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차 문은 훤히 열려 있었고, 밖에서는 민국이가 그토록 바라던 힙합 음악이 미친 듯이 흘러들어왔다.
나는 떨고 있는 민국이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민국아, 어서 가봐. 여기가 바로 에미넘이 공연하기 시작한 그 유명한 클럽이잖아. 기독교의 성지가 예루살렘이듯이, 힙합의 성지는 바로 여기잖아.”
“혀엉… 엉.”
민국이는 이제 살짝 울먹일 기세였다.
[사춘기 정말 요란하게 겪네.]
이때, 예상치도 않은 정우가 차에서 먼저 내렸다.
“성국아, 나는 저기 구경 가보고 싶어.”
“어?”
내가 놀란 눈으로 보자 정우가 민국이의 손을 잡았다.
“민국아, 네가 맨날 노래 부르던 에미넘 성지잖아. 여기까지 와서 그냥 이대로 돌아갈 거야?”
“혀엉….”
정우의 도발에 민국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봤다.
“형, 나 다녀올게.”
[이건 내가 예상한 게 아닌데….]
내 예상은 민국이가 우선 무섭다며 나를 붙잡고 울며불며 그동안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이때, 정우가 먼저 열린 차 문 사이로 내렸다.
그리고 덜덜 떠는 민국이도 어쨌든 차에서 내리긴 했다.
아무리 삼전 그룹의 의전팀이 태국이 때문에 사방에 우리 모르게 깔렸다고 하지만, 영어도 제대로 안 통하는 저 둘을 디트로이트 힙합 클럽에 단둘이 들어가게 둘 수 없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전태국을 잡아끌었다.
“나는 왜?”
“형이 가야 의전팀이 정신 차리고 우리 지켜줄 거 아니에요.”
“전성국, 너 나 볼모로 잡아 온 거야? 나 이런 데서 갱단에게 납치되거나 하면 이건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문제야.”
“형, 우선 롤아이 시계나 조심해요.”
전태국은 황급히 시계를 풀어서 차 안 금고에 집어넣었다.
“잠시만….”
그러더니 온몸에 휘감은 각종 명품들도 금고에 넣었다.
“형, 지갑은 가지고 내려야죠.”
“아, 맞다! 근데 내가 계산하는 거야?”
“형,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몰라요? 돈 많은 사람이 원래 베푸는 거예요.”
“뭔가 이상한데… 항상 성국이 말에 홀리는 것 같단 말이야.”
전태국은 지갑만 챙겨서 차에서 내렸다.
* * *
요란한 비트 소리가 들리고 거기에 맞춰서 랩을 쏟아내는 래퍼들의 목소리가 클럽 밖에까지 들렸다.
이곳이 바로 에미넘이 랩 배틀을 하면서 성장한 디트로이트의 클럽이었다.
민국이와 정우, 그리고 나와 전태국이 입구에 다다르자 덩치가 산만 한 흑인 친구가 우리를 가로막았다.
“니들은 뭐야?”
거친 흑인 영어에 정우와 민국이는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었다.
[진짜 이러면 또 내가 나서야 하는 거야?]
나는 흑인에게 가서 속삭였다. 그러자, 좀 전의 험악한 표정은 사라지고 우리를 클럽 안으로 안내했다.
“친구, 환영해. 어서 와.”
나는 제일 먼저 앞장서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클럽 안은 이미 열기로 가득했다.
벌벌 떨던 민국이가 미국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내 곁에 바싹 다가왔다.
“형, 아까 뭐라고 한 거야? 뭐라고 했는데, 환영한다고 한 거야?”
“글쎄, 난 별말 안 했어. 손님이니까 환영한다고 했겠지.”
이미 클럽 안은 담배 냄새로 가득했다.
민국이는 어느새 내 손까지 꼭 잡고 어릴 적 순한 민국이는 돌아와 있었다.
“형아, 형아는 안 무서워?”
“민국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에미넘 형님도 디트로이트 슬럼가 출신이잖아.”
이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거기에는 민국이의 우상인 에미넘이 서 있었다.
나는 얼른 에미넘을 얼싸안았다.
“에미넘, 오랜만이에요.”
“성국, 언제 또 이렇게 멋져진 거야?!”
이 모습을 민국이가 보더니 두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성국, 요즘 힙합에 빠진 네 동생 어디 있어?”
“여기요. 디트로이트가 힙합의 성지라면서 여기 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어요.”
에미넘은 민국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네 꿈이 래퍼야?”
“네에…. 에미넘 님.”
“이 녀석, 왜 이렇게 얼었어!”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거든요.”
“그럼, 내가 제대로 한번 보여줄까?”
