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VIP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당이 바뀌지 않으면 내가 추구하는 정책들이 다음 정권에서도 방향성을 같이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이긴 하네.”
대한민국 대선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민감한 문제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괜히 나불대다가 밉보이면 어떤 정권에서나 휘둘리기 쉬운 게 경제인들이었다.
VIP는 고심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군, 자네는 이번 대선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 낼 것 같나?”
“저는 대한민국에 오래 있지 않아서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미국보다 잘 예측이 안 되긴 합니다.”
[VIP, 미안. 예민한 문제는 피하는 게 상책이야.]
물론 나는 정확히 다음 정권을 누가 잡을지 알고 있다.
미래를 모른다고 해도 솔직히 대한민국의 대선도 미국만큼이나 대세가 기운 느낌이었다.
VIP의 얼굴이 고심으로 가득했다.
“성국 군, 자네 같은 사람이 정권에 상관없이 우리나라의 앞날에 많은 도움을 주기 바라네.”
“노력하겠습니다.”
어쨌든 정치와 사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곧 박성희 비서가 아빠 보쌈을 비롯하여 저녁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성국이 아버님이 만드신 보쌈입니다.”
“삼전 그룹의 후계자가 삼전 호텔 한식당보다 맛있다고 평가했다는 그 유명한 보쌈을 이제야 먹어보는군.”
삼전 그룹 후계자란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다가올 토요일이 걱정됐다.
* * *
“성국 군, 정말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줄은 몰랐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박성희 비서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전 의견은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리먼 브라더스가 오래 가기는 힘들 것 같거든요.”
“성국 군, 자신감만큼은 참 부럽네요.”
[자신감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내 말이 곧 미래라고!]
박성희 비서는 현재 VIP의 고민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았다.
“VIP께서 요즘 고심이 많으시거든요. 아무래도 다음 정권은 바뀔 것 같아서요.”
“민심을 따라가는 거겠죠.”
나는 최대한 의도를 숨긴 채 대답했다.
대한민국 기준으로 아직 난 미성년자라서 투표권도 없었다.
곧 박성희 비서의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내가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박성희 비서가 큰 쇼핑백을 건넸다.
“이게 뭔가요?”
“청와대 기념품입니다. 부모님 드리면 좋아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박성희가 내민 청와대 마크가 선명한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 * *
따악- 엄마의 매운 손이 내 등을 내리쳤다.
“전성국! 너 지금 청와대 다녀온 거야?”
“아, 그게….”
“저녁에 일 때문에 약속 있다더니, 지금 그 꼴로 청와대 다녀온 거야?”
“엄마, 나 아직 미성년자야. 후드티에 데님이면 준수한 거지.”
따악- 엄마는 손이 또다시 등으로 날아왔다.
[엄마, 나 전성국이라고. 전직 삼전 그룹 후계자.]
근데 내가 지금 엄마에게 등짝을 맞고 있다니…. 정말 저번 생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욕실에서 막 씻고 나오던 아빠가 엄마를 말렸다.
“소영아, 그만해. 성국이가 미국 살다 와서 생각이 좀 자유로운 거잖아.”
“자유로운 것도 정도가 있지. 대통령 만나는데, 누가 이러고 가. 대통령이 우리를 어떻게 봤겠어. 애 옷도 제대로 못 입히는 부모로 알 거 아니야. 정말 속상해 죽겠네.”
“대통령이 엄마, 아빠 보고 이렇게 잘생긴 아들 둬서 밥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고 덕담하셨어.”
내 말에 엄마의 손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때, 다행히 아빠가 엄마를 말렸다.
“소영아, 그만해. 성국이는 얼굴이 모든 것을 완성하잖아. 솔직히 사람들 성국이 얼굴 보기 바쁘지. 옷이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엄마, 아빠 말이 맞아.”
“아휴, 정말 말이라도 못하면….”
엄마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박성희 비서가 내민 쇼핑백을 무심코 들고 오는 게 아니었다. 그 때문에 청와대에 다녀온 것을 들키고 말았다.
아빠는 어느새 쇼핑백에서 술을 꺼내 들었다.
“성국아, 술도 청와대 기념품이야?”
“전 거기 비서님이 챙겨주시는 거 그대로 들고 왔어요. 기념품이라고 했으니, 기념품이겠죠.”
아빠는 이것저것 꺼내더니 풀어보며 신기해하셨다.
