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93화 (193/231)

제193화

아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 성국아, 이 아빠는 말이야….

[아빠, 또 잔소리하려고?]

- 아빠는 네가 정치랑은 절대 안 엮였으면 좋겠어.

“아빠… 내가 장담하는데, 난 절대 죽었다 깨나도 정치는 안 할 거야.”

[아빠, 내 꿈은 재벌이잖아!]

아빠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녀석, 뭐가 그리 단호해. 암튼 아빠는 우리 성국이 믿는다.

“응! 아빠!”

그러다 문득 엄마와 민국이 지희 안부가 궁금했다.

“아빠… 이제 여름방학인데, 민국이는 형아 보러 미국 안 오고 싶대?”

- 엄마는 김미영 대표님이랑 이번 여름에 음식 경연 프로 제작 들어가서 바쁘네. 그리고 민국이는 연습생이니까, 그거 빠지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아. 하지만 다들 너 보고 싶어 하는 거 알지?

[뭐야, 전혀 모르겠는데….]

괜히 심통이 났다.

다들 바빠져서 이제 미국에서 외노자 생활하는 형은 안중에도 없는 건가.

- 성국아, 이번 방학 때는 네가 좀 들어와라. 아빠도 프랜차이즈 늘어나서 통 시간이 안 되네.

“짧게라도 여름 휴가 내볼게요.”

- 그래, 성국아. 휴가는 다시 이야기하자. 아이고, 아빠가 전화 또 너무 오래 했네. 요금 많이 나오겠다. 성국아, 아빠가 또 연락할게.

“응….”

나는 전화를 끊었다.

가족들이 모두 바쁘다니 마음 한편에 휑해졌다.

다들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좋은데….

앞으로 나이 먹을수록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드는 거겠지.

나는 괜히 발끝으로 바닥을 퉁퉁 내려쳤다.

이때,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국아!”

“왜요, 태국이 형.”

벌컥-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전태국이 상기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성국아, 너 혹시 정희 기억나?”

[아, 저번 생의 내 첫사랑 정희?]

“잘 기억 안 나는데요.”

나는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이번 생에서는 어릴 적에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기억 안 난다고 해도 상관없을 어린 나이였다.

“정희라고… 너보다 4살 많은 누나인데. 정희가 예리 누나랑 친하거든. 이번에 예정 언니 결혼식에 온단 소식을 접했어.”

“형, 그런 소식은 어디서 접하는 거예요?”

“도토리월드지. 정희는 아직 ‘페이스 노트’ 안 하거든. 암튼, 정희라고 그 집 아버지가 나랑 정희 엮어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내가 왜 이렇게 횡설수설하지.”

그 말인즉슨 전태국 마음속에는 아직 정희가 살아 숨 쉬고 있단 의미였다.

“형, 첫사랑이죠?”

물론 짝사랑.

“어… 어떻게 알았어?”

“여자에 관해서 그렇게 장황하게 오래 떠들 일이 없잖아요.”

“아, 그런가. 암튼 정희가 엄청 이뻤거든. 막 김태미, 김희성처럼 화려하게 이쁜 게 아니라 한 송이 백합 같다고 할까.”

“형… 요점만 말해주세요, 제발요.”

“정희한테 잘 보이려면, 결혼식에 가기 전에 옷도 사야 하고.”

“옷은 지금도 충분히 많잖아요.”

[역시 패션의 완성은 옷이 아니라 얼굴 아니겠어. 전태국]

전태국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나 성형 좀 할까? 코가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거든.”

[고작 그거 하나?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인데.]

암튼 성형까지 하겠다는 전태국을 말리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형, 예정이 누나 결혼식이 일주일 후인데 부기 안 빠지면 더 흉할 텐데요.”

“그러네.”

전태국은 어느새 내 방안을 심각하게 오갔다.

“암튼 성국아, 그날 넌 내 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해. 네가 내 옆에 있으면 나 그냥 오징어 되잖아.”

[뭐, 이건 해주지.]

“그럴게요. 최대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게요. 정희 누나랑 잘해 보세요.”

사실 이제 정희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예전에 사라졌다.

* * *

VIP는 박 비서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보고서 분량은 무려 A4 용지 13장에, 글자 크기는 10포인트였다.

VIP는 보고서를 보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니, 박 비서는 전성국 군에 대해서 위인전이라도 쓸 모양이야. 이렇게 조사를 많이 했나….”

