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나는 얼른 전태국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형, 여자 조심해요.
그러자 곧 허세스러운 전태국의 답이 날아왔다.
- 성국아, 네가 아직 미성년자라서 모르나 본데. 나 경험 많은 남자야. 네가 미국에서는 마성의 남자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마성의 남자라고.
[하아, 이 모지리….]
전태국이 한국에서 마성의 남자인 이유는 뻔했다.
바로 삼전 그룹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방무혁 회사의 걸 그룹이라니….
그 걸 그룹은 제대로 데뷔조차 못 하고 공중분해 된다.
그 이유는 돈 많은 남자들에게 작업을 걸고, 그걸 빌미로 협박한 한 멤버 때문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도대체 그 멤버 이름이 기억이 안 났다.
저번 생에서 내가 그런 멤버와 엮일 일은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후에 친한 재벌 중 한 명이 그런 협박을 당해서 사생활이 온갖 신문과 인터넷 커뮤니티에 뿌려지는 바람에 망신을 당해서 그 사건만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이름을 들으면 알까….]
나는 얼른 전태국에게 방무혁 회사의 걸 그룹 멤버 이름을 물었다.
- 형, 오늘 만나는 그 걸 그룹 멤버 이름이 뭐예요? 방 대표님 만나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게요.
- 성국아, 방 대표한테 그런 거 말하면 안 되지. 걸 그룹은 표면적으로는 연애 금지잖아. 암튼, 방 대표에게 모른 척해줘. 내일 보자!
[이럴 때만 왜 입이 무겁냐고! 전태국!]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지금 전태국의 상태로는 내가 말리면 말릴수록 더할 기세였다.
* * *
일요일 밤이 왔다.
이제 또 3일 밤만 더 자면 집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다.
나는 백화점에서 산 옷을 캐리어에 챙기기 시작했다.
똑. 똑. 똑.
내 방에 노크를 하는 유일한 존재.
“오빠, 지희 들어가.”
“응.”
내가 대답을 하자마자 지희가 들어왔다. 그리곤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빠, 또 미국 가는 거야?”
“응. 지희야. 오빠, 세 밤 더 자면 미국 가.”
“히잉.”
[역시, 우리 지희밖에 없구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란 건 역시 여동생을 두고 하는 말이었어. 단, 전미진 제외.]
나는 얼른 지희를 폭 안았다.
“지희야, 오빠가 미국 가서 슬퍼?”
“응.”
“지희야, 오빠는 말이야. 지희가 얼른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미국으로 유학 왔으면 좋겠어. 그럼, 오빠가 옆에서 공부도 많이 가르쳐주고….”
“오. 빠.”
지희가 단호하게 나를 부르더니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희야, 왜?”
“지희는 한국이 좋아.”
“지희야, 오빠도 한국이 좋아. 엄마, 아빠 곁에서 따뜻한 밥 먹고 자라는 건 좋은 거야. 하지만 사람이 크게 되려면….”
“그게 아니라. 난 정우 오빠 있는 한국이 좋아.”
와장창.
지금 억장 무너지는 소리가 내 귀에만 들리는 건가.
지희는 오빠인 내가 억장이 무너지든 말든 종알거렸다.
“오빠, 미국 가면 정우 오빠 언제 놀러 와?
“…민국이가 연습생이니까 같이 놀러 올 일이 있을 거야.”
“히잉. 또 언제 기다려.”
지희는 동그란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지희를 안은 두 팔에 힘이 쭉 빠졌다.
“전지희…. 오빠가 미국 가는 게 슬픈 게 아니었어?”
[어서 아니라고 말해줘! 어서!]
“오빠… 그것도 슬프긴 해.”
[슬프긴 하다고?]
지희를 안았던 두 팔이 땅바닥에 뚝 떨어졌다.
“오빠, 지희 졸려. 가서 잘게. 짐 잘 싸.”
“…….”
나는 아무 말도 안 한 채 지희가 떠나고 난 방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았다.
지희가 이렇게 빨리 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머리가 똑똑하고 공부에 관심도 많은 지희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미국으로 데리고 올 작정이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최고의 학교만 다니게 해서 지희가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시켜줄 생각이었다.
수학에 관심이 많으니 우선 의대 진학을 해서 공부를 하고, 남자친구는 내가 그동안 알아둔 인맥으로 집안과 인물, 인성 모두 훌륭한 녀석들로 소개해주려고 했는데… 내 계획이 최정우 때문에 다 어긋나고 말았다.
