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비행기 안에서 전태국은 곧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술을 마셔댔다.
“형, 10시간 후면 한국 도착인데. 이제 그만 마셔야 술 좀 깨지 않겠어요?”
“성국아, 나 어떡하지….”
“형, 그러게 3억은 좀 심했네요.”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 반지라고 했잖아!]
“성국아,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나 본데… 원래 사랑에 눈이 멀면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행동해.”
[애슐리 홈즈와의 관계는 사랑 아니라 욕정 아니었나….]
나는 깡생수를 들이켰다.
“형, 그래도 그런 말은 회장님에게 하지 마세요.”
“그럼 뭐라고 하지?”
“그 여자가 반지를 요구했고, 그렇게 해야지만 낯선 나라에서 온 우리에게도 투자 기회를 준다고 해서 그런 것이다. 뭐, 이런 거짓말 있잖아요.”
전태국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나를 바라봤다.
“성국, 혹시 너… 나에게도 각종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라고는 말 못 하지. 우선 네가 싫지만, 싫은 티도 안 내고 있잖아.]
“형, 어서 잠이나 자요.”
“마지막 순간까지 마실 거야. 안 그러면 정말 나 확 비행기에서 뛰어내릴지도 몰라.”
[그러지 않는다에 내 돈 만 원을 걸지.]
전태국은 다시 위스키를 들이켰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애슐리 홈즈에게 전태국이 3억을 썼다는 게 아니었다.
삼전 그룹의 이름이 황색 언론에 언급됐고, 심지어 그 반지를 준 사람이 삼전 그룹의 후계자인 전태국이라는 사실을 세상이 다 알게 됐단 것이었다.
* * *
전재형 회장은 양 비서가 조사해온 자료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내가 말한 대로 삼전이 언급된 거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챙겨온 거 맞지?”
“네, 회장님.”
양 비서는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전재형 회장의 심기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3억짜리 다이아몬드를 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사귀거나 만나는 여자에게 그 정도는 언제나 해줄 수 있었다. 전재형 회장은 더 많은 것을 준 여자들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문제는 애슐리 홈즈라는 사기꾼에게 3억짜리 다이아몬드를 준 것이었다.
황색 언론에서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인 전태국에 대해서 떠들어 댔다.
- 애슐리 홈즈는 기업에 투자를 받은 게 아니라 자신에게 투자를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기업 삼전 그룹의 후계자는 3억이 넘는 고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애슐리 홈즈에게 선물했다던데, 애슐리 홈즈는 인터뷰에서 그건 순전히 삼전 그룹 후계자의 호의였다고 밝혔습니다.
“호의?”
전재형 회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 삼전 그룹의 후계자 전 모 씨는 유타주의 대학을 다니다 중퇴. 기업 내에서는 이미 마이너스의 손으로 정평이 나있다.
거기다 전태국에 대한 평가도 덧붙였다.
사실이라 반박할 수도 없는 게 전재형 회장을 더 미치게 했다.
- 애슐리 홈즈는 나이 많은 남자인 존 칸을 발판으로 야호의 창업자 제리 창과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기업 삼전의 후계자까지 홀린 마성의 여자!
비록 사업은 실패했지만, 이미 출판업계에서는 그녀의 삶에 대한 자서전을 사들이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전재형은 구겨진 미간을 펴지도 못하고 양 비서를 쳐다봤다.
“애슐리 홈즈라는 여자가 출판할 가능성이 있나?”
“사실 지금 미국에서는 클린톤의 지퍼 게이트 이후 최고 이슈가 되는 사건이긴 합니다.”
전재형 회장은 구겨진 미간을 가운뎃손가락으로 폈다.
“양 비서, 그 여자 출판 같은 거나 인터뷰에서 절대 못 떠들게 할 방법 없나?”
“가짜 출판사를 내세워 자서전 내용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이양 받는 조건으로 거액의 계약을 한 뒤에 출판을 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거액의 돈 대신에 조항에 인터뷰 금지나 저희에게 유리한 여러 가지 조항을 넣으면 됩니다, 회장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회장님, 골치 아픈 일은 분명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국내 여론에는 크게 영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전재형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건 지금 말이지. 이제 세상은 곧 하나로 연결된다고. ‘페이스 노트’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가입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잖아.”
양 비서는 더는 말을 못 했다.
“태국이 언제 도착하지?”
“오후 4시 도착입니다. 바로 삼전 호텔 레스토랑 예약해 뒀습니다.”
“공항에서 어디 도망 못 가게 바로 데리고 오게.”
“네, 회장님.”
* * *
전태국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게이트 앞에는 삼전 그룹의 사람들이 쫙 깔려 있었다.
거기에는 양 비서도 있었다.
양 비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전태국을 맞이했다.
“도련님, 그간 잘 지내셨지요?”
“양 비서, 아버지가 시켜서 나 도망가지 못하게 데리러 나온 거 아니까 너무 친절하게 굴 필요 없어.”
“도련님, 그럼 바로 모실까요? 회장님께서는 삼전 호텔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태국이 나를 쳐다봤다.
“양 비서, 성국이 알지?”
“물론이죠.”
양 비서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양 비서는 살짝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양 비서 놀랄 필요 없어. 나 좀 멋있지?]
“성국 군도 정말 많이 성장했네요. 바지가 짧을 정도로요.”
[뭐?]
순간, 나를 바지를 내려다봤다.
몇 달 전에 산 바지가 어느새 또 짧아져 있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처했다.
“요즘 자고 일어나면 키가 커서요.”
“한창 클 나이죠. 성국 군 정말 그사이 더 멋져졌어요. 잘생긴 거야 여전하고요.”
[드디어 내가 듣고 싶던 말을 듣네. 양 비서 아저씨, 나야 늘 한결같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때, 전태국이 갑자기 내 팔을 손으로 꽉 잡았다.
