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잠에서 깬 전태국은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형, 술 좀 작작 마셔요.”
“성국아, 이제 내 걱정도 해주는 거야?”
[내릴 때 짐 될 것 같아 방지하는 거지…. 그나저나 저번 생에서도 짐이더니, 넌 어쩜 하나도 안 변하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마음 다 알아. 가볍게 샴페인이나 더 마실게.”
“마음대로 하세요.”
전태국은 어느새 노트북을 열어서 ‘페이스 노트’를 확인하더니 나를 울컥한 얼굴로 쳐다봤다.
“성국아….”
[제발 감동 먹은 얼굴 하지 마. 한국에서 기업 하려면 삼전 그룹이 필요해서 인맥 관리 차원에서 해둔 거야.]
“성국아… 나 드디어 친구 생긴 거야?”
“형. 이 기사 좀 봐요.”
나는 전태국에게 신문을 건넸다.
전태국은 기사를 보더니 대노했다.
“아니, 이 기레기들! 확인도 안 하고 이런 기사를 낸단 말이야! 내 ‘페이스 노트’가 당연히 맞지! 당장 비서팀에 연락해서 광고며 뭐며 다 빼라고 해야겠네. 이런 기레기들 같으니라고!”
전태국이 화를 내는 사이에 마크가 ‘페이스 노트’에 이상한 댓글을 달았다.
- 성국, 잘 오고 있지? 시간 맞춰서 나랑 미미 씨랑 데리러 갈게. 근데… 너 최대한 얼굴 가리고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일이지?
곧이어 마크의 댓글이 또 달렸다.
- 내 친구가 워싱턴포스트 기자인데, 너 취재한다고 지금 여기 기자들이며 파파라치들 난리도 아니래. 암튼 우리가 앞에서 기다릴게. 얼굴 잘 가려.
정말 애슐리 홈즈와 나는 악연인 게 분명했다.
나는 전태국을 쳐다봤다.
“형, 선글라스 있죠?”
“응. 그건 왜?”
“제가 친구도 받아줬으니, 선글라스 좀 빌려주세요.”
“그래. 내 최초의 친구니까. 인심 좀 쓰지. 내 거 이번 신상 구씨 거야.”
나는 얼른 선글라스를 받았다.
이제 곧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 * *
나는 후드티를 매만졌다.
전태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만약 너였다면, 난 정말 이 세상의 모든 옷은 다 걸쳤을 텐데.”
“형, 전 형만큼 부자가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너도 이제 돈 좀 있잖아.”
[‘페이스 노트’ 상장하면 당연히 전태국 너보다 부자가 되지.]
하지만 아직은 그냥 돈 좀 있는 서민일 뿐이었다.
“사치할 만큼은 아니에요.”
“암튼 지독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짐을 챙겨 우리는 게이트로 향했다.
나는 전태국에게서 빌린 구씨 선글라스를 꼈다.
전태국이 살짝 질투 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야, 나보다 잘 어울리잖아.”
[당연하지.]
“근데 갑자기 선글라스는 왜 끼는 거야?”
“형, 곧 알게 될 거예요.”
드디어 게이트 문이 열렸다.
동시에 수많은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이 내가 나오는 모습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재벌 때는 익숙했는데….]
그 재벌 시절도 벌써 15년도 전이긴 했다.
기자들이 여기저기서 달려들면서 나에게 질문을 해댔다.
“애슐리 홈즈가 제일 사랑한 남자라고 했는데, 두 사람 무슨 사이였나요?”
“애슐리 홈즈가 이슈를 돌리기 위해서 ‘페이스 노트’의 전성국 대표를 이용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애슐리 홈즈를 사랑하셨나요?”
정말 들어줄 수 없는 개소리들의 향연이었다.
이번 사태는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나는 자리에 우뚝 서서 기자들을 쳐다봤다.
한 기자가 급하게 마이크를 가져다 댔다.
“자, 말씀해 주세요.”
나는 선글라스를 낀 채 쏟아지는 앞머리를 뒤로 살짝 넘겼다.
그리고 정말 벌떼처럼 몰려든 기자들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대한민국 나이로 15세입니다. 미국 나이는 더 어리겠죠? 그 말은 제가 아직도 미성년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까 어느 기자 분의 말처럼 애슐리 홈즈는 대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저와의 만남을 부풀리고 있습니다. 저는 애슐리 홈즈가 초대한 파티에 ‘페이스 노트’ 공동 창업자인 마크 주크버스와 같이 참여했고, 애슐리 홈즈가 투자를 원해서 같이 피자를 나눠 먹으며 이야기한 게 다입니다. 물론 그 피자 가게에서 애슐리 홈즈의 사기 행각이 밝혀지는 뉴스가 나와서 저는 피자 세 조각밖에 못 먹었습니다.”
