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스위트룸으로 돌아온 전태국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나는 모든 게 대충 예상이 됐다.
“성국아… 네 말대로 아버지가 날 전혀 혼내지 않았어. 거기다 방무혁 대표 회사에다가 투자하는 것도 위로금 조로 그냥 하래.”
“형, 이따 6시에 방무혁 아저씨가 여기로 오기로 했어요.”
“진짜? 나 오디션 볼 수 있는 거야?”
전태국은 반색을 했다.
도대체 지금까지 자신이 친 사고는 까맣게 잊고 어쩜 저렇게 해맑게 웃지?
나는 참을 인 자를 뼈에 새기는 수준이었다.
“참, 6시 전까지 집에 좀 다녀올게요.”
“성국아, 내가 방무혁 대표 거하게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뭐 좋아해? 뭐든 주문해 놓을게.”
“아저씨, 엄청 미식가예요. 형이 알아서 시키세요. 저는 집에 다녀오면서 아빠 보쌈 하나 포장해 올게요.”
“그거면 됐지!”
전태국은 이미 웃통을 벗고 침대에 인사불성이 된 채 누워 있는 자신의 사진이 인터넷에 쫙 퍼진 것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쯧쯧, 정말 태평하긴….]
사람들은 어떤 사건은 참 잘 잊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어쨌든 전태국은 평생 이 일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 * *
띵.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양 비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 비서는 어제 전태국의 일을 수습하느라 한숨도 못 잔 듯 피곤해 보였다.
“성국 군, 고생이 많았어요.”
“양 비서님이야말로 고생 많이 하셨죠. 잠 좀 주무셨어요?”
“성국 군을 회장님께 데려다주고는 퇴근하려고요.”
“그럼, 다른 분께 저희 아빠 가게에서 보쌈 하나만 포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태국이 형한테 집에 다녀온다고 거짓말하고 나오는 길이거든요.”
“물론이죠. 다시 호텔로 돌아오실 거죠?”
“네, 6시에 스위트룸에서 나희라는 걸 그룹 멤버가 속한 기획사 대표님 만나기로 했거든요.”
“방무혁 말씀하시는 거죠?”
“네.”
양 비서는 전태국 일로 방무혁의 회사까지 다 조사한 모양이었다.
“회장님은 어디 계세요?”
“지금 사계절 호텔 스위트룸에 계십니다.”
사계절 호텔 스위트룸이라….
삼전 호텔을 이용하기 어려울 때 나도 즐겨 사용하던 곳이었다. 사계절 호텔에서 바라보는 남산의 모습은 언제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가시죠. 그리고 현재 상황 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차로 이동하면서 이야기하죠.”
“네….”
양 비서는 내 옆에서 마치 예전처럼 나를 안내했다.
* * *
사계절 호텔로 이동하는 차 안.
일부러 라디오를 조용히 틀어놔서 적막함은 없었다.
“회장님께서 태국 도련님을 만나기 전에 야당의 대통령 후보인 임명백의 비서가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당연히 예상한 것이었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양 비서는 말을 계속 이었다.
“임명백 후보 측에서는 저희가 신영아 사건을 터트려준 것을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른 회사의 샐러리맨 출신인 임명백 후보와 삼전은 인연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덕분에 연결고리가 생겨서 회장님께서 무척 만족해하시고 있습니다.”
“의도하진 않았습니다.”
[한 5% 정도는 우연이라고… 항상.]
“알고 있습니다. 우선 회장님을 만나보시지요.”
원래 화살을 쏠 때야 모두 10점을 맞추고 싶어 하지만, 그날의 바람과 온도, 습도에 따라서 화살은 휘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완벽하게 10점에 꽂히는 날도 있는 법이다.
* * *
사계절 호텔의 스위트룸 문이 열렸다.
바로 앞으로 보이는 남산의 푸른 절경이 들어왔다.
전재형 회장은 바로 그 앞에 있었다. 한 손에 와인을 든 채.
저번 생에서 내가 와인을 특별히 좋아했던 이유는 아버지 전재형 회장 때문이기도 했다.
전재형 회장은 굉장한 와인 애호가였고, 나 역시 그렇게 성장해서 와이너리까지 사들여서 애정을 쏟았다.
전재형 회장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고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 기억하지.]
지금 전재형 회장은 속으로는 무척 만족스럽지만,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성국 군, 어서 오게. 자네가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나이면 참 좋을 텐데….”
[전재형 회장, 이번 생에서 우리가 와인 마시면서 시시덕거릴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마음을 다잡고 거짓 미소를 지었다.
“몇 년만 기다려주세요.”
“그러지… 이리 앉게.”
