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마크는 들뜬 얼굴로 ‘페이스 노트’ 사무실 하나를 내게 보여줬다.
“성국, 여기 뷰가 장난 아니야. 널 위해서 남겨둔 사무실이야.”
마크의 말대로 앞이 확 트이고, 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처음 시작한 하버드 앞의 그 스튜디오보다도 훨씬 넓어. 책상이랑 컴퓨터, 원하는 대로 내가 다 세팅해줄게.”
“흠…. 마크, 내가 쓰기에는 너무 큰데?”
“무슨 말이야, 너무 크다니? 넌 ‘페이스 노트’의 공동 CEO잖아.”
나는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마크, 나는 좀 더 직원들과 편하게 소통하면서 내 일도 볼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어. 우리는 항상 그런 사무실을 썼잖아.”
“그거야. 너랑 나. 그리고 미미 씨까지 해서 겨우 세 명이었으니까 그렇지.”
“그때 우린 어느 때보다 소통이 잘됐잖아. 리미미 씨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말하고, 그럼 네가 받아서 해결하고. 종종 그 자리에서 바로 회의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회사는 체계라는 게 있어야 하잖아.”
“마크, 우리는 기존의 고리타분한 어른들이나 하는 회사를 하려고 ‘페이스 노트’를 시작한 게 아니잖아.”
“그렇지만….”
마크는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마크, 내가 사무실을 달란 의미는 그저 내가 노트북을 놓고 일할 곳을 달란 말이었어.”
“그런 거였어?”
“응… 난 그리고 너랑 리미미 씨가 뭘 하는지 항상 지켜보고 싶거든. 사내 연애로 회사 분위기 안 좋게 만드는지 감시도 할 겸.”
“성국, 정말 이러기야?”
“농담이야.”
마크가 어깨동무를 했다.
“성국, 네가 한 말에 농담 따위는 없는 거 다 알고 있어. 너 지금 진심이잖아.”
[흠, 들켰군.]
나는 그저 웃었다.
“또 그냥 웃는 거 봐. 애매할 때면 그 잘생긴 얼굴로 그렇게 웃어서 넘어가지만, 그거 나한테는 안 통한다는 거 알지?”
“마크, 많이 컸어.”
“성국, 너만큼 컸을까. 너 처음 봤을 때 가방 메는 것도 버거운 꼬맹이였잖아! 근데 지금은 나보다 훨씬 크잖아!”
마크는 과거를 떠올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와 마크의 ‘페이스 노트’에 알림이 동시에 울렸다.
“누구지?”
“보나 마나 애슐리이지.”
“성국, 넌 꼭 애슐리 머릿속에 있는 것처럼 말해.”
[당연하지. 난 그 여자에 대해 잘 안다고….]
저번 생에서 투자할 때, 미국에서 난 수십 차례 그 여자를 만났고 속았다. 속은 이후에 너무 분해서 잠도 못 자면서 그 여자를 분석했다.
동시에 수십 건의 소송도 진행했다.
그때마다 그 여자는 각종 핑계를 대며 재판을 미뤄서 내 화를 돋우곤 했다.
이번 생에서는 그 여자 마음대로 흘러가게 절대 둘 수 없다.
나는 ‘페이스 노트’를 확인했다.
역시나!
애슐리가 나와 마크에게 동시에 블러드테라피의 파티에 초대한다는 내용의 초대장을 ‘페이스 노트’로 보냈다.
“성국,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우리에게 친구 신청은 하지도 않고. 파티에는 오라고 하잖아.”
“마크, 너는 아마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게 있는데.”
“그게 뭔데?”
“밀당이라는 거야. 주로 남녀 사이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하는 일종의 줄다리기 같은 건데. 지금 애슐리는 우리와 밀당을 하는 거야.”
마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우리랑 왜 밀당을 해? 우리가 사귈 사이도 아니고. 솔직히 넌 미성년자이고, 난 이미 여자친구가 있잖아.”
“애슐리는 그냥 이걸 즐기는 거야. 사업에서도. 이 밀당을 통해서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바로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려고 할 거야.”
“성국, 넌 정말 몇 살이야? 이럴 때 보면 빌 게이트나 찰리 잡스 또래 같아.”
[또래, 맞지.]
나는 얼른 애슐리의 초대장을 수락했다.