“양 비서, 내가 성국이한테 오늘 저녁 같이 먹자고 했어.”
“도련님 하지만 아버님이….”
“아버지도 오랜만에 성국이 보고 싶을 거야. 삼전 호텔에서 기다리신다고?”
“네, 도련님.”
양 비서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전태국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양 비서. 나랑 성국이랑 같이 이동할게. 차 준비됐지?”
“도련님, 아버님께서는….”
“양 비서,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내가 성국이한테 약속을 했다니까. 아버지도 오랜만에 성국이 보면 좋아하실 거야.”
전태국은 내 팔을 꽉 잡고 끌었다.
“성국아, 가자.”
“네, 형.”
나는 얼른 대답했다.
어쨌든 거래는 거래였다.
* * *
삼실 호텔의 중식당으로 들어가자 지키고 있던 매니저가 황급히 가장 안쪽 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양 비서가 몇 걸음 앞서나가더니 먼저 룸 안으로 들어가 전재형 회장에게 이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곧 전태국은 아버지 전재형 회장이 기다리고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태국이예요.”
전재형 회장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얼른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전성국입니다.”
전재형 회장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룸 안에는 무거운 기류가 감돌았다.
전태국과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전재형 회장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 느낌이 불길한걸….]
물론 나야 얻을 게 있어서 전태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전재형 회장의 측근들만 알고 있는 게 있다.
전재형 회장은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곧 증명됐다.
전재형 회장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에 쥔 파일로 전태국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 아버지…. 왜 이러세요?”
전태국이 놀라서 전재형 회장을 올려다봤다.
“지금 성국이를 데리고 와서 위기를 극복해보겠다는 속셈이냐?”
“아, 아버지. 그게 아니라. 저 진짜 성국이에게 약속을 해서요.”
“그건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너에게 정말 많이 화가 났단 사실이야.”
전태국은 곧 의자에서 일어나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전재형 회장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버지. 그 반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애슐리 홈즈 환심을 사려고 산 거예요. 3억 별거 아니잖아요. 아버지, 예전에 여배우들한테 더 큰 것도 해주셨잖아요.”
이 말은 전재형 회장의 심기를 더 건드릴 뿐이었다.
전재형 회장은 그대로 전태국의 뺨을 날렸다.
찰싹!
그 소리가 너무 찰져서 나는 깜짝 놀라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전태국은 붉어진 뺨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전재형 회장은 얼른 손을 풀더니 얼음물을 마셨다.
“너의 그 알량하기 그지없는 환심을 사려는 행동 때문에 지금 삼전 그룹의 이름이 미국의 옐로우 페이퍼에 얼마나 등장하는 줄 알아?!”
“아버지, 저는 정말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요.”
“당연히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지. 도대체 너는 머리를 어디에 달고 다니는 거야! 그 여자가 만약 재판 도중에 돈 받고 인터뷰를 하거나, 책을 내면 삼전 그룹과 후계자인 너의 이미지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아버지… 그런 언론은 미국 사람들도 잘 안 믿어요.”
퍽!
전재형 회장은 그동안 조사한 자료로 다시 한번 전태국의 머리를 때렸다.
“너 때문에 할아버지와 내가 힘들게 버텨온 회사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추락했어!”
“아버지, 대한민국에서 삼전이 추락하면 나라도 망하는 거잖아요.”
전태국은 여전히 능글맞게 굴었다.
전재형 회장은 더는 답을 하지 않고,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숨을 거칠게 내쉬며 옷깃을 매만졌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장 다녀와서 보자. 그리고 성국아….”
“네, 회장님.”
“여기서 본 거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마. 너도 얻은 게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회장님.”
“성국아, 아직도 짜장면 좋아하지?”
“네, 회장님.”
“그럼, 먹고 가렴.”
“네, 회장님.”
나는 전재형 회장의 질문에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틈을 주기 싫어서였다.
드륵- 문이 닫히고 전태국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긴 한숨을 뱉었다.
“후우…. 성국아, 그래도 너 덕분에 오늘 좀 덜 맞은 거 같아. 안 그랬으면 나 갈비뼈 몇 개 나갔을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재형 회장의 성격은 나도 익히 알았다.
만약 내가 없었더라면 전태국은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로 맞았을 것이다.
물론 나는 저번 생에서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항상 최고의 성적과 실적을 전재형 회장에게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전태국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양 비서에게 지시했다.
“양 비서, 음식 가지고 오라 해요.”
“네, 도련님.”
전태국의 지시에 따라서 곧 중화요리가 들어왔다.
전태국은 태연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성국아, 너도 먹어.”
“네, 형.”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삼전 호텔의 짜장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전태국은 물끄러미 나를 보다 숟가락을 놓았다.
“성국아, 나 또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뭐야, 전태국. 왜 이렇게 부탁이 자꾸 늘어?]
전태국은 간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나 오늘 하루만 재워주면 안 돼?”
“형… 아버지랑 미팅도 끝났잖아요. 근데, 왜요?”
“성국아, 네가 우리 아버지를 몰라서 하는 말인데. 분명 지금은 네가 함께하는 자리라 살살하신 거야. 만약 내가 혼자 있게 됐단 소식을 들으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때리든 추궁하든 하실 거야. 성국아, 제발 나 좀 살려줘라.”
나는 짜장면을 마저 후루룩 마셨다.
[지금 전태국을 구해주면 나에게 생기는 이득이 뭐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전태국이 폭탄 발언을 했다.
“성국아, 이번 부탁 들어주면 내가 삼전 호텔 짜장면 기다림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평생 무료 이용권 줄게.”
[내가 고작 먹을 거에 약해지는 사람이… 맞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 우리 집으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