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전태국과 내가 탄 차가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성국아, 아버지랑 어머니 뭐 좋아하시니?”
“부모님들 소박하세요.”
“흠… 그럼, 우리 소박하게 쇼핑 좀 해야겠네.”
곧 VVIP 주차장에 차가 도착하자, 미리 도착하고 있던 백화점 관계자가 얼른 문을 열었다.
“도련님, 양 비서님 연락받았습니다.”
“음… 룸에서 기다릴 테니까, 쇼핑할 물품들 가지고 와.”
“네, 도련님.”
나는 전태국의 뒤를 따랐다.
저번 생에서는 내가 하던 짓을 전태국이 그대로 하고 있었다.
사실 저번 생에서는 백화점도 잘 가지 않았다.
철마다 보내오는 명품 브랜드의 카탈로그를 보면서 나는 그저 체크만 하면 됐다.
거울 앞에 서서 내게 이 상품이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보는 것은 서민들이나 하는 짓이다.
마음에 들면 우선 사고 보면 되는 게 재벌의 삶이었다.
전태국은 익숙하게 백화점 VVIP 공간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곧 샴페인과 핑거 푸드가 마련됐다.
“성국아, 너도 옷 좀 몇 벌 골라. 실리콘밸리에서는 후드 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되지만, 한국 겨울은 춥잖아.”
“형, 그럼 패딩 하나만 사주세요.”
“그냥 여러 개 골라.”
전태국은 언제 아버지에게 맞았냐는 듯이 거만하게 백화점 카탈로그를 보더니 이것저것 골랐다.
그 순간,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형… 근데요….”
“뭐 궁금한 거 있어? VVIP 매장은 처음이라 모르는 거 많지? 편하게 물어봐.”
“그게 아니라요. 저희 집에 얼마나 머무르실 거예요?”
[지금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거의 눌러앉을 분위기인데?]
전태국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성국아, 나 전태국이야.”
[뭐지, 저건 내가 속으로 많이 하는 말인데….]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게 삼전 호텔이잖아. 너희 집에서 딱 하루만 신세 지다가 아버지 출장 가시면 내일 바로 삼전 호텔로 갈 거야. 걱정은 하지도 마.”
“아, 네….”
[근데 왜 이렇게 믿음이 안 가지.]
이때, 백화점 담당자가 전태국이 주문한 물건을 바리바리 들고 들어왔다.
“도련님, 주문하신 투뿔 한우와 전복. 그리고 발렌타인스 30년산입니다. 그리고 구스 이불 세트로 여섯 세트 챙겼습니다.”
“흠… 더 필요한 게 없으려나….”
“형, 근데 구스 이불은 왜 여섯 세트나 사셨어요?”
“나 잠자리에 예민한 편이잖아. 내 거 한 채 필요한데, 나만 구스 이불 쓸 수 있나. 너희 가족들 것도 샀어.”
“아하….”
전태국은 카탈로그를 보더니 몇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프리다 패딩, 이걸 색깔별로 가지고 오고… 아동복 라인에서 제일 잘 나가는 거 뭐야?”
“프리다 아동복 라인도 있습니다.”
“그럼, 거기에서 이제 13살 되는 남자애랑 8살 된 여자애 것 중 제일 잘나가는 제품으로 옷이랑 가방이랑 해서 가지고 와.”
“네, 도련님.”
담당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형, 너무 사는 거 아니에요?”
“성국아, 이 정도는 내 통장에 매일매일 찍히는 하루 이자도 안 돼.”
[그건 나도 잘 알지. 그냥 예의상 해본 말이었어. 애슐리 홈즈에게 사준 다이아몬드 반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잠시 후, 담당자가 돌아왔다.
“도련님, 사신 물품 모두 차로 이동 중입니다.”
전태국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국아, 가자.”
“네, 형.”
* * *
띵동.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현관 너머로 다다다다 뛰어오는 두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민국이랑 지희군…. 나 온다고 다들 기뻐서 뛰어오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곧 문이 달칵- 열리면서 아빠가 얼굴을 내밀었다.
“성국아, 어서 와. 태국 군도 어서 와요.”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형아!”
민국이 녀석이 반가움에 나를 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형이 그렇게 좋은지….]
휭-
[지금 뭐가 지나갔는데….]
