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눈앞에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의 20대 정희가 서 있었다.
결혼식에 맞춰 깔끔하게 입은 원피스 차림의 정희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정희가 전태국을 향해서 몇 걸음 걸어왔다.
물론 전태국이 속절없이 더 빨리 다가갔다.
[저러니 밀당이 안 되지….]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발걸음을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정희도 봤고, 전태국과의 약속대로 오늘 결혼식장에서는 최대한 서로 떨어져 있을 계획이다.
“비서님, 저희는 예정 누나 먼저 보죠.”
“당연히 봐야죠.”
* * *
“예정 누나!”
“성국아!!!”
신부 대기실에 앉은 예정 누나가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예정아, 결혼 축하해!”
“박성희! 어쩜 내 결혼식에 딱 맞춰 출장을 오니. 근데 성국이랑 어떻게 아는 거야?”
“성국 군이랑 볼 일이 좀 있어서.”
예정은 얼른 눈치를 챈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내게 가까이 오란 손짓을 했다.
“성국아, 아마 너 만나러 여기 온 사람들도 많을 거야. 곤란할 때는 우리 아버지 뒤에 숨어. 알지?”
“고마워요, 누나.”
예정은 신기한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기 같던 성국이가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이제 너한테 성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해.”
“에이, 누나. 한번 동생은 영원한 동생이죠.”
“여전히 애교도 많고…. 참, 이따 애프터 파티에서 신랑 소개해줄게.”
“기대할게요.”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신부 대기실에서 빠져나왔다.
박성희는 계속해서 내 옆에 붙어 있었다.
“박 비서님, 예정 누나 친구인데 동창들 안 만나세요?”
박성희는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사실은 오늘 결혼식장에서 성국 군에게 접근하는 정재계 인사 체크하는 것도 제 일이라서요.”
나는 박성희랑 같이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박 비서님, 그런 것을 저한테 알려주시면 어떻게 해요.”
“아, 그런가요!”
당황한 박성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박 비서님, 걱정 마세요. 전 한국 정치에는 관심 없어요.”
이때, 전태국과 정희가 다시 앞에서 나란히 걸어왔다.
[피하기 쉽지 않네….]
전태국은 나를 보더니 얼른 사라지란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하필 그때 정희가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분명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희는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혹시 성국이? 맞지?”
“네… 안녕하세요.”
나는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나 기억 안 나지?”
[당연히 기억하지.]
하지만 시치미를 뗐다.
“죄송해요.”
“아니야. 우리가 워낙 어릴 적에 만났어. 예전에 제주도에서도 봤는데….”
옆에서 전태국이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알았어, 사라져줄게.]
나는 얼른 정희에게 인사를 했다.
“전 좀 다른 약속이 있어서요.”
“어머, 미안. 바쁘지?”
“죄송해요.”
“참, 뉴욕에는 며칠 머물러?”
“이틀 정도 더 머물 거예요.”
“그럼, 내일 점심 같이 먹을래?”
이건 내가 예상한 전개가 아니었다.
당황한 것은 전태국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은….”
“성국이 나랑 점심 먹을 거야. 정희야, 같이 먹자.”
전태국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어머, 그래? 나야 좋지. 그럼, 우리 셋이서 같이 먹을까?”
나는 박 비서를 은근히 쳐다봤다.
사실 박 비서는 좀 전에 정희를 로비에서 봤을 때, 넋이 살짝 나간 얼굴이었다.
나는 얼른 박 비서를 소개했다.
“여기는 한국에서 오신 분인데요. 저랑 뉴욕에서 일이 좀 있어서요. 괜찮으시면 내일 점심도 같이 먹어도 될까요?”
“나는 괜찮아.”
정희가 괜찮다고 하자, 전태국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저래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럼, 전 구수영 회장님이랑 예리 누나한테 인사하러 가야 해서요.”
“어, 잘 가고 성국아, 내일 봐.”
“네.”
나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정희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저번 생에서는 그런 정희를 차지하는 게 남자의 세계에서 승리하는 기분이라서 좋았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더 주목받는 사람이니까!
* * *
구수영 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 수많은 인사들이 내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국민의 정당에서 나온 김수호입니다.”
정치인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건네는 인사부터.
“성국 군! 나 알지?”
