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기 전날, 정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정희에게 전화번호를 준 적이 없었지만, 누구에게 내 연락처를 받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정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성국이 번호 맞지?
“네, 누나.”
- 박 비서님이 네 연락처 알려줬어.
예상한 대로였다.
“누나, 근데 저한테는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했다.
저번 생의 기억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 내일 샌프란시스코 가지? 샌프란시스코 비행기 몇 시야?
“오후 세 시요.”
- 그럼, 오전에 나 좀 볼 수 있을까?
“아침 드실래요? 여기 코너에 베이글 집 맛있다고 하는데, 저 한 번도 못 먹었거든요.”
- 나 그 집 잘 알아. 그 집 엄청 좋아하거든.
[당연히 알지.]
사실은 저번 생에서도 정희가 엄청 좋아하던 베이글 맛집이었다.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한 뉴욕 생활 중에 내가 눈뜨면 하는 일이 센트럴파크에서 조깅을 하고, 그 베이글 집에 가서 연어 베이글과 커피를 사서 돌아오는 일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잠시 저번 생의 추억에 잠겼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때, 전태국이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아마 내 전화를 우연히 들은 모양이었다.
“혹시 지금 통화한 거, 정희야?”
“네, 형.”
“내일 보자는 거야?”
“네.”
“너만?”
“네…. 아마 뭐 따로 할 이야기가 있나 봐요.”
전태국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원래 사람 마음이라 게 카펫 걷듯이 한 번에 걷어지는 게 아니었다.
전태국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메시지도 없는데….”
“형, 뭐 전해줄 말 있으면 하세요.”
“…정희한테 내가 많이.”
[그건 아니지! 정말, 지금 고백하겠다고? 이 분위기에서!]
나의 냉철한 이성이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형, 그건 절대 안 돼요. 고백도 안 하고, 바로 차이고 싶으세요?”
전태국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래… 이 말은 일기장에나 써야겠어. 그럼, 정희한테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해.”
“적당하네요. 그렇게 전할게요.”
“응.”
전태국은 축 늘어진 어깨로 발까지 질질 끌면서 옆방으로 들어갔다.
근데, 정희가 도대체 나한테 할 말이 뭐지?
나도 모르게 뭔가 기대하는 또 이 느낌은 뭐지?
* * *
오전 9시.
베이글 집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 사이에 선 정희가 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정희는 아침에 봐도 이쁘네….]
“성국아, 여기.”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얼른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편하게 인사해.”
[편하게 대하다가 가까워질까 봐 그래.]
나는 일부러 박 비서 이야기를 꺼냈다.
“박 비서님이랑은 뮤지컬 잘 보셨어요?”
“응. 오늘 저녁에 한 편 더 보기로 했어. 박 비서님은 내일 한국 가시거든. 참, 뭐 먹을래?”
“전 누나가 먹는 걸로 먹을게요.”
“그래, 내가 알아서 시킬게. 커피 마시지?”
“네.”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정희를 기다렸다.
정희는 곧 베이글과 커피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여기 연어 베이글이 진짜 맛있어.”
[알지. 크림치즈 항상 두 배로 발라달라고 했잖아.]
나는 모른 척 한입 깨물었다.
“진짜 맛있네요, 누나.”
“다행이다. 입맛에 맞다니.”
“근데 누나 저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
사실 진짜 이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정희는 배시시 웃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저 미소에 남자 여럿 넘어갔었다.
“엄마한테 네 이야기를 했거든.”
[설마 내 쪽으로 노선 돌린 건가. 나 미성년자인데…. 그리고 나 이번 생에서는 그쪽이랑 엮일 생각이 추호도 없단 말이야.]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베이글을 연이어 먹었다.
“우리 엄마가 너 어릴 적에 제주도에서 본 거 기억하시더라고. 그때 많이 미안했다고, 밥 한번 사주라고 해서. 그때 우리 아빠가 너무 무례했지?”
“전 기억도 잘 안 나요.”
정희 아버지 무례하고 얄팍한 거야 저번 생에도 너무 잘 알아서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정희를 바라봤다.
“근데, 저 진짜 밥 사주려고 만나자고 하신 거예요?”
“응. 왜 그러면 안 돼?”
정희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만나자는 사람은 대부분 용건이 있거든요. 특히 밥 사주거나 뭘 줄 때는요.”
“성국아, 난 정말 그런 사람 아니야. 우리 엄마가 네 이야기하니까, 성국이가 너무 잘 자라준 거 같다고. 글쎄, 나보고 용돈 받은 거로 괜히 다른 데 쓰지 말고, 너 밥이나 만날 때마다 사주래.”
