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늦은 밤.
제리 창은 침통한 얼굴로 책상을 정리 중이었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곧 데이비드 파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제리?”
“…….”
제리는 잔뜩 화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야호를 세우고, 여기까지 이끌어온 데이비드가 ‘페이스 노트’에다가 자신의 해고를 밝힐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데이비드 파이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리, 나도 어쩔 수 없었어.”
“…….”
제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사회에서 결정한 거잖아. 솔직히 이번 일은 네가 무리하긴 했지. ‘페이스 노트’를 1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것도 이사회에서 탐탁지 않아 했잖아. 네가 무리해서 진행했는데, 엎어진 것도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메일까지 보내고….”
쿵!
제리는 정리하던 짐을 일부러 소리 내서 놨다. 그러곤 데이비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렇다고 내 해고를 ‘페이스 노트’에 올려! 그러고도 네가 친구야!”
제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데이비드도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제리, 너도 날 친구로 생각했으면 그런 메일을 직원들에게 보내기 전에 상의 한마디는 했어야 하지 않아?”
“…….”
“솔직히 너는 그동안 나를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니라 네 직원 대하듯 했잖아.”
제리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동안 대부분의 일은 제리가 처리하고, 데이비드의 동조를 구하는 방식이었다.
“너의 그 독단적인 태도가 이번 사건을 일으켰고, 이렇게까지 만든 거야. 제리… 친구로서 말하는 건데, 이제 제발 너만 옳다는 생각은 버려.”
“‘페이스 노트’가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건 내 생각은 틀림없이 맞을 거야. 두고 보라고.”
“맞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너의 그 태도 때문에 물 건너 가버린 일이잖아.”
“데이비드, 야호는 이제 구굴에도 밀리고 있어. ‘페이스 노트’ 같은 SNS를 사지 않으면 우리도 경쟁에 밀려 도태될 거란 말이야.”
데이비드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명심할게. 제리, 이제 그만 야호에서 퇴장해줘.”
데이비는 제리가 나갈 수 있게 길을 비켜줬다.
제리는 짐을 들고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이 지켜왔던 야호 CEO의 방을 나섰다.
제리가 짐을 들고 나가는 모습은 야호 전 직원들에게 보였다.
야호 직원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독재자가 물러간다!”
“제리, 다음에 커피 한잔 살게!”
“제리, 실업급여는 잊지 마요!”
“대표도 실업급여 받을 수 있는 거야?”
야호의 직원들은 제리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제리는 그렇게 화난 얼굴로 자신이 일군 회사에서 퇴장했다.
* * *
마크가 졸린 눈을 비볐다.
“성국, 이제 이번 위기는 정리된 거지?”
“제리는 물리쳤지만, 개인 정보 유출 의혹은 언제든 터질 수 있어. 마크, 계속 신경써야 할 거야.”
“암튼 긴장을 안 놔. 참, 너 부모님 내일 떠나시잖아!”
“아, 맞다!”
나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크, 리미미 씨. 나 먼저 들어가요. 참, 나 공항 갔다가 오후에 나올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줘.”
“성국, 어서 가기나 해!”
“내일 봐!”
나는 얼른 사무실을 뛰어나갔다.
[다들 자겠는데….]
* * *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집 안은 깜깜했다.
가족들은 모두 내일 오전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간다.
아마 모두 일찍 잠든 모양이었다.
나는 거친 숨을 살짝 돌리고,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서 쏟아지는 밝은 빛만이 집안을 밝혔다.
냉장고 안의 우유를 꺼내려는 순간, 냉장고 속 스테인리스 반찬통에 나를 향해 다가오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그 뒤로 작은 케이크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오는 지희의 모습도.
[이런… 모르는 척 해줘야 하겠지?]
나는 태연하게 우유를 꺼내서 일부러 뒤도 안 돌아보고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언제까지 우유를 먹게 할 거야? 어서 서프라이즈 하라고!]
내가 우유를 다 마시고 뒤도는 순간, 아빠는 얼른 내 눈을 두 손으로 가렸다.
“전성국!”
