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구수영 회장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였다.
“성국 군, 나도 ‘페이스 노트’에 가입하고 싶은데….”
“여보, 나이 들어서 그런 거 하면 주책이지. 그런 건 젊은 애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부인이 말렸지만, 구수영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주책은. ‘페이스 노트’가 아직 한국에서는 썩 유명하지 않은데, 소위 재벌인 내가 한다고 해봐. 사람들이 다시 볼걸.”
[역시 구 회장이야.]
어쨌든 효진 그룹을 일으킨 사람이었고,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나이가 있어도 비즈니스 감각은 떨어지지 않았다.
“회장님, 저야 너무 좋죠. 가입 방법 알려드릴까요?”
“내 비서 통해서 할게. 자네 같은 인재의 귀한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되지.”
“가입하시면 바로 저한테 연락 주세요. 제가 바로 친구 맺을게요.”
“허허. 내가 이제 그럼 세계적인 IT 기업인 ‘페이스 노트’ 대표랑 친구가 되는 거네.”
“네, 회장님.”
옆에서 보고 있던 구수영 회장의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암튼… 못 말려.”
“사모님, 누나들도 ‘페이스 노트’에 다 가입해 있어요. 사모님도 가입하셔요.”
“그럼, 우리 예정이랑 예리 ‘페이스 노트’도 다 볼 수 있는 거지?”
“단, 친구가 되시면요.”
이때, 구수영 회장이 부인을 말렸다.
“내 생각에는 당신은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왜요?”
“애들 감시하려고 하는 거잖아.”
“겸사겸사하는 거죠.”
“봐. 이러면 애들이 ‘페이스 노트’에 진실을 못 올리지.”
구수영 회장의 말은 정확했다.
구수영 회장은 짜장면을 이미 옛적에 비운 나를 인자하게 쳐다봤다.
“성국 군, 앞으로 우리 사이에 같이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난 언제든 환영일세. 그리고 사업과 관계없어도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하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진심을 다해 돕겠네. 내 자네를 진심으로 아들처럼 생각하는 거 알지?”
“항상 부족한데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자주 소식 전할게요.”
“부담 가지라고 한 말은 아닐세. 우선 우리 예정이 결혼식에서 보자고.”
“네, 회장님.”
구수영 회장은 어쨌든 나에게 이번 생에서는 가장 큰 은인이었다.
전재형 회장이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타이밍에 내게 다른 선택지가 되어 주신 분들이었다. 거기다 조건 없는 후원까지.
아빠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고아로 태어난 자신이 <원아저씨 보쌈> 수유점 사장님을 만난 것은 인생의 행운과 같은 일이라고. 그리고 수유점 사장님은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구수영 회장은 나를 낳은 분은 아니었지만, 이번 생에서 사회적으로 나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인 것은 분명했다.
* * *
구수영 회장 내외와 헤어지고 나는 삼전 호텔 베이커리로 향했다.
저번 생에서야 너무 흔해서 안 먹는 거였지만, 이걸 사가면 민국이나 지희는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나 정말 좋은 오빠잖아.]
나는 베이커리로 가서 가장 큰 케이크 하나를 골랐다.
“이거 포장해 주세요.”
“네, 금방 포장해 드릴게요.”
내가 카운터 앞에서 서성이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시선은 익숙했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내 주위는 항상 이런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잘생긴 걸 알아보는 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다니까.]
이때, 뒤에서 까악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무리 잘생겨도 비명 소리까지 들은 적은 별로 없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나?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에 옆으로 한 남자가 섰다.
키가 나보다 크고, 우수에 찬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뭘 사가지….”
[엄청 익숙한 목소리인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에 여자 한 명이 다가오더니 남자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정우승 씨 맞죠?”
“네.”
남자는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웃었다.
나는 옆에 선 남자를 다시 쳐다봤다.
정우승이라고?
대한민국 미남계를 대표하는 그 유명한 배우?
정우승은 우수에 찬 얼굴로 팬이 내민 종이에 사인을 해줬다. 그러고는 대스타답게 밝게 인사도 했다.
“정우승 씨, 여기 무슨 일이세요?”
“케이크 사러 왔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저희는 저녁 먹으러 왔어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전 부모님이 기다려서요.”
[거짓말. 애인한테 갈 거잖아.]