“마크, 너도 수락해.”
“밀당이라며? 그럼, 수락 안 하고 튕겨야 하는 거 아니야?”
“마크, 처음엔 애슐리에게 넘어간 것처럼 보여야 좀 더 쉽게 접근하지.”
“그런가….”
나는 마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마크, 네가 연애한 건 기적인 것 같아.”
“성국, 네가 아직 미성년자라서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너도 연애하기 나만큼 어려울 거야. 나중에 연애할 나이 되면 연애 선배로서 코치 많이 해줄게.”
마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드레스코드도 있네, 이 여자는. 벤처 기업에서 하는 파티에 무슨 슈트야?”
“저번에 산 옷 그대로 입고 가면 되지, 뭐.”
“성국, 이번에는 옷 안 사주는 거야?”
마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마크, 내가 아직 명품 슈트 두 벌 살 만큼 부자는 아니야.”
[적어도 삼전 그룹 재산만큼은 일궈야 명품 슈트 두 벌쯤 사는 거야, 마크.]
이 생각을 하고 보니, 내가 꽤 아빠와 닮아가는 것 같았다.
저번 생에서는 똑같은 옷을 입는 날이 없었는데, 이번 생에서는 돈을 아무리 벌어도 자린고비가 되는 느낌이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거야….]
* * *
애슐리 홈즈의 벤처 회사는 실리콘밸리에서도 가장 비싼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마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블러드테라피는 요즘 막 투자받기 시작했다고 하지 않아?”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빈 수레가 요란하다. 지금 애슐리 홈즈가 딱 그런 거 아닐까?”
“성국, 잠깐.”
“왜, 마크?”
마크는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셔츠 단추를 잠갔다.
“마크, 뭐 하는 거야?”
“성국, 이거 반칙이지. 셔츠 단추 세 개는 스무 살 넘으면 푸는 거야.”
“나 미성년자잖아. 이런다고 여자들이 넘어올 리가 없어.”
“미성년자니까 셔츠 단추는 한 개 이상 풀면 안 돼!”
나는 어쩔 수 없이 셔츠 단추 한 개만 풀고 애슐리 홈즈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 * *
애슐리 홈즈의 파티장은 저번에 열린 호텔 파티 부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샴페인과 캐비어. 각종 핑거 푸드 역시 호텔에서 공수해 온 것 같았다.
마크는 얼른 샴페인을 집더니 핑거 푸드를 입에 넣고 투덜거렸다.
“피자나 주지. 이런 거로는 배도 안 찬다고.”
나도 옆에 있는 캐비어를 집어서 먹었다.
“흠….”
역시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었다.
샴페인도, 캐비어도 구색만 맞춰놨을 뿐 싸구려였다.
애슐리 홈즈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저번에 입은 것과 다른 블랙 드레스를 입고, 오늘은 공들여서 머리로 말끔하게 올렸다.
“어머, 마크와 성국. 둘 다 또 보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저희는 그저 편한 파티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거창한데요.”
“성국이랑 마크 외에도 오늘 중요한 투자자들이 오거든요. 내가 이따가 소개해 줄게요. 다들 장난 아닌 거물들이에요. 우리 회사에 투자할지도 몰라요.”
애슐리는 우리에게 그 거물 투자자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사업이 얼마나 든든한지 홍보하려는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뭐, 제리 창 같은 찐따들이나 모았겠지.]
나는 빈속을 채우기 위해서 연어롤 하나를 입에 밀어 넣었다.
그때,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인물이 한 명 등장했다.
“성국, 저기 태국이 아니야?”
전태국이 거만한 얼굴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애슐리 홈즈가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전태국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살짝 팔짱까지 끼고는 전태국에게 사무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설마 블러드테라피에 투자할 거물이 전태국이야?]
나는 놀라서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전태국을 바라봤다.
물론 과거의 내가 했던 투자 실패에 비추어 본다면 전태국이 애슐리 홈즈의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다.
[삼전 그룹의 유전병 때문이겠지….]
마크가 놀라서 나를 잡았다.
“설마 전태국이 여기 투자할 거란 말이야?”
“전태국이라기보다는 삼전 그룹 차원에서 투자하겠지.”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한 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병 때문에 그 수저를 놓기 싫은 건 너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는 그래서 애슐리 홈즈가 더 싫었다.