“야, 시계도 있네. 성국아, 나 네가 사준 롤아이 말고 이거 차고 다닐까 봐.”
“아빠, 그 시계 너무 정치적 색이 드러나니까 그냥 롤아이 차고 다니세요.”
“그런가….”
엄마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암튼 부자가 쌍으로 속도 좋아. 이 꼴로 청와대까지 다녀온 아들이나, 들고 온 선물 좋다고 풀어보는 아빠나.”
“소영아,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성국이가 어련히 잘했으려고.”
[내 말이!]
나는 묵묵히 수첩과 노트, 연필 같은 필기구를 챙겨서 구경하던 지희에게 내밀었다.
“지희야, 공부할 때 써.”
“응, 오빠!”
엄마는 허리에 손을 얹고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다음 주 수요일 출국이지?”
“응, 엄마.”
“일요일엔 엄마랑 백화점 가는 거야. 다른 약속 잡지 마.”
“엄마, 이제 미국 가니까 상관없어. 미국에서는 다들 편하게 입고 다녀. 옷 살 돈으로 주식 한 주를 더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엄마?”
“성국아, 편한 거랑 추레한 건 다른 거야. 너 그 후드티 손목도 다 늘어났고, 색도 바래서 안 되겠어. 팬티도 좀 버리고!”
“아, 알았어. 엄마. 팬티 이야기 좀 그만해!”
나도 끝내 투덜거리고 말았다.
엄마는 어이없단 얼굴로 나를 봤다.
“이제 컸다고 엄마한테 말대꾸하는 것 좀 봐라.”
[엄마, 내가 아무리 엄마한테는 어린 아들이지만 이제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즉, 팬티 이야기는 창피하다고!]
* * *
겨우 엄마의 폭풍 잔소리에서 해방되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전태국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 8월 18일 토요일 6시. 삼전 호텔 1층 로비 카페.
- 난 안 나갈 거야, 형.
난 바로 답을 보냈다.
진심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전미진과는 엮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내가 답을 보내자마자 전태국의 전화가 걸려왔다.
- 성국아.
전태국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형, 집인데 왜 이렇게 조용히 말해요?”
- 나 집인데… 너랑 통화하는 거 감시할지도 모르잖아.
“형, 저랑 아무 사이 아닌데. 그렇게 통화하니까 더 의심받죠!”
- 아… 그런가. 성국아, 토요일에 정말 나와야 해. 안 그러면 엄마가 집이며 뭐며 다 옮기게 할지 몰라. 아빠는 반대하는데. 지금 이 일로 엄마랑 아빠가 사이가 원래도 안 좋은데, 최악으로 치닫는 중이야.
- 형이나 여자 연예인이랑 찍히세요. 전 전미진과 찍힐 생각이 없습니다.
- 성국아… 근데 나, 방무혁은 언제 만나?
전태국은 계속 속삭였다.
“월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요.”
- 알았어! 나 연습 열심히 하고 있을게. 근데 집에서 못하는데….
순간,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형, 여자 연예인 만나는 것보다 클럽 같은 데 가서 여자들이랑 편하게 어울리는 게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것을 잠재울 방법 아닐까요?”
- 클럽?
“홍대나 이태원 같은 데 힙합 음악 나오는 클럽이 요즘 유행이라고 하던데요. 방무혁 만나기 전에 연습도 하고요.”
- 그래? 알았어. 나 바로 알아보고 연습하러 가야겠다.
“형, 더 중요한 건….”
- 알지. 알아. 여자들과 어울려야지!
전태국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
전태국은 정말 저번 생의 업보인가?
저번 생보다 더 무거운 짐으로 내 어깨에 달라붙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지희가 빼꼼 나를 쳐다봤다.
“지희야, 무슨 일이야? 참, 오빠가 수학 문제 알려줘야지. 문제집 가지고 왔어?”
지희는 고개를 저었다.
“오빠, 지희 고민이 있어.”
지희는 조용히 문을 닫더니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지희가 무슨 고민이 있어?”
“오빠, 나 정우 오빠 있잖아. 민국이 오빠랑 연습생 하는 오빠 친구.”
“응, 정우가 왜?”
“정우 오빠 우리 집에 안 놀러 와?”
“그건 왜?”
“정우 오빠가 저번에 놀러 왔을 때, 엄청 잘 놀아줬거든. 그리고 또 우리 집에 놀러 온다고 했는데….”
