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마크의 잔소리는 집에 와서까지 계속 됐다.
“성국, 솔직히 존 칸인가하는 그 사람이 진짜 애슐리 홈즈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지 아닌지 모르는 거잖아!”
[아, 이걸 나는 확실히 안다고 어떻게 이야기하지. 저번 생에서 다 조사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마크는 거실 중간을 이리저리 오갔다.
“솔직히 성국. 성국,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어… 잘 듣고 있어.”
사실 반은 흘려듣고 있었다.
“성국, 내 생각에는 우리가 너무 애슐리 홈즈에게 예민하게 반응한 거 같아.”
“마크, 007이고 어쩌고 하면서 좋아했잖아. 너도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봐. 애슐리 홈즈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도 그래서 너한테 동조했던 거지. 과학 잡지에서 혈액 몇 방울로 250여 가지의 질병을 검사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 그 부분이 제일 이상했어. 애슐리 홈즈의 말을 잘 듣다보면 모든 게 미래에 가능하다는 이야기거든. 오늘도 그랬잖아.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는 될 거라고. 그건 여섯 살짜리가 커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는 것이랑 같은 거잖아.”
[역시 마크도 보통은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 바로 그거야. 미래에 될 것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팩트를 보여줘야 하잖아. 하지만 애슐리 홈즈는 허접한 진단 키트와 블러드테라피라는 혈액 분석 기계를 들고나와서 상황만 넘어가고 있잖아. 정확한 데이터인지도 솔직히 상당히 의심스러워.”
“그건 그렇기도 한데….”
마크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존 칸이 애슐리 홈즈의 애인이라고 말한 건 너무 나간 추측 아니야?”
“마크, 두고 봐.”
나는 팔짱을 꼈다.
지금은 모르지만, 다들 알게 되는 사실이라고.
그리고 분명한 것은 지금 애슐리 홈즈와 존 칸이 엄청 다툴 거라는 거지.
[남자가 질투하기 시작하면 무섭다고.]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 * *
존 칸은 소파 앞을 오갔다.
소파에 앉은 애슐리 홈즈가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피곤한 척 굴었다.
“존, 난 이만 자러 갈게.”
“애슐리…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없어?”
“무슨 소리야. 난 당신한테 거짓말하는 거 하나도 없어. 오늘따라 왜 이래? 나 오늘 너무 피곤해. 파티에, 투자자들 설득에. 모든 것을 내가 하고 있잖아.”
애슐리의 미간이 구겨지자 존 칸은 슬쩍 애슐리 눈치를 봤다.
그래도 이 말을 안 하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아니… 애슐리, 이상하게 듣지 마.”
“어서 말이나 해. 존, 난 이제 잠 좀 자고 싶어.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그게… 내 생각에는 애슐리가 투자자들한테 너무 다정하게 구는 거 같아서.”
애슐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어이없다는 얼굴로 존을 바라봤다.
“존, 블러드테라피에 투자한 사람들이니까 다정하게 구는 게 당연한 거잖아. 이런 걸로 쓸데없이 꼬투리 잡을 거면 우리 그만 헤어져.”
애슐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존은 얼른 애슐리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 나를 이용하고 버리겠다는 거야? 내가 블러드테라피에 쓴 돈이 얼마인 줄 알아!”
“존… 지금 그까짓 돈으로 나를 옭아매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존은 당당한 애슐리의 태도에 조금 기가 죽었다.
애슐리는 그걸 눈치채고는 얼른 존을 다독였다.
“존… 나는 블러드테라피가 자기랑 나랑 같이 이룬 회사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시작 단계잖아. 그리고 투자자들은 스탠포드 출신의 금발인 나를 좋아할 게 뻔하잖아.”
애슐리는 존의 손을 잡았다.
“존, 난 그저 비즈니스적으로 투자자들에게 친하게 대했을 뿐이야.”
“아, 알았어.”
“근데… 존. 오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혹시… 누구한테 무슨 이야기 들었어?”
“그 동양의 남자애 있잖아. 잘생긴.”
“성국?”
“응. 암튼… 난 그냥 애슐리가 걱정돼서.”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우리 블러드테라피는 이제 시작이잖아.”
“응.”
존 칸은 어느새 애슐리 홈즈에게 길들여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만 들어가서 잘게. 존, 다음 주에 있을 파티에서는 오늘처럼 구색만 맞춘 싸구려는 안 돼. 좀 더 파티를 크게 열었으면 하는데… 괜찮겠지?”