애미넘은 그 말을 하자마자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에미넘이 무대 위에 오르자 클럽 안은 환호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자, 오늘 대한민국의 래퍼 지망생이 와서 내 무대를 본다고 하니까. 이 무대 한번 박살 내 봐야겠지!”
“와아아아!”
그리도 드디어 <9마일>의 주제곡이자, 에미넘의 인생이 담긴 명곡이 흘러나왔다.
에미넘이 실제로 랩을 하는 모습을 본 민국이와 정우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클럽 안은 에미넘의 랩을 따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나는 감동한 민국이에게 속삭였다.
“민국아, 이 감동 꼭 기억해. 너도 에미넘처럼 멋진 무대에 서는 날이 올 거야.”
“혀엉….”
“지금은 무대를 즐기고, 나머지는 호텔가서 이야기하자.”
“응!”
민국이는 예전처럼 대답도 열심히 하고, 더는 건들거리지도 않고 열과 성의를 다해서 에미넘의 무대를 즐겼다.
동시에 이 무대를 열정적으로 즐기는 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전태국이었다.
전태국은 어느새 에미넘의 무대에 매료돼 있었다.
[여기 또 골치 아프겠군.]
* * *
호텔로 향하는 리무진 안은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상태였다.
리무진 안에서는 여전히 에미넘의 히트곡들이 흘러나왔다.
민국이와 정우는 자신들의 우상인 에미넘의 무대를 실제로 본 것에 크게 감동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민국이는 중1병 탈퇴하고 살가운 원래의 민국이로 돌아와 있었다.
“형아, 봤어? 에미넘 진짜 대단하지 않아?”
“응. 대단하지.”
“형아, 근데. 에미넘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성국아, 그건 나도 궁금해.”
전태국도 가세했다.
“에미넘 딸이랑 ‘페이스 노트’ 친구예요.”
“대박!”
민국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에미넘은 딸바보로 유명한 래퍼였다.
“내가 예전에 연습생 영상 올린 거에 열성적으로 댓글 달던 학생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에미넘 딸이었어.”
[바꿔서 말하면 에미넘 딸이 내 팬이라는 말이지.]
“그때, 딸 따라서 ‘페이스 노트’ 개설한 에미넘이 우리 딸이 맨날 네 영상 보느라고 공부도 안 한다고 제발 공부 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따로 연락해서 부탁한 적이 있거든.”
민국이와 정우, 전태국 모두 입이 떡 벌어져서 닫힐 줄을 몰랐다.
[뭐, 이런 것 가지고 그래. 나, 전성국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
“형아,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내가 에미넘 딸 헤일스에게 연락해서 ‘난 네가 공부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 나도 하버드 다니잖아.’ 그랬거든. 그 이후로 딸이 공부에 매진 중이라고 에미넘이 이 은혜를 꼭 갚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어.”
그 귀중한 기회를 지금 난 막 사춘기를 맞은 동생 때문에 써버렸다.
“성국아, 근데 나한테도 왜 말 안 한 거야? 나도 디트로이트 슬럼가 와서 엄청 쫄았잖아.”
그거야, 전태국에게 이 계획을 말했다가는 디트로이트 비행기 안에서 이미 모두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물주니 내색은 하지 않았다.
“형, 형 덕분에 암튼 모든 게 무사했던 것 같아요. 의전팀한테도 고맙다고 꼭 전해주세요.”
“알았어.”
이때, 민국이가 다시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형아, 나 평생 형아를 인생의 은인으로 알 거야.”
[넌 내 동생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나한테 평생 빚을 진 거라고, 전민국!]
하지만 사춘기 막 탈출한 놈한테 그렇게 모질게 말할 수는 없었다.
“민국아, 이제부터 형아 말 잘 들을 거지?”
“응!”
“참, 호텔에서 에미넘 만날 건데, 갈 사람?”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세 명은 득달같이 손을 들었다.
“형아, 나!”
“성국아, 나도!”
“성국아, 오늘 호텔에서 얼마가 나오든 내가 계산하겠어!”
* * *
디트로이트 호텔의 스위트룸.
잠시 후 초인종이 울리고 에미넘이 스위트룸으로 들어왔다.
에미넘은 빙긋 웃으면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성국, 내가 널 이렇게 따로 만난 거 알면 우리 딸이 날 죽이려고 들 거야.”
“이 은혜는 제가 또 갚아야죠. 헤일스는 공부 열심히 하죠?”
“다행히 지 엄마는 안 닮았나 봐. 공부를 곧잘 해.”
에미넘과 부인과의 사이가 나쁜 거야 너무나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에미넘, 공연 끝나고 힘들 텐데 여기까지 와주고 고마워요.”
