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두통이 오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내가 전태국이랑 이상한 사이라니!
물론 이상한 사이이지!
저번 생의 동생이 이번 생에서는 아는 형이 되었으니까!
[하아- 철의 여인, 나를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거야? 내가 전태국을! 나도 눈이라는 게 달렸다고!]
지희가 살짝 겁먹은 얼굴로 나를 흔들었다.
“오빠….”
“지희야, 미안. 오빠가 잠신 딴생각을 했네. 지희야, 모르는 문제 알려줘 봐. 오빠가 우리 지희가 평생 잊어먹지 않게 알려줄게.”
그러자 지희가 뒤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지희야, 왜 그래?”
“오빠, 오늘은 피곤한 것 같으니 내일 알려줘.”
“공부는 모를 때 바로 배워야 하는 거야.”
“오늘은 내가 혼자 조금만 더 공부해볼게. 오빠는 피곤할 테니, 어서 자. 오빠, 안녕!”
지희는 후다닥 내 방을 나가버렸다.
저번 생의 동생 전태국 때문에 이번 생의 동생을 천재로 키울 중요한 시간을 놓치다니!
나는 얼른 전태국에게 전화를 했다.
전태국이 우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성국, 내 메시지 봤지?
“형,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 우리 엄마가 나를 공항에서 바로 끌고 간 이유가 바로 너 때문이었더라고.
나는 올라오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형… 그러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세요?”
- 아니, 내가 연애도 안 하고.
[안 하는 거 아니고, 못 하는 거잖아!]
- 암튼 너랑 같은 집에 사는 데다가, 내가 너 이리저리 도와준답시고 삼전 사람들 일 시켜서 엄마가 단단히 오해 중이셔. 재계에도 소문이 퍼졌다는 것 같아. 성국아,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아무래도 삼전 호텔에서 쇼 좀 해야 할 것 같아.
“형, 쇼라뇨?”
전태국의 한숨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나는 누가 봐도 얼굴 알 만한 여자 연예인이랑 다정하게 있는 거 사진 찍혀야 하고. 너는 내 동생 미진이랑 사진 찍혀야 해.”
- 형은 모르겠지만, 제가 왜 전미진이랑 사진에 찍혀요?
“그거야… 네가 삼전에서 찜한 사윗감이라는 소문이 나게 만들어서 내가 너랑 같이 사는 거나 여러 가지 자연스럽게 포장하려고 하는 거지.”
정말 들을수록 뒷골이 당겼다.
- 성국아, 이번만 좀 봐줘라.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엄마는 오히려 더 오해하고, 전미진은 이 기회에 너랑 어떻게든 엮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어. 그리고 사진 한 장 찍는 거야, 별거 아니잖아. 대한민국에서 삼전 그룹이랑 엮여서 나쁠 것도 없고.
“형,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 성국아, 제발 나 좀 살려줘!
툭- 나는 아무 대답도 않고, 전화를 끊고 주방에 가서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때, 방에서 엄마, 아빠가 하는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자기야, 성국이가 사준 가방 진짜 이쁘지?”
“마음에 들어?”
“당연하지. 남편도 안 사준 가방을 아들이 사줬는데,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잖아. 거기다 샤랭이라잖아.”
“소영아, 너도 샤랭 알아?”
“알긴 알지.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
엄마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소영아, 다음 생일에 내가 가방 사줄까?”
“가방 하나면 되지. 치이, 뒷북치긴.”
“그럼, 소영아. 다른 거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흠… 생각해볼게.”
여전히 부모님의 사이는 좋았다.
전태국이 내 속을 뒤집어놨지만, 집에 오니 참 좋긴 했다.
나는 그리고 일부러 컵을 살짝 소리 나게 놨다.
안방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성국이니?”
“응, 이제 들어가서 자려고.”
“그래, 어서 자.”
나는 조금 더 소리 내서 내 방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 넷째는 절대 안 돼!]
* * *
8월 16일.
VIP와의 약속 날이 다가왔다.