“어… 아빠? 아빠, 무슨 일이야?”
나는 일부러 당황한 척 목소리를 냈다.
“자, 이제 됐다! 손 뗀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빠는 내 눈을 가린 손을 뗐다.
눈앞에는 어느새 케이크 위에서 불타오르는 14라는 초가 보였다.
민국이와 지희,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국이의 생일을 미리! 축하합니다!”
“오빠, 어서 촛불 불어.”
지희가 내 앞으로 케이크를 내밀었다.
나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가족들을 쳐다봤다.
“엄마, 아빠. 나 생일 아직 남았잖아.”
“우리 다 한국 돌아가니까, 미리 해주려고 기다렸지.”
“성국아, 어서 소원 빌고 촛불 꺼!”
“응….”
나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페이스 노트’의 세계 제패. 그리고… 우리 아빠 새로 시작하는 보쌈 프랜차이즈 대박 나게 해주시고. 엄마는 그동안 잘해온 SKJ 제작사 좀 더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그리고… 민국이 녀석 좀 더 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전교 1등 꼭 하게 해주시고요. 참, 지희는요. 분명 천재 같아요. 우리 집안에 의사 한 명은 있어야 하니까,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게 해주세요.]
이때, 민국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아, 초 다 녹아! 소원이 왜 이렇게 길어!”
“잠깐만! 마지막이야!”
나는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었다.
[저희 가족 지금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볼 수 있게 모두 건강하게 해주세요. 나 저번 생에서 나이 마흔에 요절했으니까, 이 소원은 꼭 들어줘야 한다! 신!]
나는 소원을 다 빌고 눈을 떴다.
초는 진짜 반쯤 녹아있었다.
지희가 재촉했다.
“오빠, 어서!”
나는 있는 힘껏 초를 불었다.
달칵. 스위치 켜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집 안이 환해졌다.
지희는 쩌억 입 동굴이 다 보이게 하품을 했다.
“지희야, 졸린데 오빠 기다린 거야?”
“응! 오빠 케이크 지희가 들려고 기다렸어.”
엄마가 빙긋 웃으며 지희의 등을 도닥였다.
“성국아, 지희가 졸면서도 절대 침대에 안 누웠어. 누우면 잠든다고. 오빠 오는 거 보고 싶다고.”
[역시 여동생뿐이야….]
감동도 잠시 옆에서 민국이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형아, 형아 우리가 케이크 들고 있는 거 다 알았지?”
[거짓말을 해야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형아, 아무것도 몰랐어.”
“수상한데…. 아까 분명 냉장고 반찬통에 우리가 비친 거 같던데….”
[역시 아이큐 160은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구나…. 아이큐 160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이나 빌걸.]
아빠가 케이크를 들고 식탁 위에 올렸다.
“자, 밤이니까 한 조각씩만 먹고 자는 거야. 알았지?”
지희가 내 손을 꼭 잡더니 끌었다.
“오빠, 지희가 오빠 케이크 잘라줄게.”
“그럴래?”
“응! 그리고 오빠. 지희는 오늘 오빠 옆에서 잘 거야. 알았지?”
“알았어.”
민국이도 끼어들었다.
“형아, 옆자리는 나라고.”
“너도 내 옆에서 자면 되지.”
“진짜 전지희, 한국 돌아가기만 해봐라.”
“둘이 제발 사이좋게 지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하아, 형아의 잔소리를 더는 안 들어도 되는 것 좋네.”
민국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케이크를 한입에 쭉 집어넣었다.
“민국아, 형 생일인데 형아 먼저 먹게 해야지.”
엄마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자, 오빠도 한 입.”
지희가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서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역시 여동생이 최고야….]
눈물을 흘리려는 찰나에, 민국이 녀석도 지희를 따라서 케이크 조각을 내 입에 쑤셔 넣었다.
“형아. 자 먹어!”
“아, 알았어. 천천히 먹을게.”
* * *
민국이와 지희가 내 손을 꼭 잡고 매달렸다.
“형아, 어서 자자.”
“어… 알았어.”
지희는 갑자기 손을 놓더니 아빠와 엄마 손까지 잡고 왔다.
