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가게는 들어서자 익숙한 아빠 보쌈 냄새가 났다.
사이사이 앉은 손님들은 나를 보더니 신기하게 쳐다봤다.
[내가 대한민국에서도 이렇게 유명했나?]
어릴 적에야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로 유명했지만, 그 이후에는 사회면에 가끔 날 뿐이었다.
[앗, 애슐리 홈즈가 마성의 남자라고 해서 한국 방송에도 좀 나오고 있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앞으로 쏟아지는 앞머리를 자연스레 뒤로 넘겼다.
이때, 소주 한잔 걸친 손님 한 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반가운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니… 여기서 이렇게 유명한 분을 뵙다니….”
[내가 좀 유명하지.]
내게 다가오는 분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휭-
이건 뭐지?
어제 나를 스쳐 지나간 민국이와 지희보다 더 빨리 나를 지나쳐간 손님은 전태국의 손을 꼭 붙들었다.
“삼전 그룹 회장 아드님 맞으시죠?”
“하하, 맞습니다. 제가 삼전 그룹 외아들 전태국입니다. 잘 보셨습니다.”
전태국은 평소와 달리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전태국과 주변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민국이가 허공에 뜬 내 손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형아, 나만 봤어. 어서 손 내려.”
“형아는… 그냥 태국이 형을 손으로 가리키려고 한 거였어….”
변명은 궁색했다.
“형, 말할수록 망하는 것 같아.”
민국이에게도 들켰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사람들은 전태국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모두 삼전 그룹에 대해서 거의 찬양 일색으로 떠들었다.
“저희 아들이 삼전 전자 다닙니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도 바로 해서, 저희 집안에 정말 많은 힘이 되고 있어요.”
“그러시군요.”
전태국은 맞잡은 손을 도닥이며 평소와 달리 인자한 미소까지 지었다.
“저는 삼전 전자에서 생산직으로 30년 일했어요. 그사이 아들, 딸 시집, 장가도 다 보냈습니다. 이게 다 삼전 덕분이에요. 와, 이런 귀한 분을 직접 뵙다니, 영광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삼전 그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돈의 팔촌쯤 건너면 삼전 그룹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도 한 명쯤은 다 있었다.
그만큼 삼전 그룹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삼전 그룹은 똑똑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만든 기업일지도.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번 생에서 내가 어딜 가든 사람들이 지금 전태국에게 하듯이 악수를 청하고, 삼전 덕분에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말했다.
이젠 그것도 모두 전태국의 몫이 됐다.
“근데, 이 집이 재벌도 올만큼 맛집인 건가.”
어디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자, 전태국이 소리쳤다.
“분명한 건 제 기준에서는 이 집 보쌈이 삼전 호텔 한식당보다 맛있습니다.”
* * *
나와 민국이는 테이블에 앉아서 물끄러미 전태국을 바라봤다.
전태국은 가게 안의 사람들과 모두 악수를 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아빠가 곧 보쌈을 들고나왔다.
“태국 군, 고마워요. 덕분에 가게 홍보 엄청 될 거 같아요.”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러세요.”
“오늘 보쌈 실컷 먹어요. 내가 내는 거예요.”
“삼전 그룹 아들이 당연히 돈 내고 먹어야죠, 아저씨. 마음만 받을게요.”
전태국의 어깨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형… 근데, 아까 한 말 괜찮겠어요?”
“여기가 삼전 호텔 한식당보다 맛있다는 말?”
“네.”
“사실이기도 하고. 누가 들었겠어.”
전태국은 어느새 보쌈을 흡입하고 있었다.
이때, 전태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태국 군, 왜 그래요?”
“아저씨, 평소랑 맛이 비슷한데.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른데요. 근데 오늘도 맛있긴 한데요. 뭐가 다른 거죠?”
“와, 역시 태국 군 예리하네요.”
나는 보쌈을 먹다가 멈칫했다.
[나도 저번 생에서는 재벌이었다고… 전 세계 미슐랭 레스토랑을 섭렵한 입맛인데…. 뭐가 차이 난단 말이야?]
하지만 돌이켜보니 재벌이던 저번 생도 벌써 15년이 훌쩍 지나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저번 생의 재벌 전성국의 감각도 서서히 잊혀 가는 건가….
나는 조금 쓸쓸한 생각에 아빠의 보쌈을 한 점 더 입에 넣었다.
“흠….”
그리고 혀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보쌈을 음미했지만, 나는 전혀 차이를 느낄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너무 정크푸드만 먹어댔어….]
그때, 아빠가 배시시 웃으며 내 어깨를 도닥였다.
“성국아, 실망할 필요 없어. 레시피는 똑같은데, 오늘 만든 사람만 다르거든. 아무래도 그러니까 조금 맛 차이가 나는 것 같아.”