하필 최정우라니….
거기다 앞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게 될 아이돌이라니….
[지희야, 이 만남 오빠는 결사반대다!]
띠링.
이때, 내 속도 모르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나는 힘없이 핸드폰을 봤다. 전태국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이 시간에.
- 성국아, 나 큰일 난 거 같아. 내가 지금 바로 사람 보낼게. 삼전 호텔 스위트룸으로 올 수 있어?
[전태국,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난 지희에게 버림받아서 삼전 호텔까지 가서 저번 생의 동생 뒤치다꺼리해줄 정신은 없었다.
- 형, 3일 후에 다시 미국 가는데, 전 집에서 보낼게요.
거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전태국이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왔다.
- 성국아, 제발 와줘.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야.
설마?
“형… 혹시 걸 그룹 멤버인가 만난다고 하더니, 무슨 일 있었어요?”
- 성국아, 넌 어쩜 안 보고도 그렇게 잘 아니….
전태국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형,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예요? 이상한 사진 같은 거라도 보냈어요?”
- 성국아… 너 혹시 신기도 있니? 성국아, 제발 사람 목숨 한 번만 살려주라.
전태국은 애원하고 있었다.
“형, 대신 조건이 있어요.”
- 뭐든 말만 해.
“우선 가서 이야기할게요.”
* * *
삼전 호텔의 스위트룸.
내가 죽었던 바로 그곳이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가 죽기 전에 와인을 마시며 섰던 곳에 전태국이 초조한 얼굴로 위스키를 들이키고 있었다.
[사고치고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성국아….”
“형, 대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하나도 빠짐없이요.”
“그게….”
전태국이 망설였다.
[도대체 얼마나 쪽팔린 일을 한 거냐고!]
“형, 전재형 회장님 아시면 또 맞으실 것 같은데요. 맞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은 깔끔하게 수습하는 겁니다. 형, 삼전 그룹 후계자잖아요. 앞으로 여자랑 얽혀서 이런 일 다시 없다고 장담 못 해요. 형은 가만히 있어도, 형의 말처럼 대한민국에서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성의 남자가 되는 거잖아요.”
“성국아….”
전태국은 계속 위스키만 홀짝였다.
“형, 수습을 잘하는 것도 재벌이 갖춰야 할 덕목이에요. 이번에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따라서 전재형 회장님이 형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어요.”
이건 사실이었다.
저번 생에서 아버지였던 전재형 회장은 언제나 이런 말을 거침없이 했다.
- 사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습이야. 거기에서 그 사람의 클래스가 결정 나는 거란다, 성국아.
전태국이 위스키를 쭉 들이켜더니 결심한 듯 나를 쳐다봤다.
“그게… 갑자기 나희가.”
“걸그룹 멤버 이름이 나희예요?”
“응. 나희. 성은 잘 몰라. 그룹 내에서도 나희라고 부르는 것 같아.”
“계속 말씀하세요.”
전태국은 말을 이었다.
“사실 클럽 간 날에 같이 나희랑 놀았거든. 그러고는 계속해서 자기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다들 미인이라고, 같이 놀자고 그러는 거야.”
그거야 뻔한 이야기였다.
[어서 본론을 꺼내 봐, 전태국.]
속이 탄 나도 생수를 들이켰다.
“그러면서 나한테 갑자기 삼전 호텔 스위트룸 잡아서 놀면 안 되냐고 오늘 그러는 거야.”
그래서 오늘 여기에 온 모양이었다.
물론 호구인 전태국은.
“나야 당연히 오케이 했고, 솔직히 기대도 좀 됐고….”
[뭘 기대하냐고!]
생수병을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래서… 내가 호텔 잡고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나희가 친구들이랑 들이닥친 거야. 혼자도 아니고 진짜 여러 명이야. CCTV 확인하면 다 알 거야.”
“형, 그건 나중에 확인하고요. 여러 명이서 와서는요?”
“와서, 여기 미니바에 있는 술 다 마시고… 게임하고 서로 웃고 떠들다가 그랬는데. 성국아, 너도 알잖아. 내가 술 좀 마시는 거.”
전태국이 주량이 약하진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 술 마시자마자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지는 거야. 그러곤 기억이 없어.”
아무래도 술에 약을 탄 것 같았다.
“그러곤 눈떠 봤더니 내가 알몸으로 침대 위에 있는 거야. 막 당황해서 내가 나희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연락했더니 이걸 내 핸드폰으로 보냈어.”
