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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85화 (185/231)

제185화

정우는 민망한지 핫초코를 마시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성국아, 1학년 때 생각하면 너 엄청 똑똑하고 잘생긴 아이이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멋지게 잘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네 기사 볼 때마다 나 엄청 놀랐어.”

[나 저번 생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아주 멋지게 잘살았다고. 이번 생은 정말 내가 피땀눈물 흘려서 일으켜 세운 거야.]

나는 올라가려는 어깨를 애써 내리며 우유를 마셨다.

“성국아, 근데 그 애슐리 홈즈인가 하는 그 여자가 너보고 마성의 남자라고 한 뉴스 말이야….”

“그건 다 거짓말이야! 그 여자랑은 정말 밥만 먹었어. 나 아직 미성년자잖아. 미국에서 성인이 미성년자 만나면 그거 완전 불법이야.”

정우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소리 내 웃었다.

“성국아,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아, 미안… 내가 그 여자 이야기에 요즘 좀 민감해서. 정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나더라고.”

“성국아, 너 정말 하나도 안 변했어.”

정우는 해맑게 웃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정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성국아, 너 옛날에도 똑같았잖아. 엄청 똑똑하고 세상 다 아는 척 해 놓고는, 작은 일에도 화르르 불타오르고. 그리고 나 아직도 기억해. 너 일부러 공부하고 싶어서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나랑 논 거잖아.”

[성격은 아니고, 뒤는 맞고.]

“그거 말고 또 기억하는 거 있어?”

“나 과외 했던 올리버 샘이랑 너랑 맨날 자연스럽게 대화하는데, 나 완전 쭈구리처럼 보고만 있었던 것도 기억나. 아, 네가 그랬잖아. 내가 가수 되고 싶다니까, 영어 공부 열심히 해두라고.”

[최정우, 기억력은 좋네.]

“그래서 영어 공부는 열심히 했어?”

“당연하지. 나 그 뒤에 영어 공부 진짜 열심히 했어. 엄마가 과외 못 시켜준다고 해서 맨날 교육 방송 같은 거 보고 공부했어. 다른 건 좀 그냥 그래도 영어는 맨날 1등이야. 영어 말하기 대회. 이런 것도 학교 대표로 나 맨날 나가.”

정우는 신나서 이야기를 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정우는 순수했다.

보통 잘 살다가 집이 망하게 되면 성격도 변하곤 하는데, 정우는 천성이 착하고 순둥한 모양이었다.

거기다 얼굴도 생각보다 준수했다. 미인이었던 어머니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정우야, 여전히 가수가 꿈이야?”

“그렇긴 한데. 솔직히 방법도 잘 모르겠고… 우선은 우리 집에 나도 보탬이 되고 싶어. 아빠 빚도 얼른 청산하고, 예뻤던 우리 엄마 다시 우아하게 살게 해주고 싶어. 그래서 너 찾아온 거야… 너 기사 보면 엄청 성공했잖아. 거기다 아저씨 보쌈집도 엄청 유명해지고.”

“흠….”

물론 난 최정우를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연결해준 끈을 잡고 올라가는 건 온전히 최정우의 몫이다.

“정우야, 내가 유명한 프로듀서 한 분을 소개해 줄 수 있어. 근데 그 이후부터는 네가 선택하고 노력하는 거야. 그리고… 가수가 되는 거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어.”

“괜찮아, 성국아. 나 정말 잘할 수 있어.”

“어쩌면 착실하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 나와 직장 잡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이건 정확한 이야기였다.

성공한 몇몇 아이돌만 보고 불나방처럼 연예계에 뛰어들었다가 이름도 제대로 못 알리고, 공부해야 할 시간에 공부도 못해서 사회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성국아, 나한테 길만 알려줘. 내가 그 길을 정말 열심히 뛰어가 볼게.”

[그래, 이 정도 각오면 길은 알려줘야지.]

나는 정우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정우야, 네 번호 줘. 내가 방무혁이라고 음악 하는 유명한 아저씨 알거든.”

“나도 알아! TV에서 가끔 음악 프로에 나오는 거 봤어.”

“그 아저씨가 기획사를 차렸거든. 방무혁 아저씨한테 오디션 볼 수 있는지 연락해보고 말해줄게. 근데 너 가수 되려고 했으면 딴 건 뭐 안 했어?”

“나 사실은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해. 그런 것도 다 도움이 되겠지?”

“당연하지. 우선 핸드폰이나 카메라로 찍어둔 거 있음 만나는 날 보여줄 수 있게 다 챙겨.”

