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드르렁. 드르렁. 드르렁.
코고는 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전태국은 벌써 삼일 째 우리 집에서 자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설날이다.
하루만, 하루만 하던 게 설날까지 오고 말았다.
나는 전태국을 슬쩍 옆으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저번 생의 동생이었던 놈이 어디까지 빌붙는 건지.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아빠가 빼꼼 고개를 밀어 넣었다.
“성국아, 아침인데 일어나서 떡국 먹게 준비해.”
“응. 아빠!”
떡국 소리에 전태국은 귀신같이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 전 떡국 곱빼기요.”
그러더니 다시 잽싸게 누웠다.
“형, 식탁에 앉으려면 세수부터 해야죠.”
“성국아, 넌 아무리 봐도 우리 엄마랑 너무 비슷해. 잔소리 많은 게 꼭 우리 엄마 같잖아. 세수해라. 밥상에서 쩝쩝거리지 말아라. 다리 떨지 마라. 하아… 도대체 왜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형, 그건 잔소리가 아니라 기본 예의잖아요.”
“그것도 내가 투덜거리면 우리 엄마가 맨날 하는 말이야.”
전태국은 그대로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다.
나는 전태국을 뒤로 하고 일어났다.
[철의 여인에게 배운 습성은 아직 남은 모양이네….]
식탁 자리에서 철의 여인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나와 전태국, 그리고 전미진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했다.
물론 난 거의 지적받지 않았지만, 전태국과 전미진은 매일 지적을 받았다.
“근데 형, 오늘 설날이에요. 집에 안 가요?”
“엄마가 나보고 매국노래. 어떻게 이름도 없는 보쌈집 보쌈이 삼전 호텔 한식당보다 맛있다고 할 수 있냐며 아주 대노하셨어. 아버지 피하니 어머니가 오고…. 성국아, 나 좀 며칠 더 여기 머물면 안 될까?”
“형, 삼전 호텔 있잖아요.”
“기사에 오너도 디스한 삼전 호텔 식당 수준이라는 기레기가 쓴 기사까지 나와서 삼전 호텔 직원들이 연초부터 완전 비상 걸렸거든. 나 거기 갔다가는 완전 역적 수준일 거야.”
[쯧쯧. 입이 방정이지.]
아빠 보쌈을 극찬해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필 그 자리에 이름도 낯선 인터넷 신문 기자가 한 명 있었다.
덕분에 그날 밤부터 시작해서 삽시간에 전태국에 대한 기사가 인터넷에 떠돌았다.
- 삼전 그룹 후계자의 소박한 식성. <원아저씨 보쌈>에 방문한 삼전 그룹 후계자 전 모 군은 삼전 호텔 한식당보다 맛있다며 극찬을 했다.
내용은 이랬지만, 이 기사를 보고 기레기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 삼전 호텔 디스한 삼전 그룹 후계자.
- 오너도 안 먹는 삼전 호텔 한식당 수준.
취재도 안 하고, 남의 기사 베껴서 클릭 수 올리려는 기레기들의 기사가 연이어 쏟아졌다.
물론 삼전 그룹에서 위기를 인식하고 막긴 했지만, 다음 날이 설 연휴 시작에다가 이미 인터넷에 복사돼서 떠도는 상황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형, 친구는 없어요? 재벌 친구들 많잖아요. 호텔이 삼전 호텔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나도 저번 생에서 친한 친구들은 죄다 나와 비슷한 부류였다.
재벌이거나 혹은 권력이 있거나.
“친구라고 할 수 있나. 뭐, 내가 부탁하면 스위트룸이야 내주겠지. 근데 성국아….”
“네?”
“나, 너희 집 음식이 너무 입에 맞아. 우리 호텔 조식 부럽지 않아.”
“형, 우리 집에 애만 셋이에요. 여기에 숟가락 하나 더 얻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세요?”
“성국아, 대한민국에서 삼전 그룹 재벌을 이렇게 하대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이때, 밖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만 대화하고 나와서 밥 먹어!”
“네, 아저씨!”
전태국은 이불도 개지 않고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 * *
설날이라고 수현이 형까지 찾아와서 식탁은 평소보다 더 북적였다.
“성국아, 떡국 날라.”
“응!”
나는 엄마가 끓인 떡국을 나르기 시작했다.
