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97화 (197/231)

제197화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공항 게이트 앞에 섰다.

민국이와 정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기로 한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학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랜만에 학교 수업에 나간 전태국 대신에 마크가 같이 마중을 나왔다.

나만큼 마크도 들뜬 얼굴이었다.

“성국, 나 엄청 기대돼. 민국이 많이 컸겠지?”

“응. 민국이 이제 중학생이야.”

“진짜 세월 빠르네. 민국이도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어겠네.”

“겨울에 봤을 때는 똑같았어.”

[사춘기는 무슨. 민국이 아직 애라고….]

곧 게이트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민국이와 정우의 얼굴이 보였다.

민국이는 큰 헤드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나는 얼른 민국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민국아! 형, 여기야!”

순간, 민국이가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게 느껴졌다.

[저 심드렁한 눈빛은 뭐지?]

오히려 정우가 반갑게 다가왔다.

“성국아!”

“어… 정우아. 오느라 고생 많았어.”

“네 덕분에 미국에도 다 오고. 너무 고마워.”

“내 덕분은 무슨.”

[이거 다 투자야. 내가 투자한 만큼 좋은 가수 돼서 돈 벌어오란 거야.]

나는 옆에 선 마크를 정우에게 소개했다.

“여긴 마크. 마크는 고등학교, 대학 동창이자 나랑 ‘페이스 노트’ 공동 대표야.”

“와아-”

마크를 본 정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안녕, 난 마크야. 네가 성국이 유일한 초등학교 동창이구나. 반가워.”

마크는 간단한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정우는 수줍게 영어로 답하고 중얼거렸다.

“‘페이스 노트’에서 봤던 사람을 실제도 보니까, 너무 신기하다….”

정우는 신기한 눈으로 마크를 연신 쳐다봤다.

그에 반해 민국이는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고개를 까딱거리고만 있었다.

“전민국, 너 형이랑 마크 형한테 인사도 안 해?”

“어, 형. 마크, 왓썹!”

“뭐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자식이 지금 누구한테 왓썹이래!]

속으로는 이미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이곳은 공항이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전민국을 쳐다봤다.

“민국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미국이니까, 미국식으로 인사했잖아. 영화에서 래퍼들은 다들 이렇게 인사하던데, 뭘.”

“민국아, 도대체 무슨 영화를 본 거야?”

“에미넘 나오는 <9마일>. 형, 그 영화 안 봤어? 거기 다들 힙합에 미쳐있잖아.”

민국이는 쩍 하품을 했다.

“아이, 피곤해. 형, 우리 집에 어떻게 가는 거야?”

“어, 마크가 차 샀어. 그거 타고 가자.”

나는 우선 최대한 화를 참았다.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으니까… 전민국, 난 딱 세 번만 참는다.]

* * *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민국이는 말 한마디 없었다.

큰 헤드폰으로 낀 채 혼자 음악을 들으며 창문을 열고 창밖만 계속 바라봤다.

마크가 음악을 듣는 민국이를 슬쩍 봤다.

“성국, 아무래도 민국이 사춘기인가 봐.”

[이게 다 등 따뜻하고, 배불러서 생기는 거야. 바쁘게 돌리면 그런 생각 할 틈도 없을 거야.]

나는 민국이와 정우에게 2주 동안의 생활 계획표를 내밀었다.

“2주 동안 샌프란시스코 어학원 등록했어. 짧은 시간이지만 알차게 보내기를 바래.”

정우는 시간표를 보더니 감탄했다.

“성국아, 너 초등학교 1학년 때도 하더니… 정말 이렇게 공부해야 너처럼 성공하는 거구나.”

헤드폰을 내린 전민국이 콧방귀를 꼈다.

“형아, 대체 왜 영어를 열심히 해야 하는 건데? 난 가수가 될 건데, 영어 공부할 시간에 차라리 힙합의 성지에 가서 랩 배틀을 하는 게 더 나은 거 아니야?”

“민국아, 너 영어로 랩 배틀 할 영어 실력이 돼?”

“그거야….”

민국이는 말문이 막히자 다시 헤드폰을 끼며 중얼거렸다.

“한국에서 가수할 건데, 왜 맨날 영어 타령인지 이해가 안 돼.”

[왜냐하면 10년 후에 너희들은 전 세계가 사랑하는 가수가 되니까! 그때 영어로 인사도 못 하고 싶냐, 전민국!]

나는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크는 내 눈치를 흘깃 살폈다.

“성국아, 너 엄청 화났지?”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엄청 화났잖아. 너 항상 화나면 입 꾹 다물고 단답형으로 대답하잖아.”

이때, 뒤에서 이상 기류를 감지한 정우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쳐다봤다.