“엄마, 아빠. 오늘 형아랑 다 같이 자자.”
아빠가 머쓱하게 웃었다.
“알았어, 이 녀석들아. 엄마, 아빠는 바닥에서 잘 테니 너희들이 성국이 침대에서 같이 자. 알았지?”
“네에!”
지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지희와 민국이는 곧 곯아떨어졌다.
민국이는 코까지 골면서 제대로 잠에 빠졌다.
어둠 속에서 아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국아, 바쁜 일은 잘 정리된 거야?”
“응. 다 잘 해결됐어.”
“다행이네. 우린 너 오늘 못 보는 줄 알고 걱정 많이 했어.”
“근데… 나 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리미미 씨가 연락 줬어. 리미미 씨 아니었으면 다들 포기하고 잘까 했거든.”
리미미 씨가 내가 퇴근하는 것을 엄마, 아빠에게 알려준 모양이었다.
“성국아… 진짜 괜찮은 거지?”
엄마가 재차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응, 엄마. 진짜 다 잘 해결됐어.”
[엄마, 사업하다 보면 오늘 같은 일은 허다할 거야. 그러니까 이런 일로 걱정하지 마.]
곧이어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렁. 드르렁. 드르렁.
옆에서는 민국이의 작은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드렁. 드렁. 드렁.
그리고 지희와 엄마의 숨소리.
나는 정말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 * *
늘 그렇듯 공항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게이트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민국이와 지희는 나를 놓지 않고 매달렸고, 엄마와 아빠는 민국이와 지희를 안고 겨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공항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나는 가족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심심하다며 같이 배웅 나온 전태국이 나를 흘깃 쳐다봤다.
“성국아, 우는 거야?”
“아, 아니에요. 이건 눈물이 아니라… 눈에 뭐가 좀 들어간 거예요.”
“눈물 맞구만, 뭘.”
전태국의 놀림에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저번 생이나 이번 생이나 동생들은 한결같이 감동파괴자들이었다.
“형, 저 좀 회사까지 부탁드려도 되죠?”
“응. 뭐 할 일도 없으니까. 나는 드라이브나 하고 들어가지, 뭐.”
“형, 편입 공부는 안 하세요? 철수 형은 편입학 알아본다고 오늘도 바쁘다던데요.”
전태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국아, 내가 ‘페이스 노트’를 포기한 이유 중의 하나가 네 잔소리 때문인 거 알아?”
[괜히 말 돌리지, 전태국.]
“정말 네 밑에서 일했다가는 내가 내 수명에 못 죽었을 거야.”
“형, 여기 남은 이유가 편입 때문이잖아요.”
“성국아, 너 한 번만 더 말하면 회사까지 안 데려다준다?”
[어쩔 수 없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
- 마이크로 세이버 사의 빌 게이트. 아플의 찰리 잡스가 ‘페이스 노트’에 조건 없는 투자를 약속하다!
‘페이스 노트’가 미국의 경제지 1면을 장식했다.
나는 들뜬 얼굴로 기사를 보고 또 봤다.
삼전 그룹이 세계적인 경제지에 오르내릴 때보다 더 기뻤다.
‘페이스 노트’는 순전히 나와 마크가 이룩한 기업이기 때문이다.
마크는 미소가 떠나지 않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정말 믿기지 않아. 우리가 지금 경제지 1면에 난 거지?”
“정확히는 ‘페이스 노트’가 난 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마크를 쳐다봤다.
“마크, 우리 이젠 이 사무실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공짜 사무실도 벗어나고, 새로운 인재를 더 영입할 때였다.
“그렇지… 프로그래머도 더 뽑고… 근데, 얼마나 더 뽑아야 하는지 사실 난 감도 안 와. 사무실은 또 얼마나 큰 데를 얻어야 하는 거야…”
삼전 그룹도 운영했는데, ‘페이스 노트’는 식은 죽 먹기이다.
나는 마크의 어깨를 잡았다.
“마크, 그건 나한테 맡겨!”
이제부터 ‘페이스 노트’ 시즌2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