박성희 비서에게서 오후 5시에 데리러 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비공식적인 자리이긴 했지만, VIP를 만나는 자리인데 의상이 조금 고민이 됐다.
캐리어에 든 내 의상은 모두 데님에 후드 티셔츠뿐이었다.
엄마가 옷을 들고 고민하는 나를 지나가다 슬쩍 쳐다봤다.
“성국아, 약속 있어?”
“어… 저녁에 일 때문에 누가 잠깐 보자고 해서.”
엄마, 아빠에게는 VIP 만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옷부터 시작해서 잔소리가 시작될 게 뻔했다.
“옷 좀 사자니까. 막상 나가려니 입을 옷 없지?”
“아니야. 이것 입고 가도 되는 자리야.”
“성국아, 구멍 난 팬티는 다 버려. 알았지?”
“알았어, 엄마.”
“진짜 누굴 닮아 저렇게 자린고비야.”
[누구 닮긴. 다 엄마, 아빠 닮았지.]
이때, 박성희 비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성국 군, 아파트 입구에 있습니다.
“곧 내려갈게요.”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나는 얼른 데님과 후드티를 입었다.
* * *
아파트 입구에 박성희 비서의 차가 주차돼 있었다.
내가 내려가자 박성희 비서가 차에서 내려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성국 군, 오랜만입니다.”
“예정 누나 결혼식하고 한 달도 안 됐잖아요.”
“그렇긴 하죠. 자, 어서 타시죠. VIP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차에 올라타자 뒷좌석에서 익숙한 냄새가 올라왔다.
“비서님, 혹시 저희 집 보쌈 포장하셨어요?”
“사실은 VIP께서 드셔보고 싶다고 하도 말씀하셔서요. 포장했습니다.”
“저한테 미리 말이라도 주시죠.”
“그럼, 더 맛있는 부위로 주시나요?”
“저희 아버지가 그러실 분은 절대 아니지만, 서비스로 김치는 조금 더 주셨을 거예요.”
“그 찬스는 다음에 제가 먹을 때 사용하겠습니다.”
박성희 비서의 차는 드디어 청와대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일을 물었다.
“정희 누나랑은 잘 만나고 계시죠?”
“아하, 그게요….”
박성희 비서는 애매하게 웃었다.
[벌써 끝난 거야?]
“사실은 지금은 서로 떨어져서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우선 어쨌든 VIP 임기까지는 여기서 일을 해야 하니까요. 저도, 정희도 그때까지는 서로 인생을 고민하면서 연락은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계시는 거네요.”
“우선은요.”
정희 이야기를 하는 박성희 비서의 귓불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사랑, 참 좋은 거지….]
그 순간, 전태국과의 루머가 떠올라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성국 군, 어디 안 좋아요?”
“좀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 이야기해요. 뭐든 도와줄게요.”
[박 비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니야.]
나는 그저 웃었다.
* * *
VIP가 머무는 내실로 박성희 비서가 조용히 안내했다.
나까지 괜히 숨을 죽였다.
저번 생에 청와대야 수없이 와봤고, 때마다 이런 긴밀한 회담은 수없이 나눴다.
[익숙할 줄 알았더니… 괜히 긴장되네.]
나는 후드티를 다시 매만졌다.
곧 내실의 문이 열리고 의자에 앉은 VIP가 보였다.
VIP는 내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았다.
“성국 군?”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미국에서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나까지 이렇게 만나주고 영광이네.”
“제가 영광이죠.”
나는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VIP는 내가 자리에 앉자 박성희 비서를 쳐다봤다.
“저녁 준비 시작하라 이르게.”
“네.”
박성희 비서는 얼른 자리를 떴고, 작은 내실에 나와 VIP 그리고 경호원만이 남았다.
[저번 생에서 자주 있던 일이라 긴장 안 될 줄 알았는데, 오랜만이라 긴장되네.]
VIP는 내게 차를 권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뭔 차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내가 즐겨 마시는 녹차로 준비했어요.”
“잘 마시겠습니다.”
