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나는 우유를 마시면서 제리 창에게 거절의 메일을 썼다.
- 야호와 ‘페이스 노트’는 완벽히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기업으로서 같이 함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서로 다른 가치관에는 마크가 주장한 업무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첫 직원이자 그동안 마크를 통해서 ‘페이스 노트’를 현재의 모습으로 같이 만들어온 리미미를 고용 승계하지 않는 것은 나의 가치관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삼전 그룹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다, 라고 돌아가신 전주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제일 안 믿는 것 역시 사람이라는 아이러니를 가지셨던 분이다.
나는 그래서 마크가 내 뒤통수를 치지 못하게 철저한 계약 관계를 만들어놨고, 리미미의 부모님 탈북을 도와서 신뢰를 쌓았다.
거기다 둘이 사귄다니?
꿈과 사랑의 디즈니랜드에 데리고 간 것도 바로 나 아닌가?
내 어깨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마크가 또 나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성국, 뭘 또 그렇게 혼자 상상하는 거야?”
“마크, 네 덕분에 이제 어디서 투자를 끌어와야 하나 고민 중이야.”
“성국, 내 덕분에 너의 뜻대로 우리는 ‘페이스 노트’를 지킨 거라고. 나도 네가 야호에게 ‘페이스 노트’ 팔 일은 없단 정도는 눈치챘거든.”
“그러시겠지.”
[마크, 괜히 지금에 와서 툴툴거리지 마. 리미미 씨 때문이라는 거 다 알아.]
나는 제리 창에서 메일을 보내고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오늘 저녁에 특별한 일 없으면 저희 집에 가서 저녁 먹어요.”
“전 좋습니다, 사장님!”
리미미가 좋다니, 마크는 당연히!
“난 정말 성국이 아버님 보쌈 너무 좋아. 미국에 지점 안 내시는 거야?”
“한번 물어볼게.”
나는 그저 웃었다.
앞으로 두 사람의 연애를 몰래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았다.
* * *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짜장면이지….]
나는 이미 온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손은 젓가락을 찾아 헤맸고,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성국아, 삼전 호텔 짜장면 맛은 아니겠지만 아빠도 최선을 다했어.”
“아빠, 잘 먹겠습니다!”
내가 소리치자 모두가 아빠에게 인사를 했다.
마크와 리미미. 거기다 전태국과 젊은 양 비서까지.
대체 이들은 왜 항상 우리 식탁에 와있는 것일까?
“성국아, 어서 먹어.”
“응, 아빠.”
나는 얼른 짜장면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입을 호로록 빨아들였다.
[역시 이 맛이야….]
“아빠, 진짜 맛있어.”
“삼전 호텔 짜장면보다 더?”
“응! 더 맛있어.”
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빠, 사실은 조금 못하지만 아빠의 정성 점수가 5점 더 플러스 됐어.]
이때, 젓가락질이 서툰 마크를 도와주는 리미미가 보였다.
[정말 저 두 사람 티 나게 왜 저러는 거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때, 입가에 짜장면을 잔뜩 묻히고 먹던 민국이가 마크와 리미미를 쳐다봤다. 그리곤 대뜸 물었다.
“미미 누나, 마크 형이랑 사귀는 거예요?”
“어?”
리미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만 끔뻑거렸다.
“민국아, 넌 이제 알았어? 난 옛날에 벌써 눈치챘는데….”
전태국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리미미는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저희 사귄 지 그렇게 오래 안 됐어요!”
전태국이 씨익 웃었다.
“민국아, 사귄 지는 얼마 안 됐대.”
“어쩐지…. 디즈니랜드에서 그 재미없는 공주 퍼레이드를 마크 형이 끝까지 보더니….”
한국말로 주고받자 마크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방을 훑었다.
리미미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성국, 대체 다들 뭐라는 거야? 왜 나만 바보된 느낌이지?”
“마크, 아무것도 아니야. 다들 너랑 리미미 씨랑 사귀는 거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하고 있어.”
“뭐어?!”
마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젓가락마저 놓치고 말았다.