민국이는 나를 지나쳐 태국이에게 벌컥 안겼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태국이 형, 선물 너무 마음에 들어요.”
“벌써 풀어본 거야?”
“네!”
뒤늦게 지희도 달려오더니 나를 휙 지나쳐 태국이 앞에 가서 인사를 꾸벅했다.
“오빠! 지희도 선물 감사합니다!”
나는 나를 지나쳐간 민국이와 지희를 멍하니 쳐다봤다.
[하아… 역시 대한민국은 돈이야.]
나는 씁쓸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누군가 내 손을 꼭 잡았다.
한 명은 오른손을.
또 한 명을 왼손을 잡았다.
“형아!”
“오빠!”
[이것들아, 이제야 나 본 거야?]
지희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 지희가 오빠 오려면 물어보려고 모르는 문제 백 개 모아뒀어.”
“지희야, 오빠 많이 보고 싶었어?”
“오빠, 당연한 걸 왜 물어봐.”
이때, 민국이가 다른 한 손을 잡아끌었다.
“형아, 정말 가족끼리 쑥스럽게 왜 이래. 어서 들어가.”
“아, 알았어.”
* * *
전태국은 내 방을 쭉 훑더니 침대를 가리켰다.
“성국아, 내가 손님이니까 침대 쓸게.”
“보통 손님들은 주인이 정해준 곳에서 자지 않나요?”
“내가 잠자리에 좀 예민하잖아. 어릴 적부터 침대 생활해서 난 바닥에서는 잠을 못 자.”
“형이 침대 쓰세요.”
전태국은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왜 저를 보세요, 형?”
“이불 바꿔줘야지. 내가 사 온 구스 이불로.”
“형, 전 형의 비서가 아니고. 형은 오늘 밤 저희 집에 신세를 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불 정도는 알아서 바꾸세요.”
“흠… 아까 네 짜장면이 평생 무료였잖아. 이번엔 너희 집 식구들까지 평생 무료 어때?”
[가족이 걸린 일은 내가 또… 못 참지!]
“형, 역시 이불은 구스죠!”
나는 얼른 잽싸게 이불을 교체했다.
그리고 바닥에 내 이불도 깔았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민국이가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 아래로는 지희도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둘 다 안 자고 뭐 해?”
“형…. 오랜만에 형이랑 자면 안 돼?”
“오빠. 지희두.”
“자, 민국이는 왼쪽. 지희는 오른쪽에 눕는다! 실시!”
“실시!”
지희와 민국이는 동시에 와다다다 달려와서 내 양옆에 누웠다.
전태국은 침대에 누워서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참, 오빠. 지희가 물어보려는 문제 지금 물어봐도 돼?”
“공부하고 자게?”
“응!”
[역시 지희는 공부 쪽으로 나가야겠어.]
곧 지희는 방에서 문제집을 들고 들어왔다.
우리는 모두 이불 위에 엎드려서 지희가 가져온 문제집을 펼쳤다.
[벌써 6학년 수학이라니…. 역시 너는 내 동생이야.]
이때, 옆에서 민국이가 종알거렸다.
“전지희, 맨날 잘난 척하느라 어려운 거 푸니까 다 틀리는 거야. 네 수준에 맞는 것을 풀어.”
“민국아, 너 이번에 겨우 전교 2등 했다며? 도대체 전교 1등을 왜 못하는 거야? 하기 싫은 거야?”
“형! 전교 2등도 엄청 잘한 거잖아! 치이.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민국이는 옆으로 등을 돌리고 누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희가 가져온 문제들을 살폈다.
“지희야, 우리 지희. 도형이 좀 약하구나.”
“오빠. 도형 어려워.”
“너한테는 당연히 어려운 거야. 와, 그래도 도형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 빼고 다 풀었네.”
“오빠, 지희 칭찬해줘.”
나는 지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민국이는 삐친 말투로 어느새 문제집을 보고 있었다.
“전지희, 이 바보야. 이거 3번이잖아. 이것도 모르냐?”
“전민국. 너는 이제 6학년이니까 알지만 지희는 이제 초등학교 들어가잖아.”
“치이, 형은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이때, 등 뒤로 뭔가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위를 쳐다보자 전태국이 부러운 듯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 안 자요?”
“성국아….”
“왜요?”
“나랑 자리 바꾸자.”
