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나는 회사에 가서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이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텅 빈 사무실에 퍼지기 시작했다.
사방은 고요했고, 창밖으로 낮은 바람 소리만 들렸다.
내가 저번 생에서도 정말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골치 아픈 일이 터지면 누구보다 일찍 회사에 나와서 이 시간에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드디어 이번 생에 처음으로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하지만, 그만큼 낯설기도 한 쌉싸름함이 목으로 넘어갔다.
[흠… 이렇게 또 어른이 되는 거겠지….]
똑. 똑.
이때, 적막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뒤돌아보자 찰리 잡스가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췌장암 수술을 하고 회복 중인 찰리 잡스는 전에 비해서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성국, 언제부터 커피 마시는 거야?”
“오늘부터요.”
나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찰리 잡스가 슬쩍 웃으며 들어왔다.
“나도 커피 한잔 주겠나?”
“물론이죠, 찰리.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의사들의 항상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 나는 이렇게 살아있지 않나. 성국, 나는 항상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거든. 그래야 어떤 선택이든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다고 믿었어. 근데… 내가 진짜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지막 한 순간까지도 낭비라는 것을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지금 아플사의 직원들이 밤새 일하는 건가요?”
“내가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데, 우스운 기계를 세상에 내놓고 죽을 수는 없지 않겠나, 성국.”
찰리 잡스의 저 고집.
저 고집이 아플을 만들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나는 찰리 잡스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성국,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야호의 인수 제안을 거절했더니… 야호 측에서 헛소문을 퍼트리려는 것 같아요.”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찰리 잡스는 나보다 이 업계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다. 이런 경우도 여러 번 당했을 터였다.
“야호의 제리 창?”
“네.”
찰리 잡스는 빙긋 웃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난생처음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내린 커피치고는 훌륭한데?”
[찰리, 난 나만의 원두를 얻기 위해 브라질의 커피 농장도 사들인 적이 있다고. 흠… 저번 생이지만 말이야.]
“감사합니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찰리 잡스는 말을 이었다.
“난 자네가 어떻게 할지 대충 알 것 같은데?”
그 말인즉슨,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지 알 것 같다는 말이었다.
나도 찰리 잡스라면 어떻게 할지 너무 잘 알았다.
“찰리, 전 야호가 저희에게 하려는 방식 그대로 갚아주려고요.”
찰리 잡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마음에 들어.”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동시에 커피를 마셨다.
“참, 성국. 이런 이야기 이제 나눠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이번 일만 잘 정리한다면 나도 ‘페이스 노트’의 투자자 중 한 명이 되고 싶네.”
각오한 미래였다.
그동안은 피터의 투자와 마크와 리미미만으로도 감당이 되는 회사였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공격적으로 투자를 유치할 때였다.
단, 나와 마크의 지분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투자자 한 명이 독식하지 않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관건이었다.
“찰리, 그 말은 이번 위기를 극복해야지만 ‘페이스 노트’에 투자하겠단 말이죠?”
“성국, 암에 걸리고 났더니 모험을 하기가 점점 두려워져.”
찰리는 엄살을 피웠다.
“하지만 핸드폰의 역사는 바꾸실 거잖아요.”
“그래야겠지?”
찰리는 빙긋 웃었다.
아직 아플폰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찰리는 매일같이 아플폰 회의를 했지만, 아직도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찾지 못했다고 항상 투덜거렸다.
찰리가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성국, 자네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 건가?”
“찰리… 우리는 절대 그러지 못할 사람들이잖아요. 아플사의 폰이 아직 안 나오는 이유도 그거잖아요.”
“맞아….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이야.”
찰리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참, 위기는 ‘페이스 노트’가 혼자 넘어야 하는 거지만 도움을 전혀 주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야. 알고 있으라고, 성국.”
“고마워요, 찰리.”
“커피 값이야. 아주 훌륭했어. 앞으로도 종종 부탁할게.”
“물론이죠, 찰리.”
찰리는 커피를 들고 나갔고, 나는 생각을 천천히 정리했다.
* * *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를 본 마크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국! 너 지금, 커피 마시는 거야? 한국에서 먹는다는 한약이나 그런 거 아니지?”