“원래 박 비서가 모 아니면 도인 스타일이라서요.”

“진짜 그러네… 암튼, 박 비서 덕분에 내 이 전성국이라는 친구에 대해서는 잘 알겠네.”

VIP는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흠… 우선 이 집 아버지가 한다는 보쌈집 보쌈이 한번 먹어보고 싶고. 내 이 친구를 대통령 임기 끝나기 전에 한번 보고 싶은데….”

VIP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뗐다.

“이제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라 우리 쪽에서는 뭐든 신중해야 할 거니. 내 이 친구 조용히 만나보고 싶은데, 일정 한번 맞춰 보게.”

“네.”

* * *

“성국아, 정희가 뉴욕 대학교에서 패션 전공하거든.”

[응, 이미 아는 사실이야.]

저번 생에서는 나 따라서 뉴욕에서 공부한 거였는데, 이번 생에서도 어쨌든 뉴욕에서 패션은 전공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정희 아버지가 부산에서 건설로 좀 이름난 부자이긴 해도, 우리 삼전 집안이랑은 비교가 안 되잖아. 정희 아버지야 뭐 졸부 수준이지.”

이것도 이미 아는 사실.

“우리 엄마랑 정희 어머니랑 원래부터 좀 친해서 우리도 친해진 거였거든. 근데 그걸 이용해서 정희 아버지가 우리 쪽에 엄청 친한 척하고, 삼전이랑 잘 안다고 이름 팔고 다녀서 아버지가 완전 싫어했거든. 근데 IMF 때 부도까지 났어. 사실 그때 내가 막 정희 불쌍하다고 막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망해도 서민들 입장에서 불쌍한 정도는 아니지. 집사 딸린 단독 주택 살다가 60평 아파트로 옮긴 수준이니까.]

“그래서 우리 아빠가 삼전 건설 쪽에 일 하나 줘서 다시 좀 일으켜 세워줬어. 대신, 나보고 정희랑 어울리지 말라고는 했는데…”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고. 그전에도 너랑은 안 어울렸을 건데, 전태국.]

“왜 그런 거 있잖아. 말리면 누군가를 더 보고 싶고.”

[얼씨구.]

“막 더 그리워지고.”

[절씨구.]

나는 참다못해 보던 신문을 탁 덮었다.

그리고 살짝 창문 밖을 내다봤다. 옆으로는 하얀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나와 전태국은 지금 뉴욕 가는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 안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전태국은 정희를 만난다는 생각에 나름 다이어트를 해서 그동안 불어난 살도 줄이고, 피부 관리까지 열심히 받았다.

그리고 비행기에 타면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정희 이야기만 떠들어댔다.

“형….”

“왜 성국아?”

“정희 누나 이야기 좀 그만하면 안 될까요?”

“내가 그렇게 많이 했어?”

“형, 지난 일주일 전부터 시작해서 오늘 지금 이 순간까지 입만 열면 정희 누나라는 사람 이야기만 했어요.”

“내가 그랬나….”

나는 손들 들어서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그리곤 위스키 한 잔을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저희 회사 법규상 미성년자에게는 술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 말고요. 제 옆에 이분이요. 나이는 23살입니다. 술 당연히 드셔도 되겠죠?”

“네, 가져다드릴게요.”

전태국은 손사래를 쳤다.

“성국아, 나 술은 괜찮아.”

“형, 뭐든 긴장하면 제일 나쁜 거거든요.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오히려 너무 많은 기대를 가지고 만나게 되면 긴장해서 실수하기 십상이에요. 제발 마음 편하게 안정제를 먹든, 지금 제가 주문한 위스키를 한 잔만 마시든 하세요. 대신 딱 한 잔만요.”

“어… 네 말 듣고 보니 그러네. 성국아, 딱 한 잔만 할게.”

그리고 나는 전태국이 절대 한 잔으로 끝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 * *

“안 돼에!”

전태국은 비명 소리와 함께 옆방에서 깨서 달려왔다.

“성국아, 나 얼굴 장난 아니게 부었잖아.”

“형, 어서 러닝머신이든 센트럴파크든 뛰어서 부기 빼세요.”

“결혼식까지 얼마나 남았지?”

“2시간이요!”

전태국은 대답도 없이 그대로 호텔을 나섰다.

나는 오래전에 산 슈트를 입고, 시간을 확인했다.

뉴욕으로 오기 전 한 남자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그 사람은 바로 VIP의 비서실에서 일한다고 자신을 밝혔다.