팬을 보낸 정우승은 나와 똑같은 케이크를 가리켰다.
“이거 하나 포장해 주세요.”
“어… 이건 방금 나갔는데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내가 산 케이크인 모양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우승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른 케이크를 가리켰다.
“그럼, 이걸로 포장해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정우승과 나는 나란히 케이크를 기다리며 섰다.
이런 것을 잘생긴 애 옆에 잘생긴 애라고 하는 건가.
나는 어깨를 살짝 올렸다.
정우승은 나를 보더니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우리 본 적 없어요?”
“정우승 씨, 저는 처음 뵙는데요.”
[저번 생에서는 우리 삼전 그룹 광고 여러 개 했잖아. 영화 시사회도 꼬박꼬박 초대해주고. 물론 난 바빠서 못 갔어. 이제 와서 미안하네.]
정우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근데 왜 이렇게 낯이 익죠?”
이때, 정우승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정우승도?
“혹시 그 마성의 남자?”
[하아… 도대체 아침 뉴스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본 거야?!]
나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맞죠? ‘페이스 노트’ 창업자? 그 유명한 천재, 맞죠?”
“네, 제가 ‘페이스 노트’ 창업자는 맞는데요. 마성의 남자는 아니고요. 저 미성년자입니다.”
“그건 저랑은 상관없고요. 저 ‘페이스 노트’에 가입하고 싶은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돼요?”
정우승도 아직 ‘페이스 노트’에 가입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정우승을 이 기회에 이용해 봐?
나는 엷은 미소를 띠고 정우승을 바라봤다.
“정우승 씨, ‘페이스 노트’ 가입하는 거 제가 알려드릴까요?”
“그럼, 너무 좋죠.”
정우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는 ‘페이스 노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나날이 늘어가는 중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페이스 노트’를 하지 않으면 왕따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페이스 노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구수영 회장에다가 정우승 같은 유명 배우가 한다면 분명 또 다른 파급력이 생길 것이었다.
“제가 케이크 같이 계산할게요. 저 좀 제발 알려주세요.”
물론 이미 내가 재산은 정우승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공짜는 정말 마다하기 힘들었다.
“그럼, 여기에서 알려드릴게요. 근데 노트북 있으세요?”
“저희 매니저한테 빨리 가지고 오라고 할게요.”
정우승은 급하게 매니저에게 연락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정우승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생긴 배우이다. 물론 앞으로 20년도 그럴 것이다.
거기다 각종 SNS에로도 팬들과 활동을 잘하는 배우이다.
곧 매니저가 노트북을 들고 뛰어왔다.
나는 노트북을 열고 ‘페이스 노트’에 들어갔다.
“근데 저희 ‘페이스 노트’ 가입이 어렵나요?”
“그건 아닌데… 제가 컴맹에 가까워서요. 타자도 독수리예요.”
“그럼, 컴퓨터 잘하는 분에게 부탁해도 되는 일인데요. 저희 ‘페이스 노트’ 가입하기 엄청 쉬워요.”
“그러려고 하던 차에. 이렇게 우연히 ‘페이스 노트’ 창업주를 만났는데,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일 마치고 가는 길이었는데, 괜히 삼전 호텔 들르고 싶더니… 이런 행운이 저한테도 오네요.”
정우승은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우승, 그건 여자들한테나 통하는 거야. 나한테는 전혀 안 통해. 그래도 잘은 생겼네.]
나는 얼른 ‘페이스 노트’ 인증 절차를 통해서 정우승을 ‘페이스 노트’에 가입시켰다.
정우승은 신기한 듯 ‘페이스 노트’를 이리저리 살폈다.
“와, 여기다 글을 쓰고 사진도 올리고 그러면 되는 거죠?”
“네, 쉽게 도토리월드 생각하세요.”
“근데 여긴 세계인이 보는 곳이잖아요.”
“바로 그 차이죠.”
정우승은 진지하게 ‘페이스 노트’를 탐방했다.
그러더니 문득 나를 쳐다봤다.
“나… 친구 신청해도 돼요?”
“물론이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포장된 케이크가 나왔다.
정우승은 내가 고른 케이크를 내밀었다.
“가족들이랑 설 연휴 보내러 오신 거죠?”
“네, 정우승 씨는요?”
