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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09화 (209/231)

제209화

띵동.

초인종이 한 번 울리자마자 전태국이 화난 얼굴로 벌컥 문을 열었다.

나와 박성희 비서를 본 전태국은 뭔가 욕 같은 것을 쏟아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두 사람 뭐야?”

“형, 무슨 일 있었어요?”

“아침부터 우리 방 청소하라고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도 초인종을 울리기에… 암튼 들어와.”

전태국의 방은 여전히 어제 술을 진탕 마신 흔적으로 가득했다.

테이블마다 술병과 먹다 만 안주가 있었다.

전재형 회장은 아무리 그래도 첫 만남에 전태국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실례 같아서 방 청소를 시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전태국의 일부분이긴 하다.

박성희 비서를 본 전태국은 약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성국아, 이 사람 뭐야?”

그러자 박성희 비서는 얼른 전태국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전태국 도련님을 모시게 될 박성희 비서라고 합니다.”

“뭐어?”

물론 전태국은 당황했다.

자신의 연적이 지금 자신의 비서라고?

“형, 나도 로비에서 만났어요. 오늘부터 형 비서라고 하더라고요.”

“박성희 씨. 난 당신을 비서로 뽑은 적이 없는데요?”

전태국은 어이없는 얼굴로 박성희를 쳐다봤다.

“당연히 도련님이 저를 채용하시진 않았죠. 양 비서님이 직접 연락 주셨습니다. 제가 워낙 청와대에서도 일을 잘해서 여기저기서 추천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여기저기 추천. 그건 바로 나였다.

나는 모른 척 스위트룸 창문에 서서 서울을 내려다봤다.

뒤에서는 박성희 비서가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말이 들렸다.

“앞으로 도련님을 보좌할 계획이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참고로 저는 서울대 인문계 수석이었습니다. 아마 미국에서 대학 겨우 다니는 도련님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아, 뭐야! 내가 무슨 대학을 겨우 다녀!”

“샌프란시스코 삼전 지사에서 많이 도와주신다고 들었는데요. 직원분들 일도 많은데, 도련님 학업까지 도와야 해서 저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양 비서님 말씀하셨습니다.”

“아하… 정말 말도 안 돼!!!”

전태국은 절규했다.

* * *

한 시간 후, 모든 것을 포기한 전태국의 앞에는 평양냉면이 놓여 있었다.

“을지로 우려옥에서 막 공수한 평양냉면입니다. 해장에는 그만이죠.”

전태국은 정말 살기 싫다는 눈으로 박성희 비서를 쳐다봤다.

“나, 아기 입맛이라 평냉 맛 모르거든. 박 비서, 알아둬.”

“네, 도련님.”

박성희 비서는 그 자리에서 얼른 수첩에 필기를 했다.

물론 이 평양냉면은 내가 먹고 싶어서 시킨 것이었다.

“형, 잘 먹을게요.”

“성국아, 넌 어린 애가 평냉 맛을 좀 알아?”

[나 평양 옥류관에 가서 진짜 평냉 먹고 온 사람이야. 왜 이래.]

나는 배시시 웃었다. 순진하게!

“형, 냉면이 다 같은 거 아니에요?”

“너도 모르는 게 있구나. 어서 먹어봐.”

“네, 형.”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나는 우려옥의 평양냉면을 흡입했다.

[역시 이 맛이지.]

이 집 냉면을 좋아해서 저번 생에서는 자주 공수해서 먹었다.

“성국아, 넌 참 입맛에 편견이 없구나.”

“형, 드셔보세요. 처음엔 아무 맛 안 나는 것 같아도 먹다 보니 고소한 맛이 올라와요.”

“하아, 그래. 먹어보자.”

전태국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성희 비서가 전태국 옆자리에 앉았다.

전태국이 날 선 눈으로 박성희 비서를 쳐다봤다.

“박 비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저도 밥을 먹어야 일을 하죠. 도련님 점심시간이 제 점심시간 아니겠습니까. 어서 드세요, 도련님.”

전태국은 할 말을 잃었다.

젊은 양 비서는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보통은 젊은 양 비서는 곁에서 전태국이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관찰하고는 이동 중이거나 짬이 날 때 식사를 했다.

하지만 박성희 비서는 달랐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전태국, 이제 꼼짝 못 하겠어.]

전태국은 한숨만 푹푹 쉬더니 우려옥의 평냉 육수만 쭉 들이켜고는 룸서비스로 각종 음식을 시켰다.

