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92화 (192/231)

제192화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

망망대해가 보이고, 파도 소리가 들리는. 그야말로 분위기만으로도 압도당할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런 곳에 지금 나는 전태국과 단둘이 앉아있었다.

거기다 전태국은 구씨의 신상 슈트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채였다.

“형, 내가 그러게 편하게 입으라고 했잖아요.”

전태국이 구씨의 신상 슈트 깃을 매만지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아… 성국아, 찰리 잡스 죽는 건 아니겠지?”

“찰리 잡스 그렇게 쉽게 죽진 않을 거예요.”

사실이다.

찰리 잡스는 2011년에 죽으니까, 앞으로 4년 남았다.

전태국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예약한 레스토랑에 무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그때 찰리 잡스의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최근 무리한 일정으로 찰리 잡스가 갑자기 몸 상태가 악화돼 급히 병원으로 가는 중이라는 연락이었다.

무척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약속을 잡자고 말도 했다.

물론 전태국은 크게 실망했다.

전태국과 이렇게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 앉아 단둘이 밥을 먹어야 하는 나도 썩 달갑지는 않았다.

“성국, 넌 어떤 때 보면 참 냉정한 것 같아. 찰리 잡스 걱정도 안 돼?”

“안 되긴요. 당연히 되죠. 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잖아요.”

나도 10년 너머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성국아, 어쨌든 우리도 뭐든 시키자. 배고파 죽겠어.”

하지만 이곳은 찰리 잡스가 사랑하는 비건 레스토랑이었다.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메뉴 몇 가지를 골랐다.

설명에는 대부분 신선한 유기농 당근이 들어간 당근 라페 샐러드,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

전태국은 심드렁한 얼굴로 메뉴판을 덮어버렸다.

“성국아, 이번에 대한민국에서도 대선으로 시끄럽더라.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줄 대고 계신 모양인데… 넌 어떤 것 같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 정치에 관심 없잖아요.”

“정치에 관심도 없으면서 이번 딕 파웰이랑 버락 오마하는 왜 연결시켜 준 거야?”

“둘 다 ‘페이스 노트’ 사용자니까요. 이용자 관리 차원이었어요.”

[전태국, 난 철저히 내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다고.]

이때,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정말 딱 봐도 입맛이 뚝 떨어지는 당근 무덤이었다.

나는 애써 포크로 당근을 집어 올렸다.

물론 저번 생에서야 나이 먹고 건강 챙긴다고 유기농 야채만 먹었지만, 지금 나는 혈기 왕성한 10대였다.

전태국도 포크로 몇 번 당근을 뒤적거리더니, 포크를 내려놓고 맥주만 마셨다.

“참, 형. 예정이 누나 결혼식 때 갈 거죠?”

“청첩장 받았으니 가야지. 아빠는 출장으로 바쁘고, 엄마는 무슨 전시 준비로 바쁘다고 나보고 대신 다녀오래.”

전태국은 더는 못 먹겠다는 얼굴로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안 되겠다. 성국아, 이건 사람이 먹는 게 아닌 것 같아. 우리 치킨 먹으러 가자.”

“치킨이요?”

“싫어?”

“형, 대한민국 사람 중에 치킨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서 가요!”

나도 오늘만큼은 전태국과 한마음이었다.

* * *

대통령 비서실.

비서팀 비서 실장과 직원들은 버락 오마하의 ‘페이스 노트’에 올라온 사진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VIP께서 이 남자 정체 좀 알아보라고 하시는데?”

비서실장이 사진 속 성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딕 파웰이지 않습니까, 실장님.”

고문관 박 비서가 제일 빨리 대답했다.

비서 실장이 한심한 듯 박 비서를 쳐다봤다.

“내 손가락이 잘못했네. 박 비서, 우리 중에 딕 파웰과 버락 오마하 모르는 사람 있을까? 여기 이 젊은 남자 있잖아. 이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뭔지. 알아보라고.”

“근데… 이 남자 엄청 잘생겼네요. 한국 사람인가요?”

“응. 한국 사람이고 남자야. 자, 이제 소스 충분하지?”

“네! 신상 자세히 털어서 보고 하겠습니다.”

박 비서는 얼른 노트북 앞으로 갔다.