“성국아, 나 영어 공부 열심히 한 게 효과가 있나 봐. 마크가 한 말 조금 알겠어. 너보고 화났냐고 묻는 거지?”

[하아… 정우야, 나 지금 그런 대화할 기분이 아니야. 눈치 챙겨.]

하지만 눈치를 챙길 정우가 아니었다.

천진난만한 게 정우의 매력이기도 했다.

“성국아, 샌프란시스코 정말 예쁘다. 우리는 그럼, 너랑 같은 방 쓰는 거야?”

“방이 하나 남아서 거기를 민국이랑 네가 쓸 거야. 나는 일이 많아서 방 혼자 써야 하거든.”

“대박. 성국아, 너 정말 멋있어!”

정우는 엄지까지 치켜세웠다.

“참, 같이 집 쓰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전태국이라고. 대학생인데, 성격 까칠하니까 조심해.”

“어, 걱정 마! 피해 안 가게 할게.”

“넌 걱정이 안 되는데….”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민국이 녀석을 보니까, 왜 앞으로 2주가 엄청 힘들 거란 생각이 들지?

* * *

“전민국! 오랜만이다! 내가 오늘 너 온다고 해서 오는 길에 비서들한테 시켜서 이 근처 맛집에서 음식 싹 다 사오라고 시켰어!”

오래간만에 학교를 다녀온 전태국은 양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 전민국을 반겼다.

하지만 전민국의 반응은 쎄했다.

“왓썹맨.”

“어? 지금 뭐라고 말한 거야?”

재벌가 후계자로 태어나서 안하무인으로 이십 평생을 살아온 전태국도 민국이의 인사에 놀라고 있었다.

“형, 오랜만. 인사잖아요.”

“어… 그래…. 내가 너희랑 같이 먹으려고 맛있는 거 많이 사 왔어. 배고프지?”

“형, 나 다이어트 중. 샐러드만 먹을 거임.”

민국이는 문장을 탁탁 끊어 말하더니, 정우와 함께 묵을 방을 훑었다.

“형, 침대가 왜 하나야?”

“킹사이즈야. 정우랑 너희 둘이 써도 남을 거야.”

정우는 얼른 민국이의 눈치를 살폈다.

“민국아, 네가 불편하면 내가 바닥에 이불 깔고 잘게.”

“나 예민해서 누구랑 못 자는데. 원래 아티스트는 예민하잖아.”

쾅.

민국이는 그대로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갔다.

나와 전태국은 어이없는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봤다.

힙합 병에, 아티스트 병에. 아주 온갖 병은 다 걸린 게 지금 민국이였다.

“성국아, 민국이 사춘기야?”

[참을 인 자 두 개째 그리는 중이야. 너 이제 한 번 남았어! 전민국!]

이때, 정우가 빙긋 웃었다.

“성국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중1 때 한참 저랬던 것 같아. 그냥 세상 다 귀찮고, 혼자 뒀으면 좋겠고. 그런 거 있잖아.”

“정우아, 여긴 우선 내가 지내는 곳이고 미국이잖아.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내 말을 따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이때, 벌컥 문이 열리면서 민국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독재자는 물러나라!”

쾅!

다시 문이 닫혔다.

[참을 인자 세 번 나 다 썼다고! 전민국, 이 자식을!]

나는 팔뚝을 걷어올렸다.

“전민국, 누가 문을 그따위로 닫으래! 나 진짜 많이 참았거든! 너 오늘 나 좀 보자!”

전태국이 나를 말렸다.

“성국아, 중1이잖아.”

“중1이 벼슬이야! 나는 저 나이 때 ‘페이스 노트’ 사업 하느라고 밤낮없이 바쁘게 살았다고!”

“성국아, 그건 네가 천재라서 그래. 넌 정말 특별한 사람이잖아.”

뭐지?

정우의 말 한마디에 분노가 사그라졌다.

[그래, 난 천재였지. 특별한 사람이기도 하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전태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튼 칭찬에는 약해요. 그나저나 먹을 거 많이 사 왔는데, 어쩌지. 민국이가 잘 먹던 피자도 사 왔는데….”

이때 득달같이 다시 문이 열리더니 민국이가 달려왔다.

“피자는 먹을 거임.”

“아까 다이어트한다며? 샐러드만 먹는다며?”

“마음이 변했음.”

“그럼, 우선 형한테 독재자하고 한 말 취소해.”

“내가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 형은 맨날 자기대로 하잖아. 난 힙합의 성지에 가고 싶은데, 형은 또 어학원 수업 등록이나 해놓고. 진짜, 너무해!”

[그래, 오늘 한번 먼지 나게 맞아보자!]

내가 다가가자 민국이는 전태국 뒤에 쏙 숨어버렸다.