“커피 맞아. 나도 이제 어른이잖아.”
[물론 술 마시려면 법적으로 한참 멀었어.]
막 빵을 사 온 리미미도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사장님, 지금 커피 드세요?”
“리미미 씨, 빵 미리 잘 먹을게요. 참, 다들 커피 마실 거지?”
“어…”
“저두요, 사장님.”
나는 내린 커피를 능숙하게 마크와 리미미에게 건넸다.
리미미가 사 온 크로와상을 뜯으면서 자연스레 회의가 시작됐다.
우리의 회의는 늘상 이런 식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마크, 리미미 씨… ‘페이스 노트’는 아마 설립 이후 최고의 위기에 봉착한 것 같아.”
“성국,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인수 거절에 화가 난 제리 창이 야호 전 직원에게 ‘페이스 노트’ 사용을 금지시키는 공지 메일을 보냈어. 그리고 빌이 연락이 왔는데…. 기자를 통해서 ‘페이스 노트’가 개인정보 유출을 할 정도로 허술한 보안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흘렸다나 봐.”
“말도 안 돼요, 사장님!”
제일 화를 낸 건 역시 보안 담당인 리미미였다.
“제가 해킹할 때도 ‘페이스 노트’의 보안은 그렇게 엉망이진 않았어요. 그리고 제가 있는데, 지금은 더 말도 안 되죠!”
“제리 창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거야. 우선 기사가 쏟아지면 신생 기업인 우리 ‘페이스 노트’의 기업 이미지는 엉망으로 떨어질 거고…. 그때, 제리 양은 10억 달러보다 더 못한 조건으로 우리에게 인수 제의를 다시 할 거야.”
“나쁜 놈!”
마크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마크, 너무 화내지 마. 우리는 지금 실리콘밸리 정글에 막 입성한 것뿐이야. 앞으로 이런 모함은 수없이 마주해야 할 거야.”
“너무 화가 나서 그래. 야호가 뭐 얼마나 대단한 기업이라고! 지금은 구굴에게도 서서히 밀리는 중이잖아. 그래서 ‘페이스 노트’ 같은 기업이 필요한 거잖아!”
“마크, 네 말이 다 맞아. 하지만 지금으로서 야호는 우리보다 훨씬 힘이 센 회사이고, 우리는 고작 신생 회사일 뿐이야.”
“하아….”
마크는 겨우 분을 삭였다.
“빌이 오후에 바로 우리 사무실로 와준대. 같이 이 일을 상의하자고 해.”
“성국, 빌이 이 일을 도와주는 것도 공짜는 아닐 거잖아.”
“아마 ‘페이스 노트’에 투자하고 싶어 하겠지.”
“결국, 우리가 지킨 ‘페이스 노트’가 투자자들 손에 넘어가는 거야?”
“마크, 그건 내가 어떻게든 막을 거야.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어쨌든 야호의 제리 창을 능가하는 빌 같은 인물의 도움이 필요해.”
“그건 그렇지….”
마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빌이 오기 전까지 돌파구를 찾으면 좋을 텐데….]
* * *
점심도 거른 채, 나는 ‘페이스 노트’를 보고 또 봤다.
빌이 오기 전에 나도 어떤 카드를 쥐고 있어야 했다.
마크와 리미미도 모두 점심은 건너뛴 채 쓴 커피만 들이켰다.
이때, 문득 빌 게이트가 보낸 메시지의 내용을 돌이켜봤다.
[제리 창이 야호 직원들에게 ‘페이스 노트’ 사용을 전면으로 금지하는 메일을 돌렸다고 했지!]
나는 바로 ‘페이스 노트’에 야호와 연관된 태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야호 직원들의 ‘페이스 노트’가 수두룩하게 떴다.
몇 개만 검색했을 뿐인데, 야호의 직원들은 새벽에 전체 공지로 온 메일에 분노하고 있다.
- 우리가 지금 자유민주주의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게 맞아? 우리 보고 ‘페이스 노트’를 하지 말라니?
- 제리는 북조선의 김일성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 게 분명해.
