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버락 오마하는 얼른 젠틀한 미소를 지었다.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버락 오마하. 내 조언 듣고 대통령 된 다음에 입 싹 닫으면 안 돼.]
나는 속마음과 달리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신 삼전 그룹의 창업주 전주신 회장님은 항상 그러셨다.
비즈니스 하는 사람은 속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고.
“의원님, 항상 선거 때마다 오르내리는 것이 선거 비용 문제잖아요.”
“그렇죠.”
버락 오마하는 적절한 리액션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승리한 이유도 그 시절 처음 시작한 TV 토론이 여론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잖아요. 그만큼 새로운 미디어는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치잖아요. 앞으로는 SNS의 시대고요.”
“맞는 말이네요.”
버락 오마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나를 보고 빙긋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대통령 선거로 예를 들어서 조금 놀랐어요.”
[놀라긴 아직 일어. 난 당신이 미국의 44대 대통령이 되는 거 이미 알고 있다고.]
나는 모르는 척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잘은 모르지만, 연방 상원의원까지 하셨다면 다음 목표는 누구나 다 아는 그 자리 같은데요.”
버락 오마하는 주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성국, 나가서 이야기 좀 할까요?”
“물론이죠.”
나는 버락 오마하를 따라서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주변은 어두웠고, 고요했다.
“여기 있으면 크리스마스 같지 않아요. 너무 따뜻해서요.”
역시 버락 오마하는 정치인답게 딴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음 질문을 훅 던졌다.
“성국 군은 앞으로의 선거는 SNS가 좌지우지할 수도 있단 말을 아까 했던 거죠?”
“그렇게 거창한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SNS를 운영하다 보니까 여론이 보이거든요. 특히 젊은 층의 여론이 보이는 거죠.”
“흠… 그렇겠네요. 성국… 혹시 제가 다음 선거를 준비하게 되면, 나를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전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이라서요. 물론 여기는 자유민주주의 나라 미국이니까 제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순 있지만, 회사에 위협이 되는 행위는 할 수 없잖아요.”
버락 오마하는 내게 손을 다시 내밀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생각해 봐요. 난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내 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거에서 이길 거 같거든요.”
[그건 당연하지. 내가 여성표는 아마 몰아줄 거야.]
나는 얼른 버락 오마하의 손을 잡았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2007년 버락 오마하는 대선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은 없는 모양인 듯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성국 군도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살아봐서 잘 알 거예요. 어쨌든 이곳은 유리천장이 존재하는 곳이잖아요. 내가 아무리 뛰어나고, 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결국, 저들은 내 피부색을 보거든요.”
물론 나는 잘 생겼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적으로 증명해낸 덕분에 차별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버락 오마하의 말처럼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버락, 당신은 정치에서, 나는 비즈니스에서. 우리가 뚫고 나가야 할 일이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아마 할 수 있을 거예요. 안 그래요?”
순간, 버락 오마하의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Yes, We can!”
나는 다시 한번 이 말을 강조했다.
[버락 오마하, 이 말은 당신 대선의 슬로건이잖아.]
버락 오마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제시가 오늘 여기 가자고 저를 재촉한 이유가 있었네요. 성국, 앞으로 어떻게 됐든 나는 당신이 몇 년 후에 나와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아직 어려서요.”
“그러네요. 그럼, 몇 년 후에 봐요. 좀 더 자라서요.”
버락 오마하는 유쾌하게 말을 건넸다.
* * *
제시는 맥주를 들고는 마크에게 다가왔다.
“마크, 그동안 잘 지냈지?”
“어… 무척.”
“여기 분위기 너무 좋다. 꼭 너희 둘 같아. 자유롭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일만 하게 생긴 공간인데?”
“아직 자리가 덜 잡혔어. 너는 정치 쪽에 관심 있는 거야?”
“아버지가 마련한 자리야. 버락이 유망한 정치인이라고. 난 방송 쪽으로 나가고 싶은데, 이게 내 이력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하, 그렇구나.”
제시는 슬쩍 마크를 이전과 다르게 쳐다봤다.
사실 제시의 마음은 여전히 성국에게 있었지만, 성국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법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성국이 제시에게 친구 이상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크, 아버지가 네 이야기 종종 하셔.”
“그래?”
마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충 제시의 말을 맞받아쳤다.
“성국보다 네가 더 성공한 기업가가 될 거라고 항상 이야기하시거든.”
“나와 성국은 같이 일을 하는 건데….”
“평생 같이할 수는 없잖아.”
“무슨 소리야. 우리는 평생 같이 일할 거야.”
마크는 단호했다.
평소와 달리 자신의 말에 단호한 마크가 제시는 조금 신경이 쓰였다.
“제시, 우리를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환영하는 일이지만, 성국과 나 사이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양할게.”
“마크, 난 그게 아니라….”
제시는 뭔가 자신의 마음대로 일이 되어가지 않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때, 리미미가 등장했다.
“마크, 하와이안 피자 좀 챙겨둬요. 없어지면 성국이 아마 불같이 화낼 거예요.”
“어, 그렇지. 미미 씨는 피자 좀 먹었어요?”
“마크는요?”
“참, 미미 씨. 이건 크리스마스 선물이요.”
마크는 주머니에 숨겨둔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제시는 의아한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봤다.
리미미는 작은 상자를 열어보더니, 작고 반짝이는 알이 달린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마크는 쑥스럽게 웃으며 리미미의 반응을 기다렸다.
“우리 사귀고 첫 크리스마스인데, 일만 하게 해서 미안해요.”
“흠… 마크…”
리미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제시를 한번 보고는 얼른 마크를 꼭 안았다.
순간, 제시는 놀라고 말았다.