“네에? 형, 바닥에서 못 잔다면서요.”
“서민 집에 왔는데, 서민 체험 한번 해보지, 뭐.”
전태국은 어느새 베개를 안고는 바닥에 내려왔다.
그때, 민국이가 내 등위에 포개졌다.
“형아, 나랑 같이 자. 어디도 못 가.”
지희도 민국이 위로 올라갔다.
“오빠, 절대 못 보내.”
[이것들아. 날 좋아하는 것 알겠는데, 숨을 못 쉬겠잖아!]
나는 미안한 척 전태국을 올려다봤다.
“형, 미안해요. 형이 침대에서 자야겠어요.”
“무슨 소리야. 자리가 이렇게 넓은데….”
전태국은 어느새 민국이 옆자리에 끼어들더니 능청맞게 이야기했다.
“서민들은 이런 데서 자는구나. 얘들아, 성국이 오늘 엄청 피곤해. 다들 불 끄고 일찍 자면 형이 내일 짜장면 사줄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민국이는 벌떡 일어나서 방의 불을 꺼버렸다.
“형아, 어서 자자.”
“오빠, 잘 자.”
곧 새근새근 잠든 지희의 숨소리.
그리고 오랜만에 민국이가 발길질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전태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들었나?]
그때였다.
전태국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국아, 자?”
“…….”
나는 일부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성국아… 나도 이런 평범한 집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형….”
나는 어둠 속에서 무겁게 입을 뗐다.
“안 잔 거야?”
“형. 재벌로 태어난 걸 다행으로 아세요.”
[할 말 많지만, 뒷말은 생략할게.]
“전성국…. 하아….”
전태국은 내 이름을 부르고는 깊게 한숨을 뱉었다.
“왜요, 형?”
“너 정말 재수 없어.”
“사람들은 꼭 진실을 말하면 재수 없다고 하더라고.”
그 순간, 어디선가 베개가 날아와 내 얼굴을 덮쳤다.
“잠이나 자라.”
“…….”
나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전태국은 거실에 앉아서 TV를 켰다.
“성국아, 나 커피 한 잔만.”
“형, 커피는 직접 좀 타 먹죠?”
“성국아, 집에 오신 손님인데. 내가 타 줄게.”
엄마가 나를 말렸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소파에 널브러진 전태국을 쳐다봤다.
“태국이 형, 언제 삼전 호텔로 갈 거예요?”
전태국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체크인 시간 아니잖아.”
“형네 호텔인데, 형이 그런 거 따지고 호텔 가지는 않잖아요.”
[전태국, 나도 다 해본 일이라 안다고!]
“아버지가 저녁 늦게 출국하셔. 그때까지만 좀 있자.”
전태국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TV를 켰다.
마침 TV에서는 애슐리 홈즈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정식 뉴스라기보다는 가십에 가까운 뉴스였다.
-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름은 애슐리 홈즈.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미인이죠.
[한국에도 벌써 뉴스가 나오네….]
애슐리 홈즈 소식에 가장 예민한 것은 전태국이었다.
전태국은 좀 놀란 얼굴로 뉴스를 응시했다.
- 애슐리 홈즈는 야호의 창업자 제리 창의 투자를 받고, 동시에 대한민국 모 그룹의 후계자로부터 3억 원 상당의 다이아몬드를 받는 등 마성의 여자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방금 집을 나선 그녀가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밝혔습니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는 따로 있다고요.
전태국은 얼른 고개를 들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애슐리 홈즈, 당신이 진짜 사랑한 남자는 누굽니까?
- 만약 그 사람이 제 마음만 받아줬다면, 전 아마도 다이아몬드 반지 따위는 받지도 않았을 거예요.
- 애슐리, 당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그 남자가 누굽니까?
- ‘페이스 노트’의 창업자 전성국이요. 진짜 천재들끼리만 통하는 언어가 있었다고나 할까요.
- 전성국 군이라면 미성년자 아닌가요?
- 제가 말했잖아요. 우리는 이뤄질 수 없는 관계였다고요. 그리고 정말 우리는 플라토닉한 사이였어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성국은 정말 마성의 남자예요.
[이게 대체 뭔 소리야!]
동시에 가족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애슐리 홈즈의 인터뷰 자막을 읽은 지희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오빠, 마성의 남자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