엄마가 얼른 일어나서 새 젓가락를 건넸다.
“성국아, 마크한테 괜찮다고 전해. 엄마도 둘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성국이 어머님도 눈치채고 계셨어요?”
리미미가 놀라서 물었다.
“우리 지희가 그러더라고요. 마크 오빠랑 미미 언니랑 둘이 사귀는 것 같다고요.”
이건 나도 놀랄 일이었다.
“지희야, 너 마크랑 리미미 씨랑 사귀는 거 어떻게 알았어?”
“둘이 디즈니랜드에서 사람 많을 때 손잡는 거 봤어.”
[쯧쯧쯧, 아주 증거를 흘리고 다녔네. 다녔어.]
지희의 말까지 전해 들은 마크가 고구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붉어진 얼굴로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아직 사귄 지는 정말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다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마크, 암튼 축하해. 자유연애의 나라 미국에서 첫 연애한 거 말이야!”
내 축하에 전태국이 제일 크게 웃었다.
“뭐야, 마크 모쏠이었어?!”
[전태국, 남의 말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원래 가장 크게 웃는 놈이 제일 수상한 법이었다.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를 쳐다봤다.
“자, 짜장면 더 먹을 사람?”
“저요!”
나는 제일 먼저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이건 누구에게도 질 수 없었다.
* * *
늦은 시각, 제리 창은 심각한 얼굴로 성국의 메일을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서로 다른 가치관이라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고작 십 대와 이십 대로 이뤄진 작은 회사가 감히 야호를 평가해?
지금 야호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검색 포털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제리 창은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겨우 직원 세 명뿐인 회사가 야호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제리 창은 우선 사내 메일로 모든 직원에게 공지를 보냈다.
- 지금부터 야호의 직원이 ‘페이스 노트’를 이용한다는 사실이 발각될 경우, 예외 없이 즉각 해고하겠습니다.
동시에 제리 창은 동업자인 데이비드 파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데이비드 파이는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제리, 지금 몇 시인줄 알아? 새벽 한 시야….
“‘페이스 노트’가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어.”
- 10억 달러를 거절했다고? 대단하네, 그 친구들. 이유가 뭐야?
“우리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져서 인수를 허용할 수 없대.”
- 제리, 진정해.
데이비드가 듣기에도 제리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데이비드, 겨우 ‘페이스 노트’ 같은 회사한테 물 먹은 것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 제리, 그만큼 네가 ‘페이스 노트’를 인수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잖아. 솔직히 난 10억 달러도 너무 많다고 생각했어.
“데이비드,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제리는 점점 더 화가 났다.
야호 회사 내부에서는 이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기업을 10억 달러에 인수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 의견을 모두 묵살하고 10억 달러는 제시한 것은 제리였다.
그런데 실패라니….
- 제리, 내일 아침에 만나서 이야기해. 제발 진정하고, 잠 좀 자. 새벽 1시가 넘었어.
“알았어. 데이비드, 내일 봐.”
제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평소 친분이 있는 방송국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방송국 기자가 전화를 받았다.
“샘, 나 제리야.”
- 갑자기 이 새벽에 무슨 일이야?
“내가 아주 좋은 소스가 있어서.”
- 그건 언제나 오케이지. 무슨 소스인데?
“‘페이스 노트’라는 SNS 기업 알아?”
- 당연히 알지. 요즘 아주 핫하잖아. 야호에서도 관심 보인다는 썰이 있던데, 아니야?
“내가 조금 조사를 해보니까, 보안이 좀 허술한 거 같아. 개인 정보 유출 가능성이 좀 있어 보여서.”
- 정말이야?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거라 정확하기 밝힐 수 없어.”
- 알았어. 내가 조금 더 파고들어 볼게.
제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이제 막 시작하는 기업이 이런 이슈에 휩싸인다면, 분명 크나큰 문제가 될 것이다.
‘페이스 노트’의 가치는 10억 달러가 아니라 휴지가 될 수도 있었다.
* * *
이제 내일이면 가족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간다.