다짜고짜 알은척하는 사람까지.
“처음 뵙는데요. 죄송합니다. 제가 회장님께 인사드리러 가는 길이라서요.”
나는 칼같이 거절하고 구수영 회장에게 다가갔다.
구수영 회장은 온화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성국 군!”
“회장님, 축하드려요.”
“겨우 첫째 하나 보내는데도 이렇게 힘이 드네. 바쁜데, 여기까지 와줘서 너무 고마워.”
“예정 누나 결혼식인데, 당연히 와야죠.”
구수영 회장은 조용히 다가오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자네 소개해달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내 생각에는 애프터 파티는 안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한국에서 정치하는 사람들 괜히 얼굴 트면 엄청 귀찮게 굴거든.”
진심으로 해주는 조언이었다.
“네, 그럴게요.”
구수영 회장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 * *
센트럴파크의 벤치.
나와 박성희 비서는 나란히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참, 유명인의 삶이 좋은 건 아니네요. 호텔 결혼식에서 밥도 못 먹고 여기서 샌드위치라뇨.”
“박 비서님은 식사하시라니까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성국 군이 누구를 만나는지 계속 주시해야 한다니까요.”
딱 봐도 고문관 스타일.
“박 비서님, 회사에서 박 비서님 평판 좀 궁금한데요.”
“그건 갑자기 왜요?”
“고지식하신 게, 회사에서 일은 잘하지만 동료한테 답답하단 이야기 좀 많이 들을 것 같아서요.”
“성국 군, 내 회사 생활 봤어요?”
박성희 비서는 샌드위치를 먹다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 회사 운영하잖아요.”
[저번 생에서는 삼전. 이번 생에서는 ‘페이스 노트’. 이만하면 사람 보는 눈이야 좀 있지.]
나는 무심히 샌드위치를 깨물었다.
“아, 그게… 다들 제가 말하면 좀 답답해하는 표정을 짓긴 해요. 일을 해서 올리면 좋아는 하고요.”
“서울대 나오셨어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작두 타세요, 성국 군?”
박성희 비서가 화들짝 놀랐다.
“박 비서님 ‘페이스 노트’ 들어가서 봤죠. 서울대 인문계 수석 입학. 거기다 청와대 비서실 근무. 좀 특이해서요.”
박성희 비서는 예정과 같은 초등학교를 나올 만큼 어릴 적부터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부모님은 사법고시나 이런 거 보길 원하셨는데요. 또다시 공부할 생각을 하니 답답하더라고요. 사회 경험 좀 하고 사시를 보든 하려고요.”
“흠…”
오래 기업을 운영하다 보니, 고지식한 사람이 오히려 더 좋을 때가 많았다. 오너 입장에서는.
“박성희 비서님, 혹시 일 없어지면 ‘페이스 노트’에 지원해 보세요.”
“네에?”
[다음 정권 다른 당에서 가져가. 지금 비서실 사람들 다 물갈이될 거야.]
“박성희 비서님 스펙이면 충분히 입사 가능하죠. 그리고 사회 경험하시려면 더 큰물에서 하셔야죠. 안 그래요?”
“그, 그게….”
“생각해 보세요.”
나는 다 먹은 샌드위치 포장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비서님, 저 오후에는 데미안 허스키 전시 보러 갈 건데요. 거기도 같이 가실래요?”
“저 따라가도 돼요?”
“단, 이건 보고 하지 마세요.”
나는 지금 박성희 비서를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지금 그는 어쨌든 내 사람이 아니라 VIP 쪽 사람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보고는 하겠습니다. 단, 객관적인 사실만요.”
내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박성희 비서는 어쨌든 지금은 충성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었다.
* * *
데미안 허스키의 <성장>이라는 전시 포스터가 갤러리 앞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제 데미안 허스키는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어 있었고, 전시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박성희 비서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성국 군이 그림에도 관심 있는 줄 몰랐어요.”
“데미안 아저씨랑은 친구예요.”
“네에?”
“미국에서 전시하실 때마다 초대장 보내주시는데, 시간 안 맞아서 못 보다가 오늘은 시간이 됐네요.”
이때, 한쪽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데미안 허스키가 등장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소리가 난 쪽으로 걸어갔다.
데미안 허스키가 파란 머리로 등장해서 그림에 대해서 막 설명을 시작하려는 찰나 같았다.