“어… 내가 자금은 알아서 준비할게.”
“고마워, 존.”
애슐리 홈즈는 들어가면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우리 저녁이나 먹을까요?
* * *
초인종이 시끄럽게 울렸다.
마크의 잔소리에 질려갈 때쯤이라 나는 얼른 인터폰을 확인했다.
인터폰에는 전태국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전태국이 날 구원해줄 줄이야.
나는 얼른 문을 열고, 격하게 전태국을 반겼다.
“태국이 형, 어서 와요.”
“성국, 무슨 일 있어? 왜 평소와 달리 이렇게 반기는 거지?”
“아까 파티에서 간만에 봐서 더 반가운가 봐요.”
나는 애써 둘러댔다.
“태국이 형, 근데 이 밤에 무슨 일이에요?”
“아까 너랑 마크가 파티에서 사라져서 궁금해서….”
전태국도 조금의 눈치라는 게 있는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태국이 형, 블러드테라피 어떻게 생각해요?”
“흠… 어쨌든 모두가 원하는 것을 아는 기업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그 얘기 하려고 온 게 아니고….”
전태국은 나를 스킵하더니 마크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마크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마크, 미미 씨랑 연애할 때 마크가 먼저 대시한 거지?”
“태국,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야?”
“왜긴… 애슐리한테 내가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메시지를 보낼까 해서.”
“태국, 애슐리한테 관심 있는 거야?”
마크는 놀라서 물렀다.
전태국은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뭐, 결혼은 집에서 정해준 여자랑 하겠지만. 미국에 있는데, 좀 더 다양한 여자들을 만나도 좋을 것 같고 해서… 애슐리 정도의 유망한 사업가라면 아버지도 연애하는 건 눈감아 주실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태국이 그럼 그렇지….]
마이너스 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감정에 연연해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전태국은 애슐리 홈즈와 어떻게 해보려고 투자까지 하려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
마크도 난감한 얼굴로 전태국을 쳐다봤다.
“태국, 네가 애슐리에게 관심 있는 것은 알겠는데… 좀 더 사람을 알아보는 건 어때?”
“무슨 소리야?”
“그냥… 애슐리 그 여자 좀 너무 모두에게 친절하잖아.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숨기는 경우가 많더라고.”
마크는 최대한 에둘러 말했다.
전태국은 이마를 긁적였다.
“흠…. 네가 북조선 출신의 딱딱한 리미미 씨랑 사귀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이때, 리미미가 막 집에 들어왔다.
“듣는 리미미 기분 나쁩니다, 전태국 씨.”
“뭐,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근데 두 사람 사귀는 사이에 한집에서 사는 건 미성년자인 성국이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 아니에요?”
“태국, 우리는 진짜 여전히 좋은 하우스메이트로 지내.”
“마크, 그런 건 성국이한테 물어봐야지. 성국아, 넌 진짜 괜찮아?”
“난 상관없어. 어차피 난 얼마 후에 한국 다시 들어가 봐야 하거든.”
“한국에는 왜?”
“설날이잖아요. 가족들 만나러 가야죠.”
[그 전에 애슐리 홈즈를 박살 내고….]
이때, 핸드폰에 메시지 알람이 뜬 게 보였다.
누구지?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내 미간이 구겨졌다. 바로 애슐리 홈즈였다.
- 우리 저녁이나 먹을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메시지를 보냈다.
- 피자 괜찮죠?
득달같이 답이 왔다.
- 난 하와이안 피자를 사랑하거든요.
[애슐리, 이런 수작은 태국이나 제리 같은 애들한테나 통하는 거야.]
애슐리 홈즈는 분명히 내 ‘페이스 노트’를 뒤져서 나에 대해서 알아본 게 틀림없었다.
태국이 메시지를 주고받는 나를 흘깃 쳐다봤다.
“성국, 누구랑 이야기 중이야?”
“애슐리 홈즈는 저한테 관심 있는 거 같은데요.”
나는 태국에게 애슐리 홈즈가 보낸 메시지를 보여줬다.
[전태국, 내가 너에게 내려주는 마지막 동아줄이야. 잡든 말든 그건 네 자유야.]
전태국은 잔뜩 심각해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그건 네 착각이야. 네가 미성년자인 거 애슐리 홈즈도 알잖아!”
“알죠. 물론….”
나는 말을 삼갔다.
“성국, 모두 널 좋아할 거란 거 말이야. 그거 순전히 네 착각이란 것을 밝혀주고야 말겠어!”