기자들은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 애슐리 홈즈의 회사인 블러드테라피에 의문을 제기한 거의 유일한 파티 참여자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애슐리 홈즈가 그 일에 앙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제 인터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더는 참지 않겠습니다. 애슐리 홈즈와 저에 대해서 추측성 기사를 쓰는 기자들과 언론사는 앞으로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나는 적당한 협박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곧 인파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마크와 리미미가 보였다. 전태국도 함께였다.
나는 얼른 마크에게 다가갔다.
“성국, 괜찮아?”
“애슐리 홈즈, 정말 내가 아주 부숴버릴 거야.”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 * *
- ‘페이스 노트’의 공동창업자 전성국 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다.
- 애슐리 홈즈의 언론플레이에 휘둘리고 있는 미국의 기자들.
- 전성국 군, 애슐리 홈즈와 자신의 추측성 기사를 내는 모든 언론사들에게 경고하다. “이제 더는 참지 않겠다!”
- 전성국 군의 공항 패션 대화제.
- 300달러가 넘는 구씨 선글라스를 쓴 여심을 홀리는 전성국 군.
마크가 아침 신문 기사를 읽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성국, 어제 네 패션이 지금 인터넷에서 엄청 대유행이래. 여기 자세히 네가 입은 브랜드도 다 적어놨어. 어제 신은 운동화 나이스였어?”
“뉴발인데…. 암튼 그런 것도 확인도 안 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기사도 있어. 소박한 줄 알았던 전성국 사실은 명품 애호가.”
“네가 얼굴 최대한 가리라고 해서 태국이 형한테 빌린 거야.”
“더 대박은 어제 네가 구씨 선글라스 쓴 거 지금 전국 매장 품절이래. 성국, 너 이제 완전 패셔니스타 된 것 같아.”
[마크, 내가 말이야. 저번 생에서는 재벌가의 패셔니스타였지만, 이번 생은 포기한 일이야.]
나는 베이글을 한입 깨물었다.
[그런 건 관심 없고… 한국 갔다 왔더니 따뜻한 국에 밥 먹고 싶네.]
이때,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건너집 사는 전태국이 분명했다.
마크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성국, 태국이 맨날 우리 집에 건너오는데, 그냥 열쇠 하나 줄까?”
“너랑 미미 씨랑 단둘이 오붓한 시간 보낼 때 불쑥 들어오고 그래도 괜찮아?”
“성국, 우리 그렇게 막 그러지 않아.”
마크의 얼굴이 머리만큼 붉어졌다.
밖에서 전태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문 좀 열어줘.”
마크가 얼른 문을 열자, 전태국이 절망스러운 얼굴로 내게 선글라스는 던지다시피 건넸다.
“형, 이거 형 거잖아요.”
선글라스는 어제 공항 나올 때만 쓰고 고대로 전태국에게 돌려줬다.
“내가 이걸 쓰면 보나 마나 사람들이 너 따라 샀냐고 할 거 아니야.”
[같은 선글라스, 다른 느낌? 뭐 그런 거지….]
나는 태연히 베이글을 입으로 뜯었다.
“내가 이 선글라스 진짜 간만에 마음에 들었는데…. 네가 계속 써.”
“마다하지 않을게요.”
역시 공짜를 마다하기는 쉽지 않았다.
“참, 철수 형은 언제 와요?”
“며칠 후에 들어온대. 참, 성국아. 너, 나랑 같이 살래?”
무슨 의미이지?
“철수가 아직 너한테는 말 안 했지? 스탠포드 기숙사 들어갈 것 같다고 한 거.”
“네, 금시초문이에요.”
“철수가 스탠포드 기숙사 들어가면 우리 집으로 옮기는 게 어때? 여긴 커플에게 내주고.”
나는 마크를 쳐다봤다.
마크는 손사래를 쳤다.
“성국, 난 정말 괜찮아. 여기 계속 같이 살자. 아니지. 나가려면 우리가 나가야지.”
“그 말은 둘이 같이 살고는 싶은 거지?”
“아, 그게….”
미국에서야 동거는 흔한 일이었다.
비싼 월세를 부담하는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고, 결혼 전에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국처럼 흠이 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베이글을 입에 다 넣고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이제 내 주변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페이스 노트’는 많은 투자를 받았고, 직원들은 매주 늘어났다.
가입자 수도 그만큼 무섭게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크도 나이를 먹고 연애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다들 나보다 어른이었다.
나는 베이글을 삼키고 마크를 쳐다봤다.
“마크, 내가 태국이 형네 집으로 옮길게.”
“성국아….”
“나 진심이야. 그러니까 미미 씨한테도 그렇게 전해줘.”
“어….”
마크는 대답하면서도 미안한 듯했다.