“아빠, 오늘은 누가 만들었는데?”
“수현이 형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지.”
아빠는 주방에 대고 소리쳤다.
“수현아, 손님들 드릴 보쌈 다 됐어?”
“네, 사장님!”
“성국아, 수현이 형한테 가서 일 좀 도와줘. 수현이 형이 우리 프랜차이즈 1호점 총주방장으로 갈 거야. 그래서 오늘 시식하려고.”
“아빠, 우리가 1호점 아니야? 본점은 수유점이잖아.”
“수유점 사장님이 건강이 안 좋으셔서 은퇴하시거든. 그래서 우리가 본점이 됐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한국을 떠난 사이 <원아저씨 보쌈>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유점 사장님이 그동안 건강 때문에 고민 많으셨는데, <원아저씨 보쌈> 지분 받으면서 좀 쉬셨으면 해서 아빠가 적극 권했어. 이번 설에 인사드리러 같이 가자.”
“응!”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전수현은 아빠의 보육원 후배였다.
나와 아빠가 보육원을 찾은 그날, 아빠처럼 요리를 하고 싶다고 하더니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아빠의 보쌈 가게에 찾아와서 일을 배웠다.
나는 얼른 주방 안을 들여다봤다.
“형, 제가 뭐 도와드리면 돼요?”
“미국에서 와서 피곤할 텐데, 가서 앉아 있어. 나랑 여기 알바 동생이랑 할게.”
그때, 알바 동생이 수현이 형의 옆구리를 웃으면서 찔렀다.
“에이, 형. 지금 평가 걱정돼서 손 덜덜 떨고 있잖아요. 어떻게 쟁반 날라요.”
자세히 보니 수현이 형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형, 저 안 피곤하니까 걱정 말고 뭐든 시키세요.”
“그럼… 성국아, 이거 손님들 테이블마다 하나씩 놔드리면 돼. 참, 돈은 안 받는 거고, 솔직하게 맛 평가만 해달라고 부탁드려줘.”
“네!”
나는 팔뚝을 걷어 올리고 쟁반 가득 시식 보쌈을 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시식용 보쌈을 놓으면서 수현이 형이 전한 말을 그대로 했다.
“시식용 보쌈이에요. 저희 아버지 도와서 같이 일한 주방장 형이 오늘 한 거예요. 드셔보시고 솔직한 평가 부탁드릴게요.”
“어, 좋지! 공짜 맞지?”
“네!”
곧 여기저기서 시식평이 들렸다.
“전 사장, 솔직히 말해. 그동안 주방에서 일 안 하고 놀면서 이 친구 다 시킨 거지?”
“그렇게 똑같아요?”
“이걸 어떻게 구별해.”
테이블마다 아빠의 보쌈과 구별하기 힘들다는 평이 연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먹어 그런가. 살짝 다르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다른 평가를 하는 손님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빠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다른데요?”
아빠의 질문에 손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정말 잘 모르겠어.”
“손님, 맛이 평소보다 없나요?”
“둘 다 맛있어. 난 오히려 갓 나온 게 뜨뜻하니 맛나네.”
손님의 말에 가게 안은 웃음이 터졌다.
나는 얼른 주방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수현이 형에게 다가갔다.
“형, 반응 완전 좋아요.”
뒤이어 같이 서빙을 하던 알바생도 와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형, 내가 맛있다고 했잖아요. 이제 긴장 좀 풀어요.”
이때, 아빠가 홀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아, 나와서 손님들한테 인사드려!”
수현이 형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나는 얼른 수현이 형의 손을 잡아끌었다.
“형, 어서요!”
“어. 어….”
수현이 형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가서 손님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친구가 저 도와서 그동안 같이 가게 키워왔어요. 정말 여기서 하나부터 열까지 착실히 배워서 저희 <원아저씨 보쌈> 1호점인 강남점에서 총주방장으로 일하니까, 강남 지나실 때 한 번씩 들려주세요. 저도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계속 맛 점검할 거예요.”
“아이구, 우리 전 사장 성공했네! 체인점도 다 내고. 다들 박수 한 번 쳐줍시다!”
한 손님이 박수를 치자 가게 안 손님들 모두가 따라서 박수를 쳤다.
수현이 형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연신 인사를 했다.
* * *
영업이 끝난 가게에 우리 테이블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빠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서 수현이 형에게 한 잔 따라줬다.
“수현아, 일 배우느라 그동안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사장님 덕분에 빨리 자리도 잡았잖아요.”
“다 네가 열심히 해서 그런 거지. 오늘은 한잔하고… 내일부터 설 연휴 시작이니까, 푹 쉬어.”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수현이 형은 아빠의 잔을 받았다.
옆에서 전태국이 입맛을 다셨다.
