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전재형 회장은 아들 전태국을 마주하고 있었다.
조용한 스위트룸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전태국은 좋아하는 와인에 입도 대지 못했다.
그동안 전태국이 미국에서 하고 다닌 일만 봐도 전재형 회장의 호통이 떨어질 게 뻔했다.
아플 스토어에서 나오는 장면이 수시로 각종 가십지에 오르고 내렸다.
기사 제목에는 언제나 삼전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이 강조됐다.
거기다 얼마 전에는 성국이의 부탁으로 한국에서 미군 부대 앞 햄버거집 사장님까지 데리고 왔다.
전재형 회장은 말없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전태국을 늘 그렇듯 아버지가 아니라 후계자로 바라봤다.
“태국아….”
“네, 아버지.”
“학교는 다닐 만하니?”
‘불길한데….’
전태국은 좁은 어깨가 더 움츠러들었다.
전태국이 학교 제대로 안 나가는 거야 전재형 회장도 잘 알 것이다.
학점이나 시험도 샌프란시스코의 삼전 그룹 직원들의 도움 없이는 메꾸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게… 학교야, 뭐 학교죠. 다니고는 있습니다.”
“그래… 학교가 학교지. 졸업장만 따거라. 졸업장으로 MBA 들어갈 학교 찾아보면 되지.”
전태국은 더 불길해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아버지 입에서 나온 적이 없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 어디 아프세요?”
전태국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이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전재형 회장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탁-
전재형 회장이 와인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오늘따라 컸다.
전태국은 괜히 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스위트룸.
문밖에는 의전팀이 대기 중이었지만, 이 방안에는 전재형 회장과 전태국 단둘이었다.
저번에 못 맞은 매를 맞을 수도 있었고, 와인잔 하나 날아오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설마 구급차 밖에 대기하고 있는 거 아니겠지?’
전태국은 목으로 굵은 침을 삼켰다.
하지만 오늘 전재형 회장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게 더 이상해서 미칠 것 같은 전태국이었다.
전재형 회장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뗐다.
“태국아, 원래 학교보다 사회에서 배우는 일이 더 많은 법 아니냐.”
‘아버지 진짜 어디 아프시나. 맨날 학교에서 공부도 못하는 놈이 사회에서 일등 할 수 있을 것 같아! 소리치시더니 오늘 왜 이러시지. 진짜….’
이미 전태국은 손에 땀이 흥건했다.
전재형 회장도 전태국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태국아, 성국이랑 지내는 거 어떠니?”
전태국은 얼른 머리를 돌렸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이 뭐지?’
순간, 전재형 회장이 불쑥 물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 말고.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딸꾹.
그 바람에 전태국은 딸꾹질까지 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유리잔 몇 개 날아왔을 시간인데, 전재형 회장은 끈질기게 참았다.
전태국은 이 기다림이 오래되지 않을 거란 것을 직감하고 물을 벌컥 마시고는 대답했다.
“사실 아버지…”
“…….”
“전 성국이랑 지내는 거 너무 좋습니다.”
“이유는?”
“성국이는 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매사 행동하는 것도 분명하고, 가식이 없거든요. 제가 삼전 그룹 후계자라고 하면 다들 저에게 잘 보이느라 난리인데. 성국이는 그런 것도 전혀 없고, 오히려 제가 뻘소리하면 무시할 때도 많고요.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움도 줘요.”
“흠….”
전재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있으면 든든하다고 할까요. 저한테 형이 있었다면 이런 형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건 진심이었다.
성국이의 성격은 전재형 회장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매사에 차갑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모든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다른 것은 성국이는 가족들 때문인지 따뜻한 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재형 회장은 전태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알았다… 그냥 난 네가 요즘 어찌 지내는지 궁금했구나. 오늘도 성국이랑 호텔에서 보낼 거지?”
“네, 아버지.”
“그만 가봐라. 난 새벽에 비행기로 다시 독일로 넘어가야 하거든.”
“네, 안녕히 주무세요.”
전태국은 살짝 얼떨떨한 얼굴로 스위트룸을 나왔다.
늘 있던 아버지의 폭언도, 폭력도 없었다.
* * *
갤러리를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일부러 피곤한 척을 했다.