전재형 회장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무척 차분하고 친절했다.
원래 사람의 의도는 목소리와 태도에서 나타났다. 그는 분명 나에게 원하는 게 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면서 양 비서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
“네… 임명백 후보 측에서 다녀가셨다고요.”
“우리 삼전이 신영아 사건을 터트려준 것을 고마워하더군.”
[당연 고마워하겠지. 이 일로 여론이 완전 우세해질 텐데.]
전재형 회장은 조용히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사실 자네가 그 뒤에 있다는 건 알리지 않았네.”
“괜찮습니다. 전 태국이 형 구하려고 한 일이었고, 솔직히 신영아 씨를 의심하긴 했지만 검증은 삼전 측에서 해주신 거잖아요.”
“양 비서가 자네에 대해서 매우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 양 비서가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칭찬하는 경우가 잘 없거든.”
“과찬이시네요.”
[나 전성국이야.]
살짝 어깨가 솟으려는 것을 애써 내렸다.
“양 비서 말로는 자네가 컨트롤 타워가 돼서 모든 것을 지휘했다고 하더군.”
“양 비서님께서 겸손하신 거예요. 저는 그냥 의혹만 던졌을 뿐이에요.”
“듣기로는 아닌 것 같던데….”
전재형 회장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마셨다.
[전 회장, 나도 다 알아. 내가 다 지시해서 움직인 거.]
나는 생수를 천천히 마셨다. 원래 급히 마신 물이 체하는 법이니까….
“솔직히 와이프는 자네가 태국이 옆에 있는 것을 굉장히 안 좋게 보고는 있네.”
“말하기 민망할 정도의 오해를 하시는 것 같아서 저 역시 조금 힘들었습니다.”
“사실 내가 태국이에게 자네 곁에서 생활부터 일까지. 모든 것을 보고 배우라고 했거든.”
사실 삼전 그룹의 묵인 없이 전태국이 나에게 방까지 하나 내주면서 지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았다.
“자네가 미국에서 일으킨 ‘페이스 노트’ 사업이나 정재계의 인맥 관리. 거기다 투자까지 대단하다고 들었네.”
“원래 이 바닥이 조금만 잘나가도 과장을 많이 합니다.”
“과장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네.”
삼전이라면 물론 벌써 내 뒷조사도 샅샅이 했을 것이다.
전재형 회장은 계속 읊조리듯 내 칭찬을 이어갔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전재형 회장이 칭찬에 인색한 건 유명했다.
칭찬보다는 채찍이 기업을 운영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재형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재형 회장이 기업을 도약시킨 80년대와 90년대에는 이 기조가 잘 통하기도 했다.
“참, 우리의 인연도 역사가 깊네.”
[그럼, 나 삼전 그룹 아역 모델 출신이잖아. 임선미와의 불륜도 다 지켜봤다고.]
전재형 회장은 잠시 과거를 떠올리는 듯한 얼굴로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자네는 기억 안 나겠지만, 자네가 날 처음 본 순간 한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
[설마… 아빠? 이건 완벽한 나의 가장 큰 흑역사인데.]
나는 입을 앙 다물었다.
“사실 오늘 자네를 만나자고 한 것은 자네에게 제안을 하기 위해서네.”
오늘의 제안이 뭔지 나는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우리 태국이가 삼전 그룹의 후계자이긴 하지만, 사실 많이 부족한 건 나도 잘 알고 있네. 근성이 없다고 해야 할까. 공부 머리도 좀 부족하고. 그래도 크게 어긋나지 않고 우리 뜻을 따라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고 있긴 하지만.”
[크게 안 어긋나긴. 지금 힙합 한다고 완전 나대잖아, 전 회장.]
전재형 회장은 낮은 한숨을 쉬더니 뚫어져라 나를 쳐다봤다.
“사실 난 예전부터 태국이가 내 뒤를 이을 후계자로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나에게 다른 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네도 잘 아는 미진이도 후계를 할 그릇은 못 되네.”
전재형 회장은 자식들도 신입사원 면접 보듯 분석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구조로는 태국이가 내 자리를 물려받게 될 것인데. 젊은 양 비서도 태국이 곁을 떠나서 자신의 인생을 찾아갔고…. 한마디로, 태국이를 서포트해줄 인물이 없네. 물론 자네에게 우리 태국이를 서포트하는 하찮은 일을 맡길 생각도 없네.”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거야, 전 회장.]
전재형 회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뗐다.
“내 제안은 말일세. 자네가 삼전 그룹의 실질적인 오너가 되어줬으면 하네.”
[그 말인즉슨, 삼전에서 월급 엄청 받으면서 노예 하라는 거지?]
