는 거야?”
“저희 아버지 요리 솜씨 아시잖아요. 지금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북어국 끓이고 계시거든요.”
전태국은 얼른 젊은 양 비서에게 소리쳤다.
“양 비서, 아침 하지 마. 커피만 한 잔 줘. 성국이네 가서 아침 먹게.”
“아, 네. 알겠습니다.”
젊은 양 비서는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전태국은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봤다.
“그래, 아침부터 날 찾은 이유가 뭐야?”
“민국이 동영상에 스캇 브라운이라는 미국의 연예 기획자가 댓글을 달았어요. 한번 만나고 싶다고요. 민국이의 재능이 탐난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어요.”
“흠… 그 사람 보는 눈은 좀 있네. 나도 민국이에게 투표했잖아!”
전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혹시나 사기꾼이거나 나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민국이는 만나고 싶어 하는데, 혹시 몰라서요.”
“흠… 그러니까 삼전 그룹 차원에서 그 사람 검증 좀 해달라는 거지?”
[전태국, 이런 눈치는 좀 빠른데?]
“네… 검증뿐 아니라 철수 형이든 누구든 같이 나가주셨으면 해서요. 아무래도 제가 연예계 쪽은 잘 모르고, 저나 민국이나 아직은 미성년자잖아요.”
“내가 같이 나가줄게.”
의외의 대답이었다.
“형이 같이 나가주신다고요?”
“응. 나 연예계 쪽에 관심 많거든.”
저번 생에서도 전태국은 연예계 쪽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여자 때문이었지만.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삼전 그룹 차원에서 검증해주고, 더군다나 삼전 그룹의 후계자인 전태국이 같이 나가준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태국이 형, 그렇게 해주세요.”
나는 전태국에게 저번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부탁이라는 것을 했다. 동생 때문에.
* * *
문이 닫히고 전태국은 젊은 양 비서를 불러서 성국이가 건넨 연예 기획자의 이름과 메일을 건넸다.
“양 비서, 비서실 통해서 이 사람 조사해서 알려줘.”
“네, 도련님.”
젊은 양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태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양 비서, 좀 이상해.”
“뭐가요, 도련님?”
“그냥 성국이 가족들은 뭔가 친근하다고나 할까. 분명 처음에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성국이랑 민국이도 그렇고… 뭔가 남 같지가 않아.”
“도련님이 타지에서 혼자 오래 지내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성국이나 민국이가 좋은 친구들이기도 하고요.”
“그런가….”
“참, 아버님이 다음 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전태국은 조금 긴장을 했다.
“벌써 다음 주야?”
“프리젠테이션 준비 시작하셔야죠.”
“흠… 우선 성국이네 가서 아침 좀 먹고. 어제 술 마셨더니 북엇국 엄청 땡겨.”
전태국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전태국이 거들먹거리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성국아, 네가 알아봐 달라는 사람 조사한 거야. 우리 비서팀에서….”
“감사해요, 형.”
“이렇게 간단한 걸 뭘.”
나는 얼른 전태국이 내민 조사 내용을 살폈다.
내가 기억하는 스캇 브라운이 분명했다.
“슬쩍 보니까 꽤 괜찮은 연예 기획자 같던데. 만날 거야?”
“네, 한번 만나보려고요.”
“민국이 녀석 재능이 있나 봐. 미국에서 그런 사람의 연락이 다 오고….”
“그건가 봐요.”
나는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스캇 브라운의 실체도 확인했으니, 이제부터는 슬슬 움직여볼 때였다.
나는 얼른 방무혁의 메일로 민국이의 동영상과 함께 너튜브 링크를 보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적었다.
- 무혁 아저씨, 저 성국이에요. 잘 지내시죠?
혹시 제 동생 민국이 기억하세요?
민국이가 미국에 잠시 어학연수를 왔다가 너튜브라는 동영상 사이트에 노래하고 춤추는 동영상을 올렸는데.
스캇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연락이 왔어요. 알아보니 꽤 유명한 연예 기획자라고 하는데요.
제가 이 분야는 잘 몰라서요. 그리고 민국이가 진짜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저씨가 한번 보고 판단 부탁드려요.
나는 그대로 메일을 전송했다.
지금 나는 방무혁을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방무혁이 진짜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