“전 오늘 일이 많아서 피곤하네요. 박 비서님, 정희 누나랑 저 대신 식사 하실래요?”
“네에?”
박성희 비서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뭘 당황하고 그래. 원하고 있는 거 다 알아.]
정희는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표정 다 알고 있다.
정희는 박성희 비서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전 미성년자라서 같이 갈 식당도 한계가 있을 거예요. 두 분이서 편하게 드세요. 전 호텔가서 룸서비스나 시켜 먹을게요.”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가요.”
박성희 비서가 나를 잡았지만, 나는 거절을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 * *
호텔 방안은 캄캄했다.
달칵. 스위치를 켜자 침대 위에 앉아있는 전태국이 보였다.
“형, 왜 불도 안 켜고 계세요?”
“어… 그냥….”
전태국은 평소와 달리 침울해 보였다.
“형, 저녁 룸서비스로 시키려고 하는데… 뭐 드실래요?”
“스테이크.”
“같이 시킬게요.”
“응.”
정말 평소와 달리 대답도 단답형이었다.
“형,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응. 그게 너무 이상해서. 솔직히 나 요즘 학교야 졸업할 수 있는 수준으로 겨우 다니고, 과제는 삼전 직원들이 해주잖아. 시험 문제도 예상해주고. 아버지가 그런 거 다 아실 거란 말이야. 근데 아무 말도 안 하셔. 그저 MBA 될 성적만 유지하래. 그리고 예전에는 너랑 잘 지내는 거 정말 싫어하셨거든. 그 부분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하시네요. 정말 이상해.”
난 당연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재형 회장은 전태국이 지금 나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페이스 노트’를 이끌고 미국의 정치인들과 친한 날 옆에 두는 게 삼전의 앞날을 위해서도 괜찮다고 다시 평가한 게 분명했다.
나는 전태국의 어깨를 토닥였다.
“형, 밥이나 먹죠.”
“성국아, 내가 아버지한테 그 말도 했어.”
“무슨 말이요?”
“네가 꼭 든든한 형 같다고.”
[저번 생에서 형이긴 했지. 그땐 든든하지는 않았어. 너 깔아뭉개는 게 내 일이었거든.]
전태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어. 내가 아니라 네가 더 우리 아버지 아들 같다는.”
[내가 더 전재형 회장을 닮긴 했지. 물론 전재형 회장보다 더 낫기도 하고….]
나는 얼른 화재를 돌렸다.
“형, 내일 정희 누나랑 어디서 점심 먹을까요?”
“내가 정말 어렵게 예약해 뒀어. 참, 성국아. 내일 밥 먹고 나랑 정희만 센트럴파크 좀 걸으려고 하는데, 그 박 비서랑 좀 빠져줘라. 알았지?”
“그럴게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 같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도 있으니….
* * *
전태국이 예약한 레스토랑은 이미 예약이 1년 전부터 차 있기로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내가 저번 생에서 즐겨 찾던 레스토랑이기도 했다.
전태국은 약간 초조하게 정희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안 오지….”
“형, 정희 누나랑 연락 안 했어요?”
“출발한다고 했어.”
“아직 약속 시간 안 됐으니, 맞춰 오겠죠.”
그 순간, 레스토랑 입구에서 정희와 박성희 비서가 나란히 들어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머금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손을 잡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얼른 전태국의 얼굴을 살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기대감으로 초조해했던 전태국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있었다.
아마 내가 느낀 것을 전태국도 느낀 모양이었다.
“오빠, 먼저 왔네.”
“어… 좀 일찍 나왔어.”
정희가 테이블에 다가가자 박성희 비서는 자연스럽게 의자까지 빼줬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전태국의 속은 안 봐도 뻔했다.
“두 사람 어떻게 같이 오는 거야?”
“박 비서님 호텔이 내가 사는 콘도 바로 옆이더라고. 어차피 같이 점심 먹을 거 만나서 오자고 했어.”
“어, 언제?”
전태국은 최대한 조심스레 물었지만, 누가 봐도 캐묻는 거였다.
“어제 같이 저녁 먹고 이야기했거든.”
“저, 저녁도 같이 먹었어?”