“아저씨, 제가 원래 와인이나 위스키만 먹는데. 오늘은 소주가 땡기네요.”
“우리 삼전 그룹 아드님께도 한 잔 드려야죠. 받으세요.”
아빠는 전태국에게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 나는 정말 입맛만 다셨다.
수현이 형은 소주를 몇 잔 마시더니 눈가가 촉촉해졌다.
[잠깐만! 이거 우리 아빠 사연팔이 할 때 보던 그 모습인데…]
“사장님, 정말 제가 얼마나 감사드려야 할 지 모르겠어요.”
“수현아, 네가 다 열심히 해서 그러지. 강남점 우리 1호 체인점이니까. 네가 진짜 잘해야 해. 손님들 실망하지 않게.”
“네! 진짜 뼈가 부서져라 열심히 할게요.”
“그렇게는 말고. 몸 사리면서 일해. 나도 젊어서 고되게 일했더니, 30대 되니까 안 아픈 데가 없어.”
그 말에 괜히 또 아빠가 짠해 보였다.
“사장님, 정말 저… 열심히 일해서 사장님처럼 좋은 아내 만나서 성국이랑 민국이랑 지희 같은 이쁜 애들 낳고 싶어요.”
[수현이 형, 미안한데. 나 같은 애는 못 낳을 거야.]
나는 보쌈을 우걱우걱 먹었다.
“그래… 수현아, 강남점 자리 잡으면 너도 연애도 하고 그래.”
[뭐야, 수현이 형도 모쏠이었어?]
“저같이 부모도 없고, 그런 사람 누가 좋아하나요.”
“뭔 소리야. 나도 결혼해서 우리 성국이도 낳았는데.”
“사장님은 잘생기셨잖아요.”
사연팔이는 어느새 서로에게 덕담을 해대는 훈훈한 술자리로 바뀌고 있었다.
홀짝홀짝 술을 마시던 전태국도 흥에 겨워 끼어들었다.
“전 부모도 있고, 돈도 많은데. 아직도 모쏠이에요.”
“진짜요? 재벌도 모쏠이에요?”
수현이 형이 놀라 되물었다.
“성국이네 아저씨는 잘생겼잖아. 성국이가 뭐 하늘에서 떨어졌나. 다 아저씨랑 아줌마 닮은 거지. 그리고 주방장도 그 정도면 준수해요.”
“태국 군은 집에서 막 여자 정해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저씨, 저도 그러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건 결혼 적령기나 돼야 하는 일이고요. 지금은 그냥 방임이에요. 아저씨, 이런 느낌 아세요? 아주 넓은 목장에 최고급 풀을 심고 가꿔놨는데… 제 울타리 안에는 저만 있어요. 아무도 울타리를 넘어올 생각을 하지 않아요.”
전태국의 넋두리에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웃음을 참았다.
아빠는 어느새 나를 쳐다봤다. 아빠도 살짝 술이 오른 상태였다.
“성국아, 아침에 그 여자 있잖아.”
“아빠, 걱정 마. 그 여자 그냥 어떻게든 위기 탈출하려고 그러는 거야.”
“성국아, 아빠는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는 네 나이에도 또래끼리 많이 만나고 그런다며? 성국아, 아빠는 네가 공부하고 일하느라 그 나이에 겪어야 할 것을 다 놓쳐버리는 게 아까워서 그래. 아빠는 네가 그 좋은 시간을 다 누렸으면 좋겠어. 하나도 빠짐없이….”
아빠는 소주잔을 마저 비웠다.
“성국아, 아빠가 그동안 너한테 잔소리도 많이 하고… 그런 게 다 그런 거야. 아빠는 너무 힘들게 자라서 남들 다 엄마, 아빠랑 보낼 시간에도 외로웠고. 앞으로 어떻게 사나 매번 걱정하느라 그 나이 때 제대로 누려본 게 하나도 없었어. 그런데 네가 공부만 하고. 일만 하고 그러니까, 아빠가 다 아까워서 그랬어. 아빠 맘, 알지?”
사실은 잘 몰랐다.
아빠가 고지식한 사람이라 그런 줄만 알았다.
아빠는 뺨을 손으로 탁탁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취했나 보다. 성국아, 아빠랑 민국이랑 들어가자. 여기 두 사람은 술 더 마시라고 하고. 수현아, 가게 단속 잘하고 가야 해.”
“네, 사장님! 연휴 잘 보내세요.”
“설날에 떡국 먹으러 와야지!”
“네에!”
“아저씨, 저도 가요!”
전태국도 따라 대답했다.
평소 같으면 집에 안 가냐고 물었겠지만, 오늘은 그냥 조용히 가게를 나섰다.
오늘은 아빠의 진심을 안 날이니까, 조금은 너그러워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