“우리 딸이 열심히 공부하게 해준 은인인데, 내가 그걸 무시하면 안 되지. 동생이 나를 좋아한다며?”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신으로 생각해요. 디트로이트 그 클럽을 성지라고 부르거든요.”
에미넘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민국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클럽에서도 봤지? 네가 광팬이라며?”
“네, 에미넘. 저 정말 팬이에요. 사진이랑 사인 부탁드려도 돼요?”
“당연하지.”
옆에 선 정우와 전태국도 끼어들었다.
“저희도 부탁드려요.”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하지. 참, 아까 누구누구가 래퍼 지망생이라고 했지?”
“제 동생인 민국이랑, 제 친구인 정우요.”
나는 두 사람을 에미넘 앞으로 밀었다.
“그럼, 랩 하는 거 한번 볼까?”
“여기서요?”
민국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래퍼에게는 어디든 무대가 될 수 있는 거야. 예전에 나 무명 시절에는 관객 한 명 두고도 랩을 한 적이 있어.”
“그게 아니라… 랩의 신을 두고 너무 떨려서요.”
“나도 내 앞에 닥터 그래를 두고 랩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꼭 너처럼 떨었어. 그래도 그때 랩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흠, 에미넘도 좀 사연팔이 경향이 있군….]
에미넘의 말에 자극을 받은 민국이와 정우는 용기를 내서 에미넘의 랩 한 소절씩 선보였다.
아직 어설픈 랩 실력이었지만, 에미넘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끝까지 듣고는 평가를 시작했다.
“둘 다 랩에 재능이 있어. 랩에서 가장 중요한 리듬감이 아주 끝내줘. 근데 말이야. 랩은 기본적으로 내 가사를 쓰는 연습을 해야 해.”
에미넘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랩 강의가 시작됐다.
“내 노래들이 원천은 다 나의 스토리거든. 아버지는 내가 5개월 때, 날 버려서 난 아버지 얼굴도 몰라. 거기다 어머니는 우울증 환자에 마약 중독자였어. 어릴 적에는 슬럼가에 사는 백인이라고 아이들한테 맞기 일쑤였어. 심지어 화장실에서 맞아서 9일 동안 혼수상태인 적도 있었다니까.”
사연팔이하는 에미넘에게서 진하게 아빠의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아직 영어가 부족한 민국이와 정우에게 한국말로 통역을 해줬다.
“두 사람 래퍼로서의 재능은 충분하니까. 앞으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랩에 담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네. 다들 알았지?”
장장 삼십 분에 걸친 에미넘의 랩 강의는 끝이 났다.
민국이는 감동 먹은 얼굴로 에미넘에게 띄엄띄엄 영어로 이야기했다.
“에미넘, 다음에 만나면… 흠… 영어로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해 올게요.”
“행운을 빌어. 두 사람 모두!”
에미넘은 민국이와 정우를 꼭 안아주고 스위트룸을 떠나기 위해 현관에 섰다.
“에미넘, 오늘 밤에 정말 고마웠어요.”
“성국, 사실은 말이야. 우리 딸이 만약 너 만나면 너랑 사진 한 장만 찍어 오라고 노래를 불렀어. 에슐리 홈즈가 말한 마성의 남자가 자신의 이상형이라면서 타임즈에 난 네 기사 사진을 책상 위에 붙여놨어.”
에미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국, 나도 래퍼이기 이전에 아빠잖아.”
“그 마음 백 프로 이해해요. 저도 ‘페이스 노트’ 대표이기 이전에 민국이 형이거든요.”
에미넘은 준비한 카메라로 나와 다정하게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것으로 에미넘에게 진 빚도 일부 갚았다.
* * *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민국이는 예전의 민국이로 돌아와서 에미넘과의 감격스러운 만남을 하염없이 정우와 종알거렸다.
“정우 형, 에미넘 그 파트할 때 손짓 봤지? 완전 멋있었어.”
“민국아, 에미넘이 그런 겉모습보다는 진솔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래퍼가 진짜 멋있는 래퍼라고 했잖아.”
두 사람은 꽤 힙합과 음악에 대해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전태국도 무언가에 빠져있었다.
비행기에 탄 순간부터 계속해서 술을 홀짝이며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형, 뭐 해요?”
“성국아, 이거 한 번만 봐줄래?”
“뭔데요?”
“에미넘이 그랬잖아. 진솔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 모두가 래퍼라고. 성국아, 23살이 래퍼 되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지?”
[당연히 늦었지. 그것도 한참. 그리고 음치인 것으로 아는데…]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전태국이 쓴 자전적인 가사를 읽어 내려갔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로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
사람들은 내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지. 하지만, 난 자유로운 영혼. 아직도 꿈꾸는 피터팬.
나는 한숨을 팍 내쉬었다.
[사춘기 겨우 보냈더니, 이십춘기가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