지희는 몸을 배배 꼬았다.
설마, 지희가 정우를 좋아하는 건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지… 지희야.”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오빠, 정우 오빠 놀러 오라고 하면 안 돼?”
나는 최대한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전성국. 지희가 평생 내 동생으로 귀욤뽀짝하게 있을 수만은 없잖아.]
그래도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희는 동그란 눈을 똘망똘망 뜨며 나를 바라봤다.
[하아, 우리 지희의 첫사랑이 시작됐구나….]
“지희야, 오빠가 정우 오빠한테 내일 연락해볼게. 오늘은 밤이 늦어서 어려울 것 같아.”
“진짜?”
“응, 진짜.”
지희는 새끼손가락까지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지희의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신이 난 지희는 내 뺨에 쪽- 뽀뽀까지 하고는 발랄한 발걸음으로 내 방을 나섰다.
마침, 핸드폰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그리고 정말 운명같이 정우였다.
- 성국아, 내일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돼?
난 정우의 메시지를 읽씹 하고, 방무혁에게 득달같이 메시지를 보냈다.
- 무혁 아저씨, 민국이랑 정우 미국에서 에미넘도 만나고 연습 많이 했는데 바로 테스트해 보세요. 제가 보기에 둘 다 실력이 정말 엄청 많이 늘었어요. 제가 내일 저녁에 시간 되는데, 얼굴도 뵙고 어때요?
- 아하, 안 그래도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아서 하려고 했어. 성국이 네 말 들으니, 기대되는데!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
곧 정우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 성국아, 나 내일은 힘들 것 같아. 방금 대표님이 연락 와서 테스트하신대.
- 정우야, 아쉽네. 미국 가기 전에 우리 집에 놀러 와.
- 응, 성국아.
나는 전화를 그대로 꺼버렸다.
[지희야, 넌 아직 누굴 좋아하기에는 너무 어려. 이 오빠가 절대 허락 못 한다!]
* * *
다음 날, 아침 각종 인터넷 뉴스에는 홍대 클럽을 찾은 전태국의 사진이 실렸다.
- 힙합에 빠진 삼전 그룹의 후계자.
- 여자들에게 인기 폭발하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
찍힌 사진들마다 자연스럽게 여러 여자들과도 흥겹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래, 이게 바로 전태국이지.]
내가 알던 전태국은 원래 이런 아이였다.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나는 드디어 한시름을 놓았다.
주말 저녁에 삼전 호텔에 나가서 전미진과 마주 앉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 * *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백화점 안으로 진격하듯 들어갔다.
“엄마, 손 좀 놔줘. 내가 따라갈게.”
“너 도망갈까 봐 그래.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옷 좀 잔뜩 사서 가. 제발 그 후줄근한 후드티 좀 그만 입고.”
“엄마, 이건 내 시그니처라고. 사람들은 이제 후드티와 데님만 봐도 나인 줄 안다니까.”
“그건 그거고. 간혹 다른 옷도 좀 입고 그래.”
대한민국의 엄마는 도대체 말릴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자기는 들어가지도 않는 브랜드 매장으로 들어가서 내 옷을 이리저리 골랐다. 그러곤 문득 점원을 쳐다봤다.
“혹시 여기 팬티도 파나요?”
“누가 입으실 거요?”
“우리 아들이요.”
점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팬티를 몇 장 들고 왔다.
“이거면 잘 맞으실 것 같아요.”
“성국아, 팬티 좀 골라봐.”
[엄마, 나 팬티 고르는 거 창피하다고!]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엄마가 알아서 골라줘. 난 화장실 다녀올게.”
그러곤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갔다.
띠링. 띠링. 띠링.
메시지가 연달아 오는 게 느껴졌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보니, 전태국이었다.
무슨 일이지?
- 성국아, 나 방무혁 대표 회사에서 준비하는 걸 그룹 멤버와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 친구도 데리고 나온다는데, 너도 나올래?
- 아참, 넌 미성년자이지. 미안, 다음에 같이 보자.
- 어제 홍대 클럽 간 걸로 아빠한테는 엄청 혼났는데, 엄마는 오히려 반기는 것 같아. 내가 오늘 데이트하고 이야기해줄게.
나는 우선 화장실로 숨어들어서 전태국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방무혁 회사 걸 그룹 멤버를 만난다고?]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설마 #로맨스 #성공적의 주인공이 이번 생에서는 전태국이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