[전태국, 진정해. 둘이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러자 정희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성국이가 어제 피곤하다고 일찍 들어간다고 해서 박 비서님이랑 같이 먹었어. 오빠, 박 비서님. 서울대 인문계 수석으로 입학하셨대.”
정희는 전태국의 속도 모르고 종알거렸다.
아니, 어쩌면 다 알고도 종알거리는지 모른다.
정희의 아버지로 말하자면 정말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저번 생에서도 나와 어떻게든 엮어주려고 안달하는 통에 골치가 아팠는데,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일 게 뻔했다.
사람 안 바뀌니까.
곧이어 주문한 코스 요리가 나왔지만, 전태국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와인만 몇 잔 마셨다.
그에 반해서 정희와 박성희 비서는 감탄하면서 소스까지 아주 알뜰히도 먹었다.
[전태국, 어서 찰리 잡스나 만나게 해줘야겠네….]
이때, 전태국이 쓸쓸한 얼굴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내가 갑자기 술을 마셔서인지 어지러워서. 먼저 일어날게. 세 사람 맛있게 먹고 나와.”
“오빠, 많이 안 좋아?”
“아니야. 조금 쉬면 좋아질 거야.”
“무리하지 말고.”
“고마워, 정희야.”
“아… 계산은 내가 할게.”
전태국은 그렇게 호구가 되어 등을 보이고 자리를 떠났다.
* * *
식사 내내 정희와 박성희 비서는 작은 일에도 배시시 웃으며 아주 눈꼴이 시었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 꿋꿋이 앉아 마지막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이 집 내가 저번 생에서 정말 좋아했던 집이라고….]
박성희 비서가 미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요.”
“박 비서님, 편하게 다녀오세요.”
“정희 씨,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요.”
[내 말이….]
그렇게 나와 정희만이 자리에 남겨졌다.
정희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성국아…. 고마워.”
“뭐가요?”
나는 모른 척 물었다.
“박 비서님 나한테 일부러 소개해준 거지?”
“일부러는 아닌데요.”
[완전히 고의는 아니라고…. 95프로의 고의와 5프로의 우연이랄까.]
정희는 맑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태국이 오빠가 나한테 관심 있어 하는 거 아는데, 많이 부담스러웠거든. 태국이 오빠 어머니가 나 엄청 싫어하셔서.”
[잘 알지.]
철의 여인은 내가 정희랑 만날 때도 얼굴만 반반하지 천박한 집안 출신이라고 늘 욕을 하셨다.
“태국이 오빠의 친절이 고맙지만, 나도 마음이 없고…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네가 박 비서님 소개해줘서 잘된 것 같아.”
“혹시 박 비서님 이용만 하는 건 아니죠, 누나?”
“좋은 분인 것 같아. 근데 난 뉴욕에서 계속 공부해야 하고… 박 비서님은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될 거예요.”
정희는 그 말에 그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희, 나 같은 나쁜 남자가 취향인 건 아는데. 이번 생에는 좋은 남자 만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 * *
나는 센트럴파크의 작은 벤치로 걸어갔다.
거기엔 이미 전태국이 세상 쓸쓸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었다.
“형, 여기 있었네요.”
“응…. 정희는 갔어?”
“네, 형 덕분에 밥 잘 먹었어요.”
“응…. 하아….”
전태국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성국아, 정희랑 그 비서랑 같이 나갔어?”
“네, 둘이 브로드웨이 가서 뮤지컬 본다는 것 같아요.”
“…내가 VIP석 끊었다고 같이 가자고 해도 바쁘다며 안 갔는데….”
“형….”
“왜?”
전태국이 슬픈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정희 누나랑 인연이면 언제든 어떻게든 다시 만나지 않겠어요?”
“성국아, 내가 정희 기다리면 정희가 날 한 번쯤 뒤돌아봐 줄까?”
“제 생각에는요…. 형, 힘들겠지만 정희 누나는 그만 잊으세요.”
[내가 네 미래 말해줄게. 넌 5년 후쯤에 대한민국에서 국민 조미료로 유명한 식품 재벌과 결혼할 거야. 아이 영어 선생님이랑 바람피워서 이혼도 하고… 그러니까, 어차피 정희는 네 짝이 아니야.]
나는 슬픔에 잠긴 전태국의 등을 토닥였다.
“형, 이렇게 다 어른이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