물론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쉽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는 전재형 회장의 애를 좀 더 태우고 싶었다.
“물론 쉽지 않을 결정이라는 것 잘 아네. 실질적인 오너가 된다는 말은 그에 합당한 삼전의 지분과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말일세. 업계 최고라는 말은 세계 최고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나는 턱을 매만졌다.
[결국, 월급쟁이 사장하라는 말이잖아. 전 회장?]
“물론 지금 당장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아네. 미국에 가 있는 동안….”
“회장님.”
나는 전재형 회장의 말을 잘랐다.
저번 생에서도 못해본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 해보고 싶던 일이기도 했다.
“질문 있나?”
“회사의 실질적인 오너라면, 삼전을 저에게 주시겠단 의미일까요?”
나는 직구를 날렸다.
예상대로 전재형 회장은 당황했다.
잘 키운 노예 하나 비싼 값에 들이려는 게 아마 전재형 회장의 속셈이었을 것이다.
‘페이스 노트’가 상장 전이라 아직 삼전보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상장되는 순간 나는 세계적인 부자가 될 것이다. 거기다 얼마 전에 인수한 너튜브의 지분도 5%가 있었다.
겨우 삼전의 오너 자리가 아쉬울 게 없었다.
“성국 군… 그러니까, 자네 말처럼 실질적인 오너가 된다는 것은 삼전 운영의 모든 권한을 자네에게 주겠다는 의미이네. 단, 태국이도 겉으로는 회장직을 수행해야겠지.”
“흠… 제가 말한 것은 그런 자리나 권한이 아니라 태국이 형만큼 저에게도 삼전의 지분을 주실 수 있냐고 물은 것이었습니다.”
전재형 회장은 더 당황했다.
내가 지금 말한 것은 나 역시 삼전 그룹의 후계자인 전태국과 동일한 지분을 달라는 것이었다.
“허허. 자네 지금 거절을 그렇게 말하는 건가?”
“네, 회장님. 저는 태국이 형과의 친분 때문에 이 일을 도운 것이지. 별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삼전 그룹은 제가 운영하기에는 좀 고리타분해서요. 저는 이번 생에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도전을 해보면서 살고 싶거든요.”
저번 생에서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로 도전보다는 안정과 유지를 위해서 삼전이라는 틀에 나를 맞춰 살았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번 생이라…”
전재형 회장은 내 말을 곱씹었다.
“인생은 한 번뿐이잖아요. 후회 없이 살고 싶습니다.”
“역시 자네는 삼전이 담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었군. 내 욕심이 과했어.”
“과찬이세요. 제가 운영하기에는 삼전이 큰 그룹이죠.”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오늘 만남은 평생 비밀로 해주게. 태국이에게도.”
“그럴 생각입니다. 전 태국이 형이 삼전 그룹의 좋은 오너가 될 거로 생각하거든요.”
[그래야, 영원히 내 호구도 되어주는 거지.]
나는 생수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문득 멈춰서서 전재형 회장을 쳐다봤다.
“회장님….”
“뭔 할말 있나?”
“태국이 형 서포트할 비서로 한 명 추천해도 될까요?”
“믿을 만한 사람인가?”
“태국이 형이 자유로운 편이잖아요. 제 생각에는 좀 고문관 스타일의 비서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게 누군가?”
“현재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하고 있는 박성희 비서 찾아보세요. 서울대 출신의 인재입니다. 일 처리도 칼 같고, 결정적으로 한 치의 벗어남을 허용치 않거든요. 그런 사람이 태국이 형한테는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알아보겠네.”
나는 사계절 스위트룸을 그대로 나왔다.
전태국과 박성희라?
정희를 사이에 둔 연적이기도 하지만 전태국에게는 박성희 같은 비서가 필요해 보였다.
* * *
삼전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서자 요란하게 힙합 음악이 들려왔다.
방무혁이 벌써 온 건가?
“형, 보쌈 가져왔어요.”
“어! 성국아, 이리 와봐!”
전태국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실로 가자 이미 술에 얼큰하게 취한 방무혁이 전태국의 랩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어. 나희 때문에 속도 상하고… 암튼 태국이가 준 술 덕분에 흥이 좀 오르네.”
[흥이 오른 게 아니라 이미 취한 거 같은데?]
전태국이 보쌈을 받아들면서 신이 나서 종알거렸다.
“성국아, 나 랩 잘한다고 방 대표가 엄청 칭찬해줬어. 나 힙합 가수로 데뷔해도 될 것 같대.”
나는 술에 취한 방무혁을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아저씨, 진심이세요?”
“성국아, 당연히 진심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