애슐리 홈즈는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사기를 쳤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사기야말로 악질 중에 악질이었다.
이때, 전태국이 나와 마크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들었다.
“성국! 마크!”
마크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성국, 블러드테라피가 진짜 사기라면 태국이한테 귀띔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
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글로벌 호구스럽게 우리에게 당해준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정보쯤은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전태국에게 이 정보를 흘린다는 것은 곧 삼전 그룹이 움직인다는 말이었다.
작은 일이 커지게 되면 그 뒤에 내가 있다는 것까지 알려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애슐리 홈즈의 사기를 밝히기 전에 내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나는 마크에게 속삭였다.
“마크, 아직은 아니야. 태국이 형도 아마 아직 투자를 확정하진 않았을 거야. 분위기를 지켜본 후에 행동하자고.”
“알았어.”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파티장에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애슐리 홈즈가 제공한 싸구려 샴페인을 마시며 무대에 선 애슐리 홈즈를 주목했다.
애슐리 홈즈는 자신이 개발한 혈액 진단 키드를 가지고 나와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단 몇 방울의 피로 250 여 가지가 넘는 질병을 알아낼 수 있는 진단 키트를 약국에서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요?”
“병원이 필요 없겠는데요!”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애슐리 홈즈는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설명을 이었다.
“그렇죠. 저희 블러드테라피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병원에 한 번 가려면 예약부터 시작해서 비용도 만만치 않게 깨지죠. 그런 여러 가지 절차와 비용 때문에 병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제가 개발한 블러드테라피의 혈액 진단 키트인 ‘토마스’가 상용화된다면 블러드테라피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요? 상상만 해도 행복한 미래가 바로 이 ‘토마스’에 있습니다.”
전태국은 마치 신을 보듯이 애슐리 홈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애슐리 홈즈는 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어머, ‘페이스 노트’의 전성국 대표님이 여기 와 계시네요.”
그 말 한마디에 실내가 웅성거렸다.
‘페이스 노트’가 얼마나 투자자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는지 한 번에 알 수 있었고, 동시에 애슐리 홈즈는 우리의 인지도를 이용해서 블러드테라피를 홍보했다.
“전성국 대표님, 뭐 질문이라도 있으세요?”
“네. 궁금한 게 있어서요.”
“편하게 물어보세요.”
“지금 하신 말씀은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런 혈액 키트가 있다면 당장 약국에 가서 살 거 같거든요. 그런데, 지금 말씀만 하셨지 혈액 진단 키트를 이용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질병을 밝혔는지 같은 연구 결과는 하나도 없네요. 그리고 지금 혈액 진단 키트는 임신 진단 키트와 모양도 비슷한데, 언제쯤 저희가 눈으로 그 키트로 질병을 밝혀내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을까요?”
애슐리 홈즈는 큰 두 눈을 깜빡였다.
내 질문에 대답을 찾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나는 연달에 질문을 했다.
“진단 키트가 있다면 그걸 분석하는 기계도 있어야 할 텐데, 그 기계는 지금 보이지 않네요.”
내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애슐리 홈즈도 당황하는 게 보였다.
[자, 애슐리. 말만 하지 말고, 진짜를 보여달라고!]
나는 팔짱을 끼고 애슐리 홈즈를 쳐다봤다.
애슐리 홈즈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뱉더니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웃었다.
“조급하신 관객분이 계시네요. 이제부터 제가 보여드릴 것은 바로 이 키트를 통해 수집된 혈액을 분석해서 질병을 검사하는 기계입니다. 저는 이 아이를, 어머, 워낙 제가 공을 들이다보니 아이라는 말이 나오네요.”
애슐리 홈즈는 억지로 유머를 섞었지만, 좌중은 조용했다.
크게 숨을 쉰 애슐리 홈즈가 손뼉을 치자 뒤에서 직원 한 명이 복사기 같이 생긴 기계 하나를 끌고 나왔다.
“자, 여러분. 이 기계가 바로 혈액 진단 키트를 분석해줄 저희 회사 이름을 그대로 딴 블러드테라피입니다. 그럼, 이 기계가 혈액 분석하는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서 혹시 귀중한 피를 몇 방울 주실 분 계실까요?”
나는 다시 번쩍 손을 들었다.
“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