“형아, 성국이 형 무서워.”

[아, 뒷골이야….]

이게 말로만 듣던 사춘기구나!

* * *

‘페이스 노트’ 사업은 순항 중이었다.

투자자들이 물밀듯이 모여들었고, 사원 수는 더 늘어났다.

그래도 원년 멤버인 마크와 리미미와는 꼭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회사 이야기를 나눴다.

“사장님, 이번에 보안팀 더 보강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몇 명이나요?”

“최소 10명은 필요해요.”

“보안은 이런 SNS의 생명이니까, 충분히 인원 파악해서 올리세요.”

나는 피자를 한 조각 먹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성국아, 왜 더 안 먹어?”

“민국이 녀석 때문에 입맛이 없어.”

“민국이 아직도 어제처럼 툴툴거려?”

“아침에는 샌프란시스코 날씨 덥다고 제발 옷 가볍게 입고 어학원 가라니까. 죽어도 가죽 재킷 입겠다고 난리를 쳐서 입고 나갔어. 아마 쪄 죽고 있을 거야.”

“민국이가 제대로 사춘기가 왔구나.”

도대체 사춘기를 왜 겪는지 이해가 안 됐다.

저번 생에서야 후계자 훈련받느라 사춘기 겪은 기억도 없었다.

전교 1등을 해야만 했고, 서울대에 꼭 들어가야만 해서 정말 밤낮없이 공부만 했다.

“도대체 요즘 애들이란….”

이때, 우리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리미미가 끼어들었다.

“사장님, 민국이가 사춘기이기도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흠… 리미미 씨, 날카로운 지적이었어요. 아무래도 힙합 음악을 공부하면서 괜히 쓸데없는 겉멋만 든 것 같아요.”

“힙합? 그거 물들면 좀 무섭지.”

마크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메탈 팬이라, 한때 메탈 밴드의 멤버가 되어 전 세계를 돌며 공연하는 상상을 하곤 했거든.”

“마크, 넌 음치잖아.”

“그래서 일찌감치 상상을 그만뒀지.”

이때, 리미미가 무심히 던졌다.

“사장님, 민국이가 한국에서 힙합을 책이랑 영화로 배운 거 같은데, 진짜 힙합을 한번 보여주세요. 그것보다 빠른 건 없을 것 같은데요.”

“리미미 씨!”

나는 살짝 놀란 얼굴로 리미미를 쳐다봤다.

“왜요, 사장님?”

“아주 좋은 해결 방법 같아요.”

“사장님은 보면 사업에는 천재인데, 동생들한테는 항상 못 이기는 것 같아요.”

나는 피자를 다시 한 조각 깨물었다.

[전민국, 기다려라. 내가 힙합이 뭔지 보여주마.]

* * *

전태국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꼭 이렇게 해야만 하겠니?”

“형, 민국이 봤잖아요. 한국에서 이상한 힙합 문화만 배워 와서는. 공부 말고 힙합의 성지를 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졸라대잖아요.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줘야죠.”

“네가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주긴 하는 거지만… 영 내키지 않네.”

전태국은 디트로이트행 비행기 티켓을 내밀었다.

에미이 주연한 <9마일>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 도시였다.

실제 그곳에 있는 힙합 클럽넘 몇 군데를 수소문해둔 상태였다.

“성국아, 여기 좀 위험할 수도 있어… 특히 동양인끼리만 가기에는.”

“형, 무슨 소리야. 형도 같이 갈 거잖아.”

“나도?”

“당연하죠, 형!”

[그래야, 삼전 의전팀이 움직이지.]

* * *

전민국은 디트로이트 공항에 내리더니 감격한 얼굴로 바닥에 입맞춤을 했다.

[하아… 뒷골이야.]

나는 뒷골을 잡곤 전태국이 미리 준비한 리무진에 올라탔다.

전태국은 리무진에 오르자마자 설명을 시작했다.

“이 차 모든 게 다 방탄이야. 그러니까, 이 차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단 이야기야.”

“형, 겁쟁이임? 뭐가 그렇게 무서움?”

민국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연신 깐족거렸다.

리무진은 곧 디트로이트 힙합 공연장이 있는 낯선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민국이가 오늘 입은 옷처럼 몸보다 큰 후드를 뒤집어쓴 흑인들이 즐비한 클럽들이 보였다.

민국이의 얼굴이 점점 굳는 게 보였다.

음악에 따라 흔들던 몸도 굳은 지 오래였다.

드디어 리무진이 거대한 흑인들이 즐비한 클럽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전민국과 정우를 쳐다봤다.

“전민국, 어서 내려. 여기가 네가 그토록 오고 싶어 하던 힙합의 성지야.”

“혀엉….”

민국이는 떨고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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