가족과 함께 보낸 일주일은 정말 꿈과 같았다.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나를 맞아주는 가족이 있다는 게 새삼 즐겁기도 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우유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디즈니랜드 갈 때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던 민국이와 지희는 둘 다 아직 꿈나라였다.
아침 일찍 일어난 아빠가 나오는 게 보였다.
“성국아, 벌써 일어났어?”
“회사 좀 일찍 가야 해서.”
그동안 미뤄뒀던 투자자들과의 미팅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였다.
야호의 투자를 거절했으니 이제 다른 투자자들과 미팅을 잡아야 했다.
“아빠가 금방 따뜻한 누룽지 끓여줄게. 찬 우유 마시지 말고 그거 먹어. 누룽지 먹을 시간은 있지?”
“응.”
아빠는 정말 말처럼 금방 누룽지를 끓여서 김치와 한 상을 차렸다.
“성국아, 어서 먹어.”
“잘 먹겠습니다!”
나는 아빠가 끓여준 누룽지를 한 숟가락 떴다. 아빠는 앞에서 보고 있다가 금세 김치를 올려줬다.
“아빠도 같이 먹어.”
“아니야, 너 보내고 아빠는 먹을게. 어서 먹어.”
“응.”
따뜻한 누룽지 때문인지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성국아, 아빠가 누룽지 좀 만들어 놓고 갈 테니까, 이렇게 먹어. 알았지?”
“아빠, 안 만들어 놓고 가도 돼.”
“한국 사람은 밥심이지. 맨날 찬 우유만 마셔도 되겠어?”
아빠는 또 얼른 김치를 올려줬다.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아빠가 오늘 장 봐서 다 만들어 놓고 갈게.”
“괜찮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을게.”
“성국아, 아침 꼭 챙겨 먹고,”
“응.”
“식사 거르지 말고.”
“알았어.”
아빠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겨울에는 한국 들어올 거지?”
“봐서… 일이 바빠지면 못 들어갈 수도 있어. 아빠가 또 민국이랑 지희랑 엄마랑 다 오면 안 돼?”
“아빠도 프랜차이즈 일 시작하면 장담할 수가 없어.”
[아빠는 보쌈집 프랜차이즈 일이 있었지….]
겨울 방학에는 가족들을 못 볼 수도 있단 생각에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성국아, 미리 걱정 말고. 아빠가 그때 꼭 시간 내볼게.”
“응.”
아빠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뭐 하게?”
“사과 깎아줄게. 후식도 먹고 가.”
“아니야, 아빠….”
하지만 이미 내 입에는 사과가 물려 있었다.
[이러려면 또 반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울컥.
눈가가 촉촉해질 무렵,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빌 게이트의 메시지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나는 얼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 성국, 야호의 대표 제리 창이 야호 직원들의 ‘페이스 노트’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공지 메일을 전체 직원들에게 보냈대.
동시에 ‘페이스 노트’의 개인 정보 유출 의혹을 기자에게 제보했다는 소식이 있어. 오늘 오후에 내가 바로 그쪽으로 갈게.
촉촉해지던 눈가가 분노로 타올랐다.
[제리 창, 너 이렇게 비열한 인간이었어!]
아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폈다.
“성국아, 괜찮아? 회사에 무슨 일 있어?”
“아, 아빠.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가족들한테 걱정 끼치기 싫어.]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성국아, 아빠가 잘은 모르지만 이야기해. 아빠가 안 그러면 너무 걱정될 것 같아.”
“아빠… 회사에 작은 문제가 생겼는데, 아마 오늘 해결은 될 것 같은데… 좀 늦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일 비행기 타야 하니까 일찍 자요.”
“성국아, 많이 늦어?”
“회사 나가봐야 알 것 같아, 아빠.”
아빠는 내 어깨를 도닥였다.
“성국아, 힘든 일 있을 때 가족들이 있다는 것만 기억해. 네가 일 다 그만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우리 가족들은 언제든지 환영이야, 알지?”
“응… 아빠.”
[아빠, 아빠 실망시킬 일 절대 없을 거야.]
나는 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집을 나섰다.
가족들을 실망시킬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받은 만큼 고대로 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