“응, 성국아.”

정우는 한결 얼굴이 밝아졌다.

[녀석, 내 말대로 착실히 살고 있었군.]

정우는 핫초코를 마시더니 나를 빤히 봤다.

“성국아, 이런 부탁만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고 나, 사실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전학 간 학교에서는 적응을 잘 못 해서 초등학교 친구가 한 명도 없어. 내 초등학교 시절의 유일한 친구는 너뿐이야.”

“정우아, 나도 그래.”

물론 난 내가 학교를 때려치웠기 때문이다.

수준 안 맞는 선생이랑 도저히 공부할 수 없어서.

“그리고 사실은 나… 여기 처음 아니야.”

“그럼?”

“너 생각날 때마다 와서 이번이 꼭 서른 번째야. 이제야 만났네.”

“정우야, 고마워. 내 생각해줘서.”

“너도 나 기억해줘서 고마워.”

정우는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 * *

나는 정우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방무혁과 통화를 했다.

방무혁은 흔쾌히 오디션 한번 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그 사실을 알리자마자 정우는 핸드폰이 터져라 소리치며 기뻐했다.

저번 생에서야 집안 대대로 이뤄놓은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서 앞만 보고 살았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좀 달라질 계획이었다.

날 도운 이들에게는 은혜도 갚아가며 살아갈 계획이다.

물론 정우가 집안을 일으키면, 우리 집은 더 크게 일어날 거니깐.

* * *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괜히 머리를 몇 번 더 만졌다.

뒤에서 민국이와 함께 방바닥에 누워서 만화책을 보고 있던 전태국이 나를 흘깃 보는 게 느껴졌다.

“성국아, 효진 그룹 회장님 내외 만나러 가는 거야?”

“네, 근데 형….”

전태국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단 얼굴로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란 표시를 했다.

“전성국,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다 아는데. 나에게 매국노라며 소리친 엄마는 파리에 일 때문에 가셨고, 집에 가봤자 귀찮은 여동생밖에 없어. 미진이한테 너네 집에 있다 왔다고 하면 보나 마나 너 만나게 해달라고 난리 칠 텐데. 그럼 난 귀찮으니까 어쩔 수 없이 너한테 연락해서 만나게 해줘야 할 텐데. 전성국, 그것도 네가 바라는 건 아니지?”

[전태국, 점점 협상의 기술이 늘고 있어….]

전성국은 만화책을 한 장 넘기며 뒹굴었다.

“성국아, 들어올 때 치킨 좀 사 와라.”

“형아, 난 양념.”

민국이는 만화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성국아, 난 후라이드야.”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말은 이럴 때 딱 어울렸다.

* * *

약속 장소는 삼전 호텔의 중식당이었다.

내가 이곳의 짜장면이라고 하면 환장하는 것을 효진 그룹의 구수영 회장 내외도 너무 잘 알았다.

난 상기된 얼굴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구수영 회장과의 만남은 꽤 오랜만이었다.

미리 와있던 구수영 회장과 부인은 인자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성국 군, 정말 오랜만이야.”

“어머, 여보. 우리가 알던 그 성국이 맞아요? 아니, 정말 이제 다 컸어.”

“아직 더 커야 해요.”

나는 쑥스러운 듯 적당히 얼굴을 붉혔다.

곧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누나들은 잘 계시죠?”

“예정이가 이번에 여름에 뉴욕에서 결혼할 거야. 안 그래도 너 꼭 불러야 한다고 난리야. 뉴욕 친구들한테 ‘페이스 노트’ 창업자 친한 동생이라고 엄청 자랑했다고 하더라.”

“예정이 누나 결혼식에는 꼭 가야죠.”

“올여름에는 뉴욕에서 보겠구나….”

구수영 회장과 대화는 자연스레 누나들 이야기로 흘렀다.

예리 누나는 패션 쪽으로 전공을 틀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예리 이 녀석은 언제 정신 차릴지도 모르겠어.”

“누나 패션이랑 잘 어울려요.”

예리는 나중에 효진 그룹 내 패션 그룹을 이끌기도 한다. 지금 이대로만 내버려 두면 잘 헤쳐나갈 것이다.

하지만 구수영 회장의 진짜 고민은 따로 있었다.

이제 구수영 회장의 나이도 적지 않았다.

단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가 죽었으니, 그 뒤가 깜깜한 모양이었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

“여보, 성국이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무슨 할 말이지?

나는 짜장면을 먹다가 살포시 젓가락을 놨다.