“태국이 형, 제가 철수 형이랑 연락해서 이사 날짜 잡을게요.”
“알았어.”
그리고 나는 앞머리를 올리며 양치질을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하아… 또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겠지….]
이때, 뒤에서 전태국과 마크가 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국이 쟤 가끔 저렇게 분위기 잡을 때, 정말 중2병 같지 않아?”
“형두 참. 성국이 당연히 중2병이죠. 그 나이잖아요.”
[참나, 한참 어린 것들이….]
나는 분노의 양치질을 시작했다.
* * *
전화기 너머로 정우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렸다.
- 성국아, 나 오디션 합격했어. 방 대표님이 연습생으로 들어와 보래.
“정우야, 힘들어도 한눈팔지 말고 잘 견뎌.”
- 응. 정말 열심히 해서 가수되는 모습 꼭 보여줄게.
“정우야, 혹시 힘들 때… 다른 기획사에 제안이 오면 꼭 나한테 상의해줘.”
- 당연하지. 성국아, 나 진짜 유명한 가수가 돼서 네 말대로 우리 집안 꼭 일으켜 세울게!
“나도 응원할게.”
[동시에 우리 기획사 돈도 많이 벌어주는 가수 되길 바라.]
나는 흐뭇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전태국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방은 마음에 들어?”
“옆집에서 제가 쓰던 방이랑 똑같아서 편해요.”
젊은 양 비서는 스탠포드 편입에 당당히 성공했고, 바로 기숙사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마크와 리미미 씨를 위해서 바로 이사를 왔다.
전태국은 방안 곳곳을 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
“성국아, 앞으로 잘 부탁해.”
“저도요, 형.”
나는 전태국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나의 실리콘밸리에서의 새로운 시즌이 열리고 있었다.
* * *
2006년 9월 12일.
“성국아, 일어나!”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마크?”
“너 대체 여기서 며칠이나 잔 거야?”
“모르겠어….”
“아침에 태국이 형이 너 갈아입을 옷 좀 건네주라고 해서 가지고 왔어.”
“어, 고마워.”
“어서 일어나. 미미 씨가 너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며 아침부터 김밥도 싸줬어.”
“와아, 대박.”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도대체 뭐에 빠져 있는 거야?”
“김밥 좀 먼저 주면 안 돼?”
“알았어. 천천히 먹어.”
“어!”
나는 마크가 내민 김밥을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김밥이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자, 물.”
“고마….”
“말 그만하고, 어서 먹기나 해.”
나는 김밥을 연신 먹었다.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페이스 노트’는 더 성장했다.
투자가 끊임없이 들어왔고, 가입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비슷한 콘셉트로 라이벌 구도를 이루던 ‘마이 하우스’를 누른 지도 꽤 됐다.
거기다 내가 투자한 모든 것들이 미친 듯이 굴러가고 있었다.
스페이스 Z는 드디어 우주선 발사에는 성공해서 나사와 계약을 체결하는 바람에 대규모 투자를 받기 시작했다.
짐도 이제 곧 마셜 제도에서 풀려나서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페이스 노트’에 올렸다.
내가 투자할 때만 해도 막 시작 단계였던 인터넷 상거래 업체 알리바바는 중국의 인터넷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대한민국에 투자해둔 동탄과 마곡의 땅은 개발 계획이 본격적으로 발표 나면서 이미 10배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었고, 주식은 말하기도 입 아팠다.
아버지의 <원아저씨 보쌈>은 잠실 본점을 시작으로 강남 1호점과 2호점. 거기다 광역시에도 매장을 여는 등 활발하게 확장 중이었다.
동시에 엄마와 김미영의 SKJ 제작사는 효진 그룹의 글로벌 광고를 만드는 등 꽤 튼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민국이는 초등학교 6학년 1학기에 전교 1등을 했었고, 지금은 중학생이 됐다.
지희는 벌써부터 초등학생 수학 경시대회를 휩쓸고 있었다. 얼굴도 처음 태어났을 때보다 조금 예뻐졌다.
이제 막 방무혁은 민국이와 정우를 한 팀으로 엮어서 남자 아이돌 그룹을 만들려는 구상을 싹틔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며칠 동안 푹 빠져 있었던 것은 바로 미국의 정치 제도와 현재 상하원 의원들. 현재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그들의 행적에 관한 것들이었다.
마크가 내 노트북을 보더니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이게 다 뭐야?”
“현재 미국의 정치 지도잖아.”
“이걸 네가 왜 봐?”
“며칠 전에 버락 오마하한테 연락이 왔어. 다음 달에 대선 나가는 거 TV 방송에서 이야기할 건데. 자기 캠프에서 SNS 담당자가 필요하다고, 나보고 와달라고 하네.”
마크는 살짝 벙찐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어.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