보고 있던 비서 실장은 미간을 팍 구겼다.

“박 비서, 지금 인터넷 할 때야?”

“실장님, 요즘 사람 뒷조사는 SNS가 최고예요. 짹짹이랑 ‘페이스 노트’ 뒤지면 그 사람의 과거사는 물론이고요. 짜장인지 짬뽕인지, 개인적인 성향까지 다 알 수 있다고요.”

“아휴, 머리야. 내가 너를 왜 뽑았는지 모르겠다.”

“실장님! 저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이라 뽑으셨잖아요!”

“암튼 내일 오전에 VIP한테 보고해야 하니까, 어서 조사해서 올려.”

“네!”

박 비서는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전재형 회장 역시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딕 파월과 버락 오마하, 그리고 그 가운데 전성국이 있는 사진이었다.

미국 정치의 상징과도 같은 두 사람 사이에 성국이 껴 있었다. 마치 이 두 사람의 징검다리라도 되듯이.

양 비서가 조사한 내용을 전재형 회장에게 설명했다.

“이분은 주한미군 부대 앞에서 햄버거집을 운영 중인 미스터 진이라는 분입니다. 딕 파웰이 주한미군에서 근무할 당시에 자주 갔던 햄버거집이라고 하더라고요.”

“이 사람을 성국이 직접 데려왔단 말인가?”

“그, 그게….”

양 비서는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재형 회장이 이 사실을 알면 벼락같이 화를 낼 것이라는 사실도.

전재형 회장은 태연하게 양 비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양 비서, 계속 말해보게.”

“그게… 태국 도련님이 도와주신 것으로 압니다.”

“흠….”

전재형 회장의 태도는 기대와 달리 차분했다.

양 비서가 놀랄 정도로.

양 비서는 전재형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설명을 이었다.

“성국 군은 원래 레시피만 알려달라고 했는데, 태국 도련님이 햄버거집 사장님을 직접 모셔갔다고 들었습니다.”

“조건 없이는 아니지?”

“네. 조건은 태국 도련님이 요즘 한창 빠져있는 아플의 CEO인 찰리 잡스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전재형의 얼굴이 슬쩍 누그러졌다.

최근 몇 년 동안 전태국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신경이 잔뜩 곤두섰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태국이 녀석은 요즘 미국에서 어떻게 지내지?”

거기다 근황을 묻다니.

양 비서가 전태국의 근황을 미리 말하기 이전에는 물은 적도 최근에는 없었다.

“출석은 겨우 채우고 계십니다. 학점은 저희 삼전 샌프란시스코 팀에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어서, 졸업은 무리 없이 하실 것 같습니다.”

“성국이랑 여전히 같이 사나?”

“네,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재형 회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청첩장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바로 효진 그룹 구수영 회장의 장녀 예정의 결혼식 초대장이었다.

“곧 구 회장님 장녀 결혼식이지?”

“네, 뉴욕에서 7월 28일 토요일입니다.”

“성국 군도 오겠지?”

“거의 확실시 됩니다. 성국 군이 구수영 회장님 내외뿐 아니라 따님들과도 사이가 돈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탁- 탁-

전재형 회장은 청첩장을 책상에 두드리며 잠시 생각을 하곤 양 비서를 쳐다봤다.

“독일 출장 전후로 구수영 회장 장녀 결혼식 참석하게 일정 조율해 보게.”

“직접 가시게요? 태국 군이 대신 참석하기로 일정 논의해 뒀는데요.”

“청첩장을 받았으니, 나도 직접 가 봐야지. 준비하게.”

“네, 회장님.”

양 비서가 나가고 난 뒤 전재형 회장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전성국 옆에서 호구 노릇이나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딜을 하다니.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더니….

똘똘한 놈 옆에 있더니, 뭐든 배우는 모양이었다.

* * *

대통령 비서실.

박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실장님, 저 자료조사차 오늘은 외근 좀 다녀오겠습니다.”

“박 비서, 무슨 자료조사?”

“전성국 군 아버지가 잠실에서 유명한 보쌈집을 운영 중이시라네요. 거기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요.”

“아니, 아까는 인터넷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며?”