“이건 태국이 거. 곱빼기야.”
[정말 남의 집에 와서 오만가지 하네. 오늘 설날이라 내가 참는다, 진짜.]
나는 전태국을 쏘아보며 떡국을 건넸다.
전태국은 태연하게 엄마에게 인사까지 했다.
“어머님,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요. 수현아, 너도 많이 먹어.”
“네, 사모님.”
전태국은 허겁지겁 떡국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희가 떡국을 물끄러미 보더니 나를 쳐다봤다.
“오빠, 떡국 먹으면 진짜 한 살 더 먹는 거야?”
“응. 왜 지희야?”
“난 나이 먹기 싫어.”
내가 여덟 살 때는 어서 커서 돈 벌 생각뿐이었는데, 지희는 남달랐다.
[역시 머리 좋은 애들은 생각도 다른 건가.]
나는 은근히 물어봤다.
“지희야, 왜 나이 먹기 싫어?”
“엄마, 아빠가 나이 먹잖아.”
순간, 모두들 숨을 죽였다.
엄마, 아빠는 감동 어린 눈으로 지희를 바라봤다.
“그리고… 큰오빠도 나이를 먹잖아. 난 큰오빠가 나이 먹는 거 싫어. 언제나 지희랑 놀아줬으면 좋겠어.”
[이 녀석, 오빠가 늙는 것도 싫구나.]
나는 또 심장이 울컥했다.
도대체 여동생은 어쩜 이리 귀여울까.
태국이가 긴 한숨을 쉬었다.
“성국이는 참 복 받았어. 저런 여동생까지 두고…. 내 여동생은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부럽다. 부러워.”
“형님, 전 고아예요. 그런 여동생이라도 있는 형님이 부러운걸요.”
수현이의 말에 또다시 모두 숨을 죽였다.
드디어 아빠를 위협하는 사연팔이 강적이 나타났다!
“수현아, 우리가 가족이잖아. 설날부터 다들 그러지 말고, 어서 떡국 먹자.”
[아빠가 사연팔이들을 수습을 하다니… 이것도 볼만하네.]
왠지 오늘따라 떡국이 달았다.
이때, 태국이가 지희를 쳐다봤다.
“지희야, 오빠가 나이 안 먹는 방법 알려줄까?”
“그게 뭔데요?”
“동심의 나라에 가면 되지.”
[전태국 네가 놀고 싶으니까, 애들 꼬드기는 거잖아.]
나는 전태국의 수법이 너무 보여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심의 나라? 그게 어딘데요?”
“용인에 있는 네버랜드지! 지희야, 거기 가면 지희 나이 안 먹는 거야. 오빠랑 갈래?”
“형! 민국이도요!”
“진짜 내가 인심 썼다. 민국이도 가자.”
수현이 형이 부러운 눈길로 전태국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전태국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어… 수현아, 너도 갈래?”
“저도 가도 돼요?”
“내가 오늘 재벌 클래스 한번 보여주지, 뭐. 니네 네버랜드 VVIP 투어 가본 적 없지? 다들 없을 거야. VVIP 투어는 우리 집안 식구들만 이용할 수 있거든. 내가 오늘 제대로 보여줄게.”
“태국 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엄마가 말렸지만, 전태국은 이미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서 아버님, 어머님도 준비하세요. 저 혼자 지희, 민국이 책임 못 져요.”
엄마, 아빠는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전태국은 슬쩍 나를 봤다.
“이만하면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준 값 제대로 한 거지?”
“인정.”
나는 짧게 대답했다.
* * *
고요한 클래식.
그리고 따뜻한 커피.
[이게 얼마 만에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이야.]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엄마, 아빠는 나한테 푹 쉬라며 동생들을 데리고 전태국이 양 비서를 통해 부른 전용차로 네버랜드로 떠났다.
[이제 책이나 읽어볼까….]
나는 책을 몇 장 넘겼는데, 뭔가 이상했다.
보통 내가 집에서 이러고 있으면 민국이가 달려 와서 다이빙을 하거나 지희가 와서 안기거나 했는데….
그런 방해가 없으니 뭔가 적적했다.
나는 적막함을 꾹 참고 책을 한 장 넘겼다.