“진짜 밥만 사주려고 만나자고 하신 거예요?”
불쑥 진심이 나오고 말았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고!]
“진짜라니까.”
정희는 밝게 웃었지만, 내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한 건 왜일까.
정희는 여전히 순수한 20대였지만, 난 겉모습만 어릴 뿐 속에는 저번 생의 나까지 있어서일까.
뭐든 보이는 대로, 말하는 대로 믿지 못했다.
“성국아, 이런 말 안 믿길 수도 있겠는데… 난 어릴 적부터 널 보면 왠지 엄청 친근했거든. 내 기억에는 그래. 뉴욕에서 이렇게 큰 너를 봐도 낯설지도 않고 항상 봐온 동생 같아.”
[동생이라….]
마음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난 그냥 종종 밥 잘 사주는 누나 정도로 기억해줘. 알았지?”
“네, 누나….”
이때, 정희가 내 등 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저번 생에서는 나를 향해 짓던 저 환한 미소였는데, 하지만.
“비서님.”
이번 생에서는 박 비서를 향한 것인 모양이다.
“성국 군, 오늘 샌프란시스코로 간다고요?”
“네.”
“VIP에게는 비행기 티켓 거절하고 다시 일정 잡는다고 이야기는 드렸어요. 한국 들어올 날짜 좀 정해지셨나요?”
“원래 처음에 원하셨던 광복절 전후로 들어갈게요. 일정은 그때 조율하죠.”
“그렇게 보고 하겠습니다!”
나는 베이글 마지막 조각을 입에 밀어 넣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게 맞는 현실이지.]
나는 쿨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이만 가볼게요. 밥 잘 먹었어요, 누나.”
“응, 성국아 다음에도 누나가 밥 살게.”
나는 고개만 끄떡하곤 뒤를 돌았다.
뒤에서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정희와 박성희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희야, 행복해. 예나 지금이나 너와 나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 * *
여름의 푸르른 뉴욕이었지만, 내겐 약간 쓸쓸한 느낌이었다.
정희 때문일까?
그것보다는 정희는 여전히 순수했지만, 그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나 때문이 더 컸다.
[이 심정을 알아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문득 나는 방무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무혁은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성국, 오랜만이야.
“잘 지내시죠? 민국이랑 정우 어떤지 궁금해서 연락드렸어요. 제안드릴 일도 있고요.”
나는 우선 괜히 다른 핑계를 댔다.
- 둘 다 아주 열심이야. 실력도 잘 늘고 있고…. 성국아, 무슨 제안할 게 있다는 거야?
“민국이랑 정우 둘 다 방학일 텐데, 미국으로 단기 연수 보내시는 건 어떠세요? 견문도 넓힐 겸 해서요.”
- 그게….
방무혁은 곤란해했다. 재정적인 이유 때문일 게 뻔했다.
“비용은 제가 댈게요. 광복절 전후로 저도 한국 들어가는데, 같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정말 그래도 돼? 안 그래도 우리가 힙합 그룹 쪽으로 라인을 잡아서 요즘 민국이랑 정우랑 그쪽 음악에 푹 빠져 있거든. 한 번 가면 좋은 경험 될 거 같아.
“그럼, 일정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역시 이 쓸쓸한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는 건 가족뿐이었다.
이때,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1년 후쯤 드라마 OST로 나와서 대 히트를 하는 곳이다.
“아저씨, 작업 중이셨어요?”
- 어, OST 작업이 하나 나와서 곡은 대충 썼는데… 대체 가사가 영 안 나오네.
“아저씨, 그 노래 이별 노래에요?”
- 응. 좀 애절한 구절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요즘 연애를 못 했더니 감성이 안 따라오네. 성국아, 아저씨도 늙었나 봐.
“아저씨, 제가요. 마음이 좀 그렇거든요.”
- 성국아, 너 연애했어?
[저번 생의 첫사랑을 만났어, 방무혁. 나는 그 사람하고 추억이 참 많지만, 그 첫사랑은 아무것도 몰라.]
“그건 아니고요. 간접 체험이라고나 할까요….”
방무혁이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아는 형이 첫사랑한테 고백도 못 해보고, 첫사랑이 다른 남자랑 잘되는 것을 도와주고 있거든요.”
- 이런. 완전 순애보네.
“그 형이 다른 사람이랑 행복해하는 그 여자를 보면 심장이 뻥 뚫린 것 같대요. 마치 총 맞은 것처럼요.”
순간,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아저씨…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지금 네 말 적고 있어. 그렇지. 누군가 헤어지면 심장이 막 뻥 뚫린 것 같지. 성국아, 나 지금 막 가사가 떠오르거든. 민국이랑 정우 단기 연수 일은 가사 완성하고 내가 바로 전화할게. 그때 상의하자!