“형, 방무혁 대표랑은 대화 잘했어요?”

“몰라… 난 잘 기억도 안 나.”

저러는 것 보니 방무혁 대표에게 단칼에 차인 게 쪽팔리긴 한 모양이었다.

“형, 방무혁 대표 회사에 투자는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어… 그냥 하기로 했어.”

“형, 너무 무리한 조건이면 제가 방무혁 대표 사이에서 조율해 볼게요.”

물론 난 모든 조건을 다 알고 있었다.

앞으로 3년간 방무혁 대표 회사에 매년 20억 원 투자.

물론 향후 어떤 대가를 바라는 투자는 아니었다.

20억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큰돈은 아니었지만, 현재 방무혁 대표에게 3년 동안 매년 20억이라는 금액은 생명수와 같았다.

그리고 3년 후에는 ‘세븐즈’의 실체로 점점 드러날 테니, 그 이후로는 걱정이 없었다.

박성희 비서는 옆에서 평양냉면을 거의 흡입하고 있었다.

“박 비서님, 평냉 좋아하시나 봐요.”

“제가 이 집 냉면 정말 좋아하거든요.”

“박 비서, 미국 가면 내 입맛에 맞는 맛집이나 좀 검색해둬.”

“네, 도련님.”

박성희 비서는 냉면을 그릇째 들고 마셨다.

“성국아, 수요일에 미국 갈 때까지 너희 집에 가 있으면 안 돼? 나 너희 집 집밥이 너무 그리워.”

“형, 형네 집은 한남동이잖아요. 집밥이 그리우면 집에 가야죠.”

“우리 집 집밥이야 이모님이 하시는 거지. 그리고 새 이모님이 오셨는데, 영 내 입맛에 안 맞아. 천연 조미료만 쓴다는데. 도대체 조미료면 조미료지. 천연은 또 뭐야.”

“그건 도련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박성희 비서가 끼어들었다.

전태국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건 젊은 양 비서라면 절대 할 행동이 아니었다. 보통 이렇게 생활을 밀접하게 보좌하는 비서들은 대부분 대화에 잘 끼어들지 않았다.

[앞으로 두 사람의 케미가 기대되는데….]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우려옥의 육수를 쭉 들이켰다.

* * *

“오빠아아아아!”

내가 집에 들어서자 지희가 와락 안겼다.

[지희야, 애교도 소용없어. 너 정우 좋아하잖아. 치이.]

나는 와락 안긴 지희의 등을 토닥이며 거실로 들어섰다.

이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바로 단발머리, 김미영이었다.

“성국아, 오랜만이지?”

“안녕하세요!”

[단발머리, 오랜만이야. 아니지, 김미영 대표된 지 오래지.]

나는 김미영을 반겼다.

김미영은 이 집안의 은인과 같은 존재였다.

처음 내 외모를 알아보고 아역 모델에 지원할 수 있게도 해줬고, 그 덕분에 나는 시드 머니를 모아서 우리 집안을 여기까지 일으킬 수 있었다.

김미영은 나를 뿌듯한 눈길로 바라봤다.

“성국이 엄마, 성국이 언제 이렇게 멋지게 큰 거예요? 길 가다 보면 모르겠어요.”

“우리도 가끔 볼 때마다 많이 컸다는 생각은 해요.”

“성국아, 키가 몇이야?”

“안 재봐서 모르겠어요.”

“180cm는 족히 넘겠는데? 지희가 아니라 성국이가 모델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김미영은 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잠깐, 내가 아니라… 지희가 모델을 한다고? 설마… 이 어설픈 얼굴이?]

나는 안겨 있는 지희의 얼굴을 쳐다봤다.

우리 집의 우월한 유전자가 여기저기 비껴간 얼굴인데….

“대표님, 지희가 모델을 해요? 무슨 모델이요?”

“아직 낙점된 건 아니고 오디션 봐야 해.”

“그니까 무슨 모델인데요?”

[이 얼굴로요?]

“아하, 학습지 모델이야. 지희가 워낙 똘똘하잖아. 그런 이미지를 원하는 회사가 있어서….”

[난 또 뭐라고…. 그래, 우리 지희가 똘똘하게는 생겼지.]

나는 다시 지희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오빠, 지희 이뻐?”

“응. 이쁘지.”

[오빠 눈에만.]

지희는 내 말에 신이 나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췄다.