이때, 나를 발견한 데미안 허스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성국! 드디어 온 거야?”
마이크 때문에 갤러리 안에 대화가 다 울려 퍼졌지만, 데미안 허스키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데미안.”
“여러분 제가 아주 재미있는 작품 하나를 지금부터 보여드릴게요.”
순간, 갤러리 안은 술렁였다.
예고도 없는 데미안 허스키의 작품이라니…. 다들 기대하는 눈치였다.
데미안은 얼른 내게 손짓을 했다.
“제가 아주 오래전에 말이죠. 그때 막 좀 뜨기 시작한 신인 작가 시절이었어요. 엄청 귀여운 꼬맹이를 홍콩 아트페어에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얼마 후에는 미국에 유학을 왔더라고요.”
나는 데미안 허스키 옆에 자연스레 섰다.
데미안은 나를 마치 조각상처럼 주시하며 빙빙 돌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 아이가 이제는 ‘페이스 노트’의 창업자이자 대표가 됐고요. 얼마 전에는 짹짹이를 뜨겁게 달궜던 딕 파웰과 버락 오마하의 사이에 서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눈앞에 서 있죠. 제 작품 하나도 버겁게 들던 아이가 이제는 저보다도 키가 큰 청년이 되었습니다. 불과 10년 사이에요. 이 작품이 바로 제가 오늘 발표할 ‘성장’이라는 작품입니다.”
역시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데미안 허스키는 자신의 특기인 새로운 해석을 통해 나를 작품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낯선 작품 공개에 웅성거렸고, 데미안 허스키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저랑 이 친구는 이미 ‘페이스 노트’ 친구거든요. 제가 오래전에 성국 군에게 너를 모델로 작품을 하나 만들고 싶다는 연락을 했어요. 그러자 이 친구가 기꺼이 수락을 했고요. 우리는 ‘페이스 노트’를 통해서 수많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성장’이라는 주제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장’이라는 이번 제 전시의 콘셉트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게 전성국 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죠.”
데미안 허스키의 말처럼 우리는 ‘성장’이라는 주제를 정하고 깜짝 발표를 할 예정으로 이 전시를 준비했다.
예정 누나의 결혼식 때문에 뉴욕에 올 수 있는 시기에 전시 일정을 일부러 잡기도 했다.
“아마 성국 군은 앞으로 계속 성장해나갈 겁니다. 우린 사람이니까요.”
그 말과 동시에 뒤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우리가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는 전 과정이 담긴 동영상이 나왔다.
데미안 허스키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아마 여러분은 이 작품을 엄청 사고 싶어 하실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제 작품 중 누구도 사지 못하는 유일한 작품일 겁니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어떤 이는 이해하고, 또 어떤 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작품 그 자체로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생수를 마셔댔다.
박성희 비서는 난감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군, 이런 작업은 대체 언제 한 거예요?”
“쉬는 시간에요.”
나는 빙긋 웃었다.
“성국아….”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희?
내가 뒤돌자 그 자리에는 정희가 혼자 와 있었다.
“누나, 어떻게 오셨어요?”
“데미안 허스키 팬이거든. 전시한다고 해서 결혼식 끝나자마자 달려왔지. 근데 이런 퍼포먼스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태국이 형은요?”
“전재형 회장님이 오시는 바람에 거기 갔어.”
안 온다는 전재형 회장까지 오다니….
역시 한국에서 나를 주시하는 것은 분명했다.
옆에 선 박성희 비서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음. 흠.”
나는 박성희 비서와 정희를 번갈아 봤다.
저번 생의 내 첫사랑이었던 정희는 이제 더는 내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에는 여전히 여신 같은 존재였다.
“누나, 전 데미안 허스키랑 얘기할 게 있어서요. 여기 아까 보신 박 비서님이랑 이야기 나누고 계실래요? 끝나고 셋이서 같이 저녁 먹어요.”
“나야 너무 좋지.”
“박 비서님, 부탁드려요.”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뭘 최선을 다한다는 건지.
나는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정희와 박 비서라….
어쩌면 저번 생에서 나 만나서 마음고생만 한 정희에게 좋은 남자를 소개해주란 계시인지도 모른다.
나는 생수를 마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게 바로 성장이란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