그런데 방해받을 때보다 진도가 더 더디게 나갔다.
심지어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탁- 나는 책을 놓고 패딩을 꺼내 입었다.
[산책이나 해야겠어….]
복작거리는 가족들이 사라지면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줄 알았더니, 모든 게 너무 더디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 * *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아파트 입구 문을 열고 나가자, 선물 세트를 들고 인사 가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아빠의 가게가 있는 아파트 상가는 몇몇 가게들 빼고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어쨌든 전태국 덕분에 아빠 가게는 제대로 홍보 효과를 누리게 됐다.
벌써부터 인터넷에서는 아빠 가게 후기글이 종종 올라왔다.
다들 평도 좋아서 다행이었다.
아빠 가게를 지나갈 때쯤, 내 또래로 보이는 검은 패딩을 입은 남학생이 가게 앞에서 서성이는 게 보였다.
[뭐지? 도둑인가?]
순간 뒷머리가 삐쭉 솟았다.
노상강도를 만난 이후로 이런 상황에 예민해지긴 했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검은 패딩을 지나치려는데, 검은 패딩의 얼굴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얼굴인데…]
순간, 난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검은 패딩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혹시 여기 오늘 이 가게 문 닫았나요?”
“오늘 여기 쉬는 날이에요.”
“아하… 날을 잘못 잡았네요. 감사합니다.”
검은 패딩이 꾸벅 인사를 하는 찰나.
“저기요.”
“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최정우 아니야?”
“어… 내 이름을… 설마… 성국이… 맞아? 전성국?”
“응! 나 성국이야!”
검은 패딩은 내 인생 최초의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 최정우였다.
* * *
우리는 근처에 문 옆 작은 커피숍에 들어갔다.
나는 정우가 어색하지 않게 얼른 돈을 꺼내서 카운터로 갔다.
“정우야, 뭐 마실래?”
“성국아, 내 건….”
뒷말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정우야, 나 어릴 적에 니네 집 가서 많이 얻어먹었잖아. 오늘 내가 살게.”
“그럼, 그래… 난, 핫초코.”
곧 나온 핫초코를 정우는 한 모금 마시더니 얼굴도 조금 편안해졌다.
“성국아, 난 여기서 너 만날 줄 꿈에도 몰랐어.”
“나 찾아온 거 아니었어?”
“그게… 성국아… 너 기억하는 거야?”
정우는 조금 감동한 눈치였다.
[왜 그래, 나 전성국이야. 초등학교 1학년 기억쯤은 다 한다고.]
나는 집이 망해서 급하게 이사 가는 정우에게 집안을 일으키고 싶으면 언제고 나를 찾아오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아빠 가게를 꼭 기억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오늘에야 정우는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정우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 많이 변했지?”
“응! 내가 기억하는 통통한 최정우가 아니잖아!”
정우는 정말 역변해 있었다.
통통하고 순둥한 인상이었던 정우는 온데간데없고, 키 크고 늘씬한 모습의 귀여운 중학생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물론 여전히 착해 보였다.
“통통했던 과거는 잊어줘. 그땐 엄마가 정말 날 너무 많이 먹였어.”
“어머니 잘 계시지?”
“응. 엄만 여전해. 사실은 그때 아빠 사업 망하고 엄마랑 아빠랑 많이 힘드셔서 이혼하니 마니 막 하셨거든. 근데 몇 해 전부터 사이도 다시 좋아지시고, 아빠가 편의점 여시면서 우리 집도 조금씩 나아졌어. 아직 아빠 빚도 있고 그 전처럼은 못 살지만, 난 지금이 행복해.”
정말 다행이었다.
종종 나의 유일한 어릴 적 친구였던 정우 생각이 났다.
“오늘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외할머니댁이 이쪽이거든. 새해라 인사드리러 왔어. 엄마, 아빠는 이쪽은 쳐다도 보기 싫다고 하셔서 나 혼자 와봤어.”
[거짓말.]
나는 정우가 이곳을 찾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정우야, 너 솔직히 일부러 우리 아빠 가게 찾아온 거지?”
“그, 그게….”
“사실대로 말해도 돼.”
“성국아, 네가 그랬잖아. 집안을 일으키고 싶으면 너 찾아오라고.”
[역시 기억하고 있었구나. 최정우.]
나는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