효진 그룹에 문의해서 조사해보니 실제로 VIP 비서실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가게에는 아직도 정계 사람들이 찾아와서 눈도장을 찍고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도 분명 내게 뭔가를 원해서 찾아온 게 분명했다.

* * *

센트럴파크.

나는 그늘에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을 기다렸다.

약속 시간 5분 전.

선글라스를 끼고, 한 손에 신문을 말아서 든. 누가 봐도 딱 관광객 포스가 느껴지는 까만 머리의 남자가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더니 다가왔다.

“저… 전성국 군 맞으시죠?”

“네, VIP 비서실에서 나오신 거죠?”

“저는 VIP 비서실의 박성희 비서라고 합니다.”

“전성국입니다.”

박성희 비서는 나를 약간 감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와… 저 어릴 적에 그 프로 너무 즐겨 봤거든요.”

“비서님도 어리셨을 텐데요?”

“그러니까요. 어릴 적에 부모님이 그거 보면서 저 집은 좋겠다, 아들이 이뻐서. 어머, 저 집은 저 어린 나이에 아들이 돈도 많이 벌고 좋겠다. 맨날 그러셔서 제 인생의 트라우마 같은 프로그램이었어요.”

딱 봐도 눈치는 없는 스타일.

박성희 비서는 얼른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다시 인사드릴게요. VIP 비서실 비서관 박성희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의는 깍듯한 편.

“반갑습니다. 죄송하지만, 전 명함은 없어서요.”

“괜찮습니다. 성국 군이야 얼굴이 명함 아닙니까.”

“제가 1시간 후에 결혼식이 있어서요.”

“혹시 구예정 결혼식 말씀하시는 거죠?”

“이것도 조사하셨나요?”

“사실은 저도 그 결혼식 갑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박성희 비서를 쳐다봤다.

효진 그룹이랑 연결된 사람인가?

“예정이랑 초등학교 동창이거든요.”

“일부러 오신 건 아니네요?”

“겸사겸사죠. 그럼, 호텔까지 걸어가시면서 이야기 나누실까요?”

“그러시죠.”

우리는 센트럴파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박성희 비서는 자신이 나를 얼마나 조사했으며, 조사하러 보쌈집까지 갔었다는 이야기를 늘었다.

박성희 비서는 눈치 없지만 예의는 바르고, 굉장히 수다스러운 편이기도 했다.

“비서님, 오늘 저에게 전달할 이야기가 있지 않으세요?”

“아하, 맞다!”

박성희 비서는 내게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뇌물 아니고요. 비행기표입니다. 광복절 전후로 한국 한번 들어오시죠. VIP께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우선 비행기 표는 됐습니다.”

“네에? 이거 퍼스트 클래스인데요?”

“그 정도 돈은 저도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은 제가 정해서 연락드려도 될까요?”

[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만나자고 막 넙죽 달려가는 그런 사람 아니야.]

어차피 나의 베이스는 미국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할 사업을 생각하면 밉보일 일은 없지만, 쉽게 보일 이유도 없었다.

박성희 비서관이 난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 그게 제가 직장에 가서 할 말이 없어지네요.”

“VIP께 전하세요. 비행기표는 마음만 받겠다. 그리고 일정은 회사 스케줄에 맞춰야 해서 충분한 논의 후에 한국 방문은 정하겠다고요.”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는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재계의 축소판과 같은 모습이었다.

낯익은 정재계 인사들이 보였고, 그중 가장 낯익은 전태국이 나를 보더니 알은척을 했다.

“성국!”

“형, 오늘 서로 멀리 있기로 했잖아요.”

“아, 참. 이따 보고, 내가 정희 만나면 누군지 알려줄게.”

“네, 데이트 잘하세요!”

박성희 비서가 놀라는 게 눈에 보였다.

“성국 군, 제가 조사하면서 삼전 그룹 후계자 전태국 군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요. 엄청 친한 사이네요.”

“저희 같은 집에서 지내는데, 그것까지는 조사 못 하셨어요?”

“도대체 대한민국을 비롯해서 미국까지 정재계 주요 인사들과 어떻게 다 알고 지내시는 거예요?”

[그거야, 다 내가 잘나서지.]

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성국이 아니야?”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심장이 살짝 뛰기 시작했다.

[왜 이러지? 설마 아직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건가…]

나는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정희야!”

이때, 전태국이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정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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