- ‘페이스 노트’를 하고 있는 나는 그럼, 잘리는 건가? 나 실업급여 받을 수 있는 거지?
- 야호에서 ‘페이스 노트’하는 직원을 다 자르면 과연 야호가 제대로 돌아가기나 할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크! 리미미 씨!”
마크와 리미미가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성국, 왜 그래?”
“드디어 해법을 찾았어!”
나는 얼른 야호 직원들의 ‘페이스 노트’가 띄워진 내 노트북 화면을 마크와 리미미에게 보여줬다.
“‘페이스 노트’의 개인 정보 유출 혐의는 분명 거짓이지만, 언론에 흘러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어. 제리 창은 새벽에 야호의 전 직원에게 ‘페이스 노트’를 하지 말라고 전체 메일을 보냈어. 그리고 지금부터 ‘페이스 노트’를 하는 직원은 당장 자르겠다고 경고까지 했어.”
“대박! 성국, 그들이 언론에 흘리려는 개인 정보 유출은 어차피 아무 증거도 없는 이야기지만, 이건 사실이잖아.”
“거기다 지금 직원들이 ‘페이스 노트’에다가 마치 인증하듯이 제리한테 받은 메일을 사진 찍어서 올리고 있어.”
리미미도 얼른 ‘페이스 노트’에서 야호 직원들의 인증 사진을 검색했다.
“사장님, 정말 말도 안 되게 많아요. 거기다 그동안 말 못 한 제리의 태도에 대해서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고 있어요.”
- 제리, 전체 공지 메일을 또 새벽에 보낸 거야? 제발, 업무 시간 외에는 회사 일에 신경쓰고 싶지 않다고.
- 도대체 누가 제리에게 제발 미국 표준시로 일하라고 좀 해줘. 야호가 잘나가는 일본 시간 말고.
마크가 웃으면서 글 하나를 가리켰다.
“성국, 여기 아주 멋진 글이 있어.”
“뭔데?”
“제리가 ‘페이스 노트’ 하지 말라고 지랄하는 것 보니까, ‘페이스 노트’의 미래가 굉장히 밝아 보여. ‘페이스 노트’에서 구직하면 난 바로 옮겨갈 거야.”
“이 글에 좋아요 수가 엄청나요!”
리미미도 덧붙였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풀었다.
“마크, 리미미 씨. 우리도 좋아요 좀 눌러줄까요?”
“성국, 그래도 양심상 제리 욕하는 것 말고, ‘페이스 노트’ 하지 말란 것에만 누르자. 어때?”
“좋지!”
나는 어젯밤 제리가 야호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을 인증해서 올린 직원들의 ‘페이스 노트’ 글마다 좋아요를 눌렀다.
그리고 찰리 잡스와 빌 게이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제가 이번 사건을 뚫고 나갈 해법을 찾았는데, 도움이 조금 필요합니다. 두 시에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 * *
두 시에 찰리 잡스와 빌 게이트가 동시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찰리와 빌은 사실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이 둘을 같이 부른 이유기도 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엄청나게 견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빌이 껄끄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아까 발견했단 해법이 도대체 뭔가?”
“해법은 사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바로 ‘페이스 노트’예요.”
나는 빌과 찰리에게 ‘페이스 노트’에 올라온 야호 직원들의 인증 사진과 글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제리는 새벽에 이성을 잃고 야호 직원들에게 ‘페이스 노트’를 하는 직원은 당장 해고하겠다는 협박성 메일을 보냈어요. 이건 분명한 인권 침해죠. 분노한 직원들은 그 메일을 읽고 인증해서 ‘페이스 노트’에 올리기 시작했고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찰리, 빌. 난 제리가 ‘페이스 노트’의 개인 정보 유출 의혹을 건드리는 거짓 기사를 퍼트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영향력 있는 언론에 이 사실을 터트리려야 한다고 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영향력 있는 언론에 이 사실을 흘려달란 말이군, 성국?”
찰리가 되물었다.
“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빌과 찰리. 두 사람이 가진 영향력이라면 당장 이 기사로 뉴스 지면을 도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