“저도요. 미국에는 언제 가요?”
“연휴 끝나면 갈 것 같아요.”
“미국 가면 연락할 테니, 모른 척 말아요.”
“당연하죠. 참, 정우승 씨.”
나는 정우승에게 할 말이 떠올랐다.
“왜요?”
“정우승 씨는 이미 대한민국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 미남이잖아요. 이런 SNS에는 너무 각 잡고 찍은 화보 같은 사진 말고, 왜 이런 거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막 올리는 셀카 같은 거로 찍어 올려 보세요. 사람들이 아마 이 잘생긴 얼굴 함부로 쓴다고, 그렇게 쓰면 자기 달라고 난리도 아닐 것 같아요.”
“역시 천재라서 그런가… 정말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한번 그렇게 해볼게요.”
물론 안 봐도 반응 폭발일 것이다.
잘생긴 얼굴은 어떻게 써도 잘생겼을 테니까.
“케이크 잘 먹을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나는 정우승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 * *
케이크 하나에 식구들은 뺑 둘러 식탁에 앉았다.
물론 불청객 한 명이 있었다.
전태국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치킨 사오라니까.”
“연휴라 치킨집이 연 데가 없더라고요.”
“에이, 삼전 호텔 케이크 식상한데….”
“형이나 식상한 거지, 저희 가족은 처음이거든요.”
“나한테 말을 하지. 그럼 내가 배달시켰을 텐데.”
“간 김에 산 거예요. 형, 먹기 싫으면 먹지 마세요.”
내가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전태국은 포크를 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먹기 싫다는 말은 안 했어!”
전태국은 한 손에 포크를 꼭 쥐고 케이크를 기다렸다.
나는 은근히 물었다.
“형, 진짜 집에 안 가요?”
“전성국, 너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 봐라. 내가 삼전 호텔 짜장면 평생 먹을 수 있게도 해주고, 네버랜드 VVIP 투어도 데리고 다녀왔는데. 집에 가라고 하면 섭하지.”
[하긴….]
전태국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전재형 회장은 이번 생에서 나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경계하면서도 적당히 정보를 얻을 만큼 간격을 유지했다.
그런데 전태국은 아직 그런 비즈니스 마인드가 전혀 없었다.
[이래서 어떻게 삼전을 이끌겠어… 삼전의 앞날도 걱정이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려다가 문득 전태국을 다시 봤다.
[설마… 세계적인 사업가가 되는 나와 친분을 유지하려는 고도의 전략인가? 설마… 전태국이… 그 정도로 똑똑할까?]
나는 식상하다는 케이크를 미친 듯이 먹고 있는 전태국을 빤히 쳐다봤다.
“성국아, 뭘 봐.”
“아, 그게… 형, 식상하다면서요?”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네. 참, 샌프란시스코 비행기표 예약했어. 같이 가자.”
“형… 진짜 저희 집에 계속 있을 생각이에요?”
“퍼스트클래스 좌석까지 예매했는데, 나한테 이러면….”
“섭하지!”
옆에서 민국이가 전태국의 말을 따라 했다.
* * *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퍼스트클래스.
나는 전태국과 나란히 앉았다.
전태국은 설 연휴 내내 집에도 안 가고, 결국 우리 집에서 놀고먹다가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까지 같이 탔다.
전태국은 비행기에 타자마자 술을 진탕 마시더니 안대를 끼고 잠들었다.
그사이 나는 여러 가지 국내 신문을 읽어 내렸다.
그때,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 보였다.
바로 효진 그룹 계열사인 신문사의 기사였다.
- 효진 그룹 구수영 회장 ‘페이스 노트’ 개설. 세계적인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직원들과 편하게 소통하는 CEO가 되겠다는 다짐을 첫 글로 올리자마자 폭발적인 관심.
그 아래 이색 기사도 보였다.
- 사실 ‘페이스 노트’ 대한민국 재벌 1호 가입자는 바로 삼전 그룹의 후계자 전태국 군. 하지만 친구 수가 0으로 진짜 삼전 그룹 후계자의 ‘페이스 노트’인지 의심받는 상황이다.
나는 그 기사를 읽고 노트북을 열어서 전태국이 내게 한 친구 신청을 받아줬다.
드디어 전태국의 ‘페이스 노트’에도 친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