“인터넷으로 자료 조사할 게 있고, 직접 발로 할 게 있죠. 저 외근 후 바로 퇴근해도 되죠, 실장님?”

“내일 오전에 VIP께 보고 올리기로 했어.”

“걱정 마십시오! 내일 아침까지 완벽한 보고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박 비서는 얼른 가방을 들고 비서실을 나섰다.

박 비서가 나간 뒤로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실장님, 근데. VIP는 왜 그 사진 속 남자 조사하라는 거죠?”

“앞으로 대미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 같아서겠지.”

“그 남자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그리고 박 비서한테 그런 중요한 일 시켜도 되는 거예요?”

“박 비서가 고문관에다가 융통성이라고는 없잖아. 우리나라도 대선이 얼마 안 남았는데, 괜히 머리 굴리는 녀석보다는 박 비서 같은 애가 조사해서 올리는 게 선명하지.”

* * *

‘원아저씨 보쌈이라….’

박 비서는 수첩을 든 채 잠시 가게 앞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편의점에서도 종종 보던 <원아저씨 보쌈>의 원조집인 모양이었다.

‘대박집 아들이었네.’

이른 저녁이었지만, 사람들이 수시로 가게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이러다 자리도 없겠네.’

박 비서는 얼른 수첩을 챙기고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역시 대박집답게 종업원들의 인사 목소리도 컸다.

“혼자 오셨어요?”

“네.”

이때, 누군가 박 비서를 불렀다.

“박 비서님, 아니세요?”

누구지?

박 비서가 뒤돌아보자 거기에는 국민의 정서 당의 대변인이 앉아있었다. 이미 테이블에는 보쌈과 소주도 놓여 있었다.

“어… 대변인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허허. 가게 안 좀 봐보세요.”

박 비서는 그제야 가게를 휙 돌아봤다.

가게 안에는 이미 각 당에서 나온 정당인들과 주요 정재계 인사들의 비서들도 보였다.

“비서님, 혼자 오셨으면 저희랑 합석해요.”

이때, 민주주의당의 친한 비서관이 박 비서를 불렀다.

박 비서는 당황한 얼굴로 민주주의당의 비서관 자리로 홀린 듯이 가서 앉았다.

“비서관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짹짹이에 그 사진 보고 박 비서님도 오신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요….”

“지금 다들 당에서 물밑 작업 들어가고 난리도 아니에요. 딕 파웰과 버락 오마하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이 한국 사람. 거기다 천재 소년.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뭔지 아세요?”

“뭔데요?”

비서관이 가게 한편에 붙어있는 색바랜 사진을 가리켰다.

바로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방영 당시에 그룹 ‘저스트’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에 나왔던 그 아기가 전성국 군이잖아요.”

“아하…. 어쩐지 엄청 잘생겼더라니….”

“박 비서, 조사 좀 하고 나온 거 아니에요?”

“다 했죠. 근데 저거 하나 놓쳤네요. 우리 엄마, 아빠도 맨날 저거 보면서 저 아기 부모는 얼마나 좋을까 그러더니… 바로 이 집이었네.”

* * *

아빠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국제 전화 비싸다고 전화도 잘 하지 않는 아빠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집에 일이 있나?

나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아빠, 무슨 일 있어요?”

- 성국아, 집에 일은 없고… 어제 가게에 이상한 손님들이 많이 와서.

“이상한 손님들이라니요?”

- 어제 유독 양복에 넥타이 맨 사람들이 대낮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주문도 너무 많이 하는 거야. 두 명이 와서 대자 시키고, 술은 덤이고.

아빠는 어제의 상황을 설명했다.

- 그런데 나가는 길에 죄다 명함을 주고 가는 거야.

“명함이요?”

- 그래서 봤더니. 다들 무슨 정당 사람들이야. 심지어 대통령 비서실에서도 왔다 갔어. 성국아, 너 미국에서 무슨 사고 쳤니?

[사고라니… 아빠, 나 전성국이야.]

나는 얼른 아빠를 진정시켰다.

“아빠, 대선 앞두고 아마 정치권에서 제가 필요한 모양인데요. 앞으로 그 사람들 접근하면.”

- 접근하면?

“아들 일은 아들한테 직접 말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매상은 바싹 올리시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