[내가 짜장면 먹다 끊는 경우 거의 없다고. 구 회장 어서 할 말 해봐.]

구수영 회장은 힘없이 웃더니 나를 쳐다봤다.

“사실은 네 얼굴도 보고 싶었고… 부탁도 있어서 보자고 했어.”

[흠… 내가 예상한 내용인가.]

“회장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래, 성국아. 사실은 말이야. 너 그 ‘페이스 노트’ 일 그만두면, 효진 그룹 일을 좀 해볼 생각은 없나 해서….”

말끝에도 힘이 없었다.

구수영 회장은 내가 효진 그룹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지금 구수영 회장의 제안은 나를 죽은 아들 대신으로 후계자로까지 여긴다는 의미였지만, 나 역시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효진 그룹은 나름 탄탄하고 안정적인 그룹이다.

삼전에 비해서는 살짝 작지만, 대한민국 재계 5위 안에 드는 기업이기도 했다.

이 기업을 잡는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바로 재벌이 되는 기회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제 대한민국의 재벌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물론 곧바로 거절해서 효진과의 관계도 척을 질 이유는 없었다.

삼전 그룹과는 사이가 틀어졌어도 우리 집에서 뒹구는 전태국을 볼모로 잡아둬서 앞으로의 관계 형성은 이미 해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살짝 놀란 척을 했다.

“회장님…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내 너무 뜬금없었지? 그냥, 우리 효진 그룹에서 자네를 조건 없이 후원해 준 뒤로 여러 보고를 항상 듣고 있다네. 준호 이름을 딴 장학 재단의 후원을 받아 하버드도 들어가고, 사업도 크게 일으키고… 정말 대단한 일을 많이 했어.”

구수영 회장은 따뜻한 물로 목을 축였다.

“그 덕에 준호 재단이나 효진 그룹도 광고 많이 된 것도 아네. 근데… 그런 소식들을 자주 듣다 보니… 자네가 정말 늦게 얻은 아들 같기도 하고… 그래서 혹시라도 물어만 보는 걸세. 만약 자네가 미국에 뿌리를 내릴 게 아니고 한국에 들어와 일을 한다면 우리 효진 그룹이 어떤가 해서 말해본 거네.”

나는 구수영 회장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잠시 생각에 빠진 척을 했다.

이런 것은 대답을 너무 빨리해도 안 됐고, 너무 늦게 해도 실례였다.

적당한 타이밍에 나는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저를 굉장히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합니다.”

이미 거절을 눈치챘는지 구수영 회장은 힘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전 효진 그룹에서 하는 일보다는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이 더 재미있거든요.”

“그래, 한창 그럴 나이이지.”

“회장님, 혹시 회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국에서 하는 사업의 파트너가 효진 그룹이 되어주시는 건 어떠세요?”

나는 역제안을 했다.

“자네 한국에서 무슨 사업을 할 생각인가?”

“아직 구상 중이긴 한데. 전 미국에 있으면서 대한민국 문화의 가능성을 봤거든요. 제가 미국에서 하고 있는 ‘페이스 노트’의 가입자 수가 이제 미국이 아니라 전 세계 인구로 퍼져나가는 과정이기도 하고요. 이런 소셜네트워크와 가장 잘 결합할 수 있는 게 영화, 드라마, 음악이잖아요.”

[물론 다 거짓말이야. 내가 인생 살아보니까 K-POP이랑 한국 영화,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대박 나는 날이 오긴 하더라고.]

구수영 회장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미국 시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 시장을 바꾸고, 더 나아가 세계를 휩쓰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거기에 효진이 파트너가 되어 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내 말은 귀찮은 한국 법인 문제며 기타 등등 다 효진이 해결해 달란 말이야, 구 회장.]

구수영 회장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 군의 생각은 정말 일반인들이 따라갈 수가 없군. 문화라….”

옆에서 구수영 회장의 부인도 거들었다.

“여보, 예전에 준호가 그랬잖아요. 자기가 만약 재벌 후계자만 아니었어도 영화감독 해보고 싶었다고요.”

[흠… 준호가 그랬지.]

나도 잠시 준호를 떠올렸다.

어디 어긋난 데 없고, 꿈 많은 흔치 않은 재벌 청년이었다.

구수영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사업은 언제부터 진행할 생각인가?”

“지금 팀원을 모으고 있어요. 그게 완성되면 시작해 보려고요. 회장님, 그때 도와주실 수 있죠?”

“당연하지.”

구수영 회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아주 만족스러운 협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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