전태국은 괜히 심술을 부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성국, 내가 보기에 너 자꾸 전태국을 도발하는 것 같은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저 집안사람들 내가 잘 알거든.”
전태국은 아마 지금 당장 애슐리 홈즈에게 사람을 붙여서 뒷조사를 시작할 것이다.
물론 시작은 애슐리 홈즈가 나에게 진짜 관심이 있는지 알아볼 요량이겠지만, 끝은 복잡한 애슐리 홈즈의 사생활을 알게 될 게 뻔하다.
“근데 성국, 생각해보니까 나랑 미미 씨랑 한집에 사는 거 힘들지?”
“둘만 괜찮다면. 난 하나도 안 힘들어.”
[눈치는 둘이 보는 거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 * *
전태국은 양 비서에게 연락을 했다.
젊은 양 비서는 이제 일을 그만둔 후라, 젊은 양 비서의 아버지가 당분간 전태국의 일을 돌봤다.
곧 양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 도련님, 어쩐 일이세요?
“조사 하나만 좀 부탁드려요.”
- 뭐든지요.
“블러드테라피의 애슐리 홈즈라는 여자가 있는데요. 그 여자 사생활 좀 알아봐 주세요.”
- 알겠습니다.
양 비서는 역시 이유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이건 삼전 그룹의 불문율이었다.
로열패밀리가 시키면 하고, 이유는 묻지 않는다.
전태국은 성국과 마크의 말을 되새겼다.
만약 애슐리 홈즈가 자신을 유혹해서 투자를 유치하려고 한 것이라면 아주 끝까지 박살 내버릴 생각이었다.
‘감히 나, 삼전 그룹의 후계자 전태국을 가지고 놀아?’
* * *
저녁 7시.
나는 시간에 맞춰서 피자 가게로 나갔다.
애슐리 홈즈는 미리 나와서 하와이안 피자를 잔뜩 시켜놓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성국, 어서 와.”
“피자는 제가 사려고 했는데요.”
“남자가 항상 사란 법이 어디 있어.”
[당신한테 얻어먹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애슐리. 착각 좀 작작 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돈을 건네는 것도 어색했다.
나는 피자를 먹으면서 애슐리의 진짜 목적을 기다렸다.
애슐리는 피자는 먹는 내내 자신이 얼마나 블러드테라피에 열정을 쏟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나는 피자를 세 조각 먹고, 콜라를 소리 나게 들이켰다. 그리고 애슐리를 쳐다봤다.
“애슐리, 이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오늘 보자고 한 진짜 목적을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난 당신의 친절에 넘어가는 남자들이랑은 다르다고.]
나는 냅킨에 손을 닦았다.
그러자 애슐리는 이를 보이며 광고 모델처럼 웃었다.
“성국, 대체 존에게 그런 말을 해서 얻는 게 뭐야? 나한테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거야?”
“난 사기꾼한테 라이벌 의식을 느끼진 않아요, 애슐리.”
애슐리 홈즈의 파란 눈이 차갑게 변했다.
“애슐리, 날 이용해서 빌 게이트와 찰리 잡스를 잡으려는 거 다 알아요.”
“이제 필요 없어. 제리 창이 나에게 엄청난 투자를 했거든.”
제리 창은 야호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야호의 지분과 그동안 한 투자가 제법 성공적이어서 꽤 많은 자금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애슐리. 그럴 땐 나에게 투자했다고 하지 않고, 블러드테라피에 한 거라고 보통 말하죠.”
“그게 그거지.”
[그래? 그렇다면 블러드테라피가 망하면 너도 망하는 거겠지, 애슐리?]
와그작. 와그작.
나는 얼음을 다 깨물어 목으로 넘겼다.
때마침 피자 가게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에서 저녁 뉴스가 나왔다.
- GK 투자사의 존 칸이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존 칸이 블러드테라피의 창업자로 제2의 찰리 잡스로 불리는 애슐리 홈즈와 연인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애슐리 홈즈와 존 칸이 같은 집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들이 연이어 나왔다.
[역시 삼전의 정보력은 대단해…. 그렇다고 해도 이걸 이렇게 빨리 공개할 줄이야. 역시 전태국은 호구라니까.]
애슐리 홈즈는 순간 말을 잃고 뉴스를 바라봤다.
나는 애슐리 홈즈의 크고 파란 눈을 차갑게 쳐다봤다.
[애슐리,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사기를 치면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