언제나 자신 어장의 물고기인 줄 알았던 마크가 연애를 한다고!
리미미는 어이없어하는 제시를 보곤 마크에게 속삭였다.
“마크, 딴 여자한테 한눈팔면 죽을 줄 알아요.”
“미미 씨, 난 그런 적 없어. 알잖아. 나한테는 미미 씨뿐이야.”
“마크, ‘페이스 노트’에 연애 중으로 바꿔요.”
“진짜? 그거 싫어했잖아. 괜히 일이랑 연애랑 얽히는 느낌이라고.”
리미미와 마크는 서로 ‘페이스 노트’에 연애 중이라는 표시를 하지 않았다.
혹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괜히 얽매이는 것 같아서였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난 당연히 좋지. 지금 당장 할게.”
마크는 헤벌레 웃으며 노트북을 찾아 인파를 뚫고 사라졌다.
리미미는 남아서 제시를 쳐다봤다.
제시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남아 있었다.
“제시, 앞으로 좋은 남자 만나길 바랄게요.”
“…….”
제시는 리미미의 말에 콧방귀만 뀌고는 사라졌다.
* * *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화난 얼굴의 제시가 막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제시, 벌써 가게?”
“성국…. 마크와 그 여자친구한테 전해줘. 난 마크한테 관심 있었던 적 없다고.”
[마크한테 껄떡이다 차였구나, 제시.]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버락이랑은 무슨 이야기한 거야?”
“그냥, 우리 회사에 대해 궁금해해서 소개해줬어.”
“참, 내일 크리스마스인데. 성국, 우리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제시, 미안. 난 아침 비행기로 마셜 제도에 가기로 해서.”
“마셜 제도에? 성국, 너도 누구랑 연애 중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시, 나 미성년자야. 성인이 될 때까지는 연애 생각도 없어. 할 일도 너무 많고….”
“아, 알았어. 그럼, 잘 다녀와. 시간 되면 우리 의원 사무실에도 놀러 와.”
“응.”
뒤에서 보좌관과 함께 들어오던 버락 오마하가 제시를 불렀다.
“제시, 우린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네, 저도 떠날 준비 됐어요.”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버락 오마하와 눈인사를 나눴다.
* * *
새벽이 되자, 모여들었던 인원들 대부분이 떠나고 몇 명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기에는 물론 나와 마크, 리미미가 있었다. 군식구인 일론도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2층 난간에 섰다.
마크가 다가오더니 맥주병을 커피잔에 부딪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성국.”
“마크도, 메리 크리스마스.”
“성국, 아까 버락이랑 무슨 이야기했어?”
“선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마크, 내가 말하면 이게 다 천기누설이야.]
마크는 잠을 자고 있는 일론을 쳐다봤다.
“성국, 넌 일론이 성공할 거라고 믿는 거야?”
“흠… 글쎄.”
[당연히 성공하지. 하지만 이것도 천기누설이야.]
“성국, 난 네가 하는 일을 전적으로 지원하지만 일론 일은 잘 모르겠어. 전기자동차에, 우주 사업이라니.”
“마크, 남들도 우리를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몰라. 저 어린 동양 남자애랑 어수룩한 남자애 둘이서 뭐 하자는 거지? 그렇게 말이야.”
마크는 피식 웃었다.
“맞아. 나도 우리가 이런 회사를 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근데 성국… 나 좀 걱정이 되는 일이 있어.”
“걱정되는 일? 뭔데, 마크?”
“네가 자꾸만 ‘페이스 노트’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 그게 걱정돼.”
마크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페이스 노트’의 핵심은 마크를 비롯한 프로그래머들이다.
물론 나 같은 인재가 아이디어를 내고, 회사를 운영하며 투자자를 유치하기도 해야 하지만 결국, ‘페이스 노트’를 움직이는 것은 마크인 것이다.
앞으로는 내가 적게 일해도 고용된 직원들이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낼 것이다.
그리고 회사는 앞으로 그렇게 돌아가야만 했다.
“마크, 무슨 소리야.”
나는 모르는 척 대꾸했다.
“성국, 난 네가 ‘페이스 노트’에만 얽매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더 많은 일을 할 사람이라고도 생각하고….”
“마크… 하지만 난 항상 ‘페이스 노트’가 최우선이야.”
마크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은 이제 다른 일도 해보고 싶다는 거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에게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다.
일론을 따라서 마셜 제도에 가서 스페이스 Z를 보고 싶었고, 앞으로 다가오는 미국 대선 후보인 버락 오마하도 돕고 싶었다.
“마크, 솔직히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어.”
“역시… 슬픈 예감은 잘 맞아.”
“마크, 이건 슬픈 예감이 아니야. 이제 ‘페이스 노트’는 네가 더 필요해. 그건 사실이잖아. ‘페이스 노트’에 대해서는 너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잖아.”
“성국…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Yes, We can!”
마크는 피식 웃었다.
나는 마크의 어깨를 도닥였다.
* * *
나는 일론과 비행기에 올랐다.
일론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성국, 덕분에 오랜만에 비즈니스 타는 것 같아.”
“일론 덕분에 저도 마셜 제도는 처음이에요.”
“근데, 성국. 너 돌아가는 비행기 표는 끊었어?”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론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일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일론, 나도 스페이스 Z에 참여하고 싶어요.”
“성국, 우린 성공하기 전까지는 마셜 제도에서 안 나올 건데, 그래도 괜찮아?”
띵- 이륙 메시지가 떴다.
나는 안전벨트를 맸다. 그리고 일론을 쳐다봤다.
“일론, 어서 안전벨트나 매요.”
일론은 함박 미소를 지었다.
“성국,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