전태국이 핸드폰을 건넸다.
거기에는 나희라는 여자와 나눈 문자부터 시작해서 사진들이 고스란히 있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대사도 있었다.
- 나희야, 내 머릿속에는 너. 그리고 오늘 밤 로맨스. 성공적. 이 생각뿐이야.
거기다 전태국의 알몸 사진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나는 한숨을 소리 나게 뱉었다.
“성국아, 미안.”
“형… 이들의 요구 조건이 뭐예요?”
“50억. 24시간 안에 50억 안 주면 이 사진이랑 문자 주고받은 거 ‘페이스노트’에 다 올리겠대.”
“흠…. 형, 어디까지 감당할 자신 있으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들은 잃을 게 없어서 아마 형이 시간을 끌면 진짜 ‘페이스노트’에 올리고 말 거예요.”
전태국의 얼굴은 점점 더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그, 그래? 그럼, 그냥 50억 주면 되지 않을까? 그 정도는 융통할 수 있어. 아버지한테 욕 좀 먹으면 되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 제 생각에는 이 일은 정공법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정공법이라니. 무슨 소리야?”
“경찰에 신고하는 거죠.”
“뭐?”
전태국의 눈이 커졌다.
“난 이게 세상에 알려지는 게 싫단 말이야! 그래서 너 부른 건데!”
“형, 그럼 50억 주실 거예요? 50억 주면 얘들이 가만있을까요? 이 사진 원본 그대로 지울까요? 이번에 한번 어설프게 막으면, 아마 평생 이들은 호구 잡았다고 생각하고 돈 필요할 때마다 형을 협박할 거예요.”
“그럴까….”
전태국의 성격으로 봐서는 그러고도 남았다.
“원본이라고 해도. 분명 어디다 옮겨놨을 거예요.”
“정말 경찰에 신고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물론 나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형… 제가 도와드릴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 뭐야?”
“방무혁 대표 회사 걸 그룹이잖아요. 이거 신고하면 이 그룹 완전히 해체될 거예요. 방무혁 대표가 이 그룹에 쏟아부은 돈이 상당할 텐데… 거의 망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거기다 방무혁네 회사는 제 동생과 친구가 연습생으로 있는 회사잖아요.”
전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 이 일 해결되면 방무혁 대표 회사에 투자해주세요. 망하지 않게요. 50억보다 훨씬 덜 들 거예요. 단, 아무 조건 없이요.”
“아, 알았어.”
“그럼, 이제부터 제가 하는 대로 하세요. 우선 양 비서 아저씨 불러주세요.”
“그럼, 우리 아버지도 아는 건데?”
“어차피 기사 터지면 다 아실 거예요. 양 비서 아저씨의 힘이 필요해요.”
“어, 알았어.”
* * *
양 비서는 한 시간도 안 돼서 스위트룸에 도착했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했다.
양 비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전재형 회장도 여자 문제는 복잡했지만,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국 군 의견은 50억을 준비하자는 건가요?”
“아니요. 우선 삼전 법무팀에 이야기해서 이 문제 해결 가능한 믿을만한 사람들 포진시켜 주세요. 그리고 태국이 형은 나희에게 연락해서 돈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세요. 재벌이라고 50억이 뚝딱 떨어질 줄 아는데, 그런 거 아니라고 달래면서요.”
“어. 그리고 다음엔 뭐 하면 돼?”
“경찰에 신고해서 협박범으로 이들 조사하고, 바로 압수 수색해서 원본 확보하는 겁니다. 그래야 깔끔하게 원본 입수할 수 있고, 이들도 평생 붉은 글씨 새겨져서 형 이야기는 입 밖에도 못 낼 거예요. 기사는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는데, 아마 한계가 있을 거예요.”
“이런 건 저희 쪽에 최대한 유리하게 기사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협박한 건 사실이니까요. 술에 약 탄 것도 어필하고요. 그리고… 기사 나가서 떠들썩해지려고 하면, 이거 터트리세요.”
나는 노트북으로 ‘페이스노트’ 하나를 양 비서에게 가리켰다.
“이분은 누굽니까?”
“신영아, 라는 분이세요. 미술 분야 실력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거짓이 상당합니다. 이걸로 형 사건 덮으세요.”
“성국 군, 겨우 유명하지도 않은 이런 사람보다는 연예인 스캔들이 낫지 않을까요?”
“이분 파보면 그런 말 못 하실 겁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