VIP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성국 군 부모님은 성국 군 얼굴만 봐도 배부르시겠어요. 이렇게 훌륭한 외모에다 어린 나이에 그 많은 일을 하다니, 정말 대단해요.”
[VIP, 살아온 시간만 본다면 당신이나 나나 비슷해.]
“과찬이십니다.”
오늘은 내 평소 성격과 달리 겸손함을 탑재해야 했다.
“성국 군, 겸손하기까지.”
[하아, 겸손. 그거 내 적성에 진짜 안 맞는데.]
VIP는 사람 좋게 웃었다.
“성국 군 이렇게 보자고 한 건 미국에서 현재 제일 잘나가는 사업가한테 미국 돌아가는 이야기도 좀 듣고 싶고.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보자고 했어요.”
“제가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서 말씀드릴게요.”
VIP는 빙긋 웃었다.
“그냥 편하게 이야기해요.”
[누가 VIP 앞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하나, 이 사람아.]
나는 녹차를 소리죽여 마셨다.
VIP는 이런저런 미국 이야기를 묻기 시작했다.
“자네는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 누가 이길 것 같은가? 햄버거 외교까지 했으니, 당연히 버락 오마하지?”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물론 요즘 여론조사도 버락 오마하가 항상 우세하고요. 존 메케니는 부통령 후보를 너무 잘못 골랐거든요.”
햄버거 외교 덕분에 버락 오마하는 여론을 완전히 역전시켰다.
극히 일부의 공화당 지지자들만 버락 오마하가 이슬람교도라고 여겼다.
“참, 자네는 대단해. 어떻게 딕 파웰과 버락 오마하를 엮을 생각을 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어요?”
“제가 굳이 엮은 건 아니고요. 보수의 표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보수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의 지지를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다 하고….”
VIP는 그렇게 미국 정세에 대해서 몇 마디 묻더니, 나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 리먼 브라더스라고 혹시 아나?”
“네….”
뭔가 올 것이 온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세요?”
“흠… 대은에서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하는 게 어떨지 보고서를 올려서 말이야.”
대은은 대한 은행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다.
대한 은행은 기업금융 지원을 위해 세워진 국책 은행이었다.
[드디어 오는 건가, 리먼 브라더스 파산의 날이?]
나는 최대한 굳은 얼굴로 VIP를 바라봤다.
“전문가들 의견은 반반일세. 리먼 브라더스라는 미국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투자은행을 인수해서 우리나라도 공격적인 투자를 해서 국고를 튼실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과, 요즘 미국 내 부동산 경기가 침체로 돌아서면서 많은 투자은행들이 위기를 맞을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단 의견과 말일세. 물론 리먼 브라더스도 위험한 투자은행 중 하나라는 이야기이지.”
VIP의 조심스레 이야기를 풀었다.
사실 내가 아는 미래는 분명하다.
1년 후, 리먼 브라더스는 파산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은이 리먼 브라더스 파산 직전에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하려고 했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였다.
VIP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궁금한 건 말이네. 대은이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해도 괜찮을까, 하는 것을 자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었네.”
“저는 우선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서 정확한 의견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당연하지. 그냥, 아주 편하게 말하게.”
VIP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댔다.
긴장을 조금 풀기 위한 자세였지만, 다리 한쪽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 초조한 게 분명했다.
나는 VIP에게 진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지금 미국의 상황은 호황기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언제든 터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동산의 하락은 그동안 남발한 모기지의 부실 문제로 이어질 것이고요. 리먼 브라더스는 미국의 4대 투자은행이긴 하지만, 재정 구조가 위험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VIP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말은 리먼 브라더스를 대은이 인수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리먼 브라더스 자체가 파산할 수도 있단 말인가?”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2007년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까지는 생각하지 못할 때였다.
“그리고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아마… 가장 미국 경제의 큰 뇌관 역할을 할 게 분명합니다. 이게 만약 터진다면 미국 경제도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VIP, 나 지금 천기누설 중이야. 잘 들어.“
VIP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성국 군, 그 말은?”
“네, 대은이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하려는 것은 정말 미친 짓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