“네, 아저씨.”
방무혁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쓸쓸하게 뉴욕의 거리를 걸었다.
오늘 내 가슴은 심장이 뚫린 것 같았다.
총 맞은 것처럼.
* * *
“성국! 태국!”
마크가 공항까지 우리를 데리러 와줬다.
근데 우리 둘을 보던 마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 얼굴이 왜 이래? 어디 안 좋아? 비행기에서 무슨 문제 있었어?”
“마크, 그냥 우리한테 아무 말도 시키지 말아줘.”
“아, 알았어. 성국, 내가 이번에 차 샀잖아. 미미 씨랑 주말에 여행도 다니고 그러려고.”
마크는 자신이 오늘 산 차에 대해서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이 차가 말이야. 미국에서 역사와 전통이 이어지는 정말 멋진 차거든. 내가 이 차 사려고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마크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불안한 건 뭐지?
드디어 마크의 차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전태국이 바로 전화를 들었다.
“나 전태국인데, 여기 공항. 어서 데리러 와.”
전태국은 전화를 끊고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진짜 마크의 저 고물차를 타고 갈 거야? 내 생각에는 저건 사고가 나서 죽는 게 아니라 차가 퍼져서 죽을 것 같아.”
나는 마크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마크…. 이 차 리미미 씨에게 보여줬어?”
“지금 사서 공항에 끌고 온 게 처음이야. 이 차 끌고 가서 미미한테도 보여주게.”
“마크, 이걸 도대체 얼마에 산 거야?”
“이 차가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마크, 그건 빼고. 가격만 말해.”
“만 달러….”
“뭐어!”
나는 공항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내 눈앞에 놓인 포다 사의 오래된 세단은 거의 폐차 직전의 수준이었다.
“마크, 이 차 누구한테 산 거야?”
“그게…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라왔던 거 산 거라….”
나는 전태국을 쳐다봤다.
“태국이 형, 삼전 샌프란시스코 지점에 나와 있는 법무팀 좀 부탁해요.”
축 처져 있었던 전태국의 얼굴에도 활기가 돌았다.
“아니, 이 고물차를 만 달러나 받았다고! 이거 사기꾼이잖아! 마크, 그냥 내가 한 대 뽑아줄게.”
전태국은 급히 다시 삼전 그룹의 샌프란시스코 지사에 지원팀을 요청했다.
나도 슬슬 활기가 돌았다.
저번 생의 첫사랑을 만나고 심장이 뻥 뚫린 것 같았는데, 마크가 제대로 사고 쳐주는 바람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마크는 나와 전태국을 말렸다.
“두 사람 왜 그래. 난 이 차 마음에 들어. 그리고 만 달러는 나도 편히 쓸 수 있는 돈이야.”
“마크,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1km도 못 달릴 것을 만 달러나 받은 건 분명 사기라고!”
“이건 성국이 말이 맞아. 마크, 기다려. 우리 삼전 그룹이 출동해서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겠어.”
마크는 더 난감해했다.
“태국, 난 억울한 거 없어.”
“마크, 무슨 소리야. 넌 억울한 거야. 내가 태국이 형이랑 네가 준 돈 한 푼도 안 빼고 다 받아줄게.”
나는 마크의 어깨를 꽉 쥐었다.
* * *
집 앞에 도착한 마크는 반나절 사이에 볼이 핼쑥해졌다.
손에는 만 달러가 그대로 들려있었지만, 얼굴은 죽상이었다.
나는 슬픔에 빠진 마크를 위로했다.
“마크, 너 그 차 그대로 리미미 씨한테 끌고 갔으면 뼈도 못 추렸어. 리미미 씨가 북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자.”
“성국… 나 그 차 엄청 마음에 들었어. 내 첫사랑과 같은 차라고. 내가 어릴 적부터 엄청 사고 싶었던 차야. 이제 단종돼서 살 수도 없다고.”
이때, 마크의 눈앞에 마크가 산 똑같은 차종의 차가 멈춰 섰다.
마크가 산 차가 폐차 수준의 차라면 이건 관리가 잘 된 중고차였다.
차 문이 열리더니 전태국이 내렸다. 그리곤 마크에게 키를 던졌다.
“마크, 받아.”
“태국, 이게 뭐야?”
“내가 말했잖아. 사준다고!”
“정말 똑같은 모델이잖아!”
“거기다 훨씬 상태도 좋은 거야.”
전태국의 말에 마크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얼른 차로 달려갔다.
나는 태국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역시 이 세상에 돈으로 잊히지 않는 건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