[이건 내가 어릴 적에 잘 추던 건데…]

“대표님, 지희 오디션장에 저도 같이 가도 돼요?”

“성국아, 넌 미국 가야지.”

“지희 오디션인데, 보고 가야죠. 출국 며칠 미루죠, 뭐.”

[엄마, 내가 민국이도 특훈시켜서 모델 합격시켰어. 지희도 오늘 좀 훈련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지희는 좋아서 내 품에 폭 안겼다.

“오빠, 쵝오!”

나는 지희 귀에다가 속삭였다.

“지희야, 오빠가 좋아? 정우 오빠가 좋아?”

“흠… 둘 다 좋아.”

[그래, 지희야. 오늘 스파르타 한번 가자! 너도 이제 밥값 해야지!]

* * *

지희의 오디션장에는 나와 전태국 그리고 박성희 비서도 함께였다.

옆에서 전태국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종알거렸다.

“성국아, 내가 여기 왜 와야 하는 거야?”

“지희가 오늘 모델 오디션 하거든요.”

“그니까. 내가 왜 와야 하는 거냐고?”

[그거야. 삼전 그룹 후계자와 인맥이 있으면 유리하니까!]

나는 어젯밤 내내 졸리다고 눈을 비비는 지희를 깨우면서 표정 연습을 시켰다.

민국이는 세 살에 한 밥값을 지희는 막내라 많이 봐줬다. 거기다 집안 사정이 좋아진 이후에 지희는 태어나서 나름 귀하게 자라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집안에 태어났으면 밥값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나는 지희의 모델 데뷔를 위해서 내가 아는 온갖 인맥이란 인맥은 모두 다 동원했다.

그중에 가장 큰 인맥이 바로 삼전 그룹의 후계자인 전태국이었다.

오늘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지희가 내 앞을 오가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왔다.

“오빠! 지희, 걱정돼.”

“뭐가 걱정돼?”

“지희 떨어지면 어떡해.”

“떨어져도 괜찮아. 지희가 모자라서 떨어진 게 아니라… 이 광고의 이미지랑 안 맞아서 떨어진 거거든.”

이때, 옆에서 전태국이 나섰다.

“지희야, 오빠 기억하지?”

“네! 태국이 오. 빠.”

그 순간 전태국의 입이 귀까지 걸리는 게 보였다.

전태국은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전형적인 애정결핍 캐릭터였다.

“지희야, 이 광고 찍고 싶어?”

“네에… 근데 자신이 없어요. 다른 모델들이 너무 이뻐요. 오. 빠.”

나는 팔짱을 낀 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 나는 지희의 연기 지도를 위해서 밤을 불살랐지만 지희는 내 기대에 크게 호응하지 못했다.

민국이는 역시 연예인이 될 자질을 타고났는지, 내 가르침을 마구 흡수했지만 지희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세운 플랜B가 막 가동 중이었다.

플랜B는 바로 전태국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전태국은 지희의 말에 다른 모델들을 쳐다봤다.

“지희야, 이 오빠 눈에는 지희가 제일 이쁜데?”

“오빠, 진짜?”

“당연하지!”

“오. 빠. 지희 떨어지면 맛있는 거 사줘요. 짜장면.”

“누가 성국이 여동생 아니랄까 봐 짜장면이야. 지희야, 너 떨어질 일 절대 없어. 그리고 이 오. 빠가 짜장면은 붙어도 사준다!”

“와아아아! 오빠, 쵝오!”

지희는 전태국의 품에 와락 안겼다.

물론 하나도 질투가 나지 않았다.

이건 다 나의 플랜B에 있던 내용이었다.

* * *

“지희야, 모델로 뽑힌 거 축하해!”

전태국은 마치 여동생이 모델에 뽑힌 것마냥 기뻐했다.

“다들 드시고 싶은 거 다 시키세요. 아니지, 주방장 불러서 오늘 특선 요리 주문해야겠네.”

우리는 오디션을 마치고 삼전 호텔 중식당에 와있었다.

지희는 어쨌든 모델이 됐다.

지희보다 백 배는 이쁜 모델들을 다 제치고.

물론 중간에 전태국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결과는 뒤바뀌었다.

떨어진 모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세상은 원래 불공정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지희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지희야, 오빠가 지희 광고 찍는 거 구경 가도 돼?”

나보다 더한 여동생 바보가 내 눈앞에 있었다.

“도련님, 저희 이틀 후에 출국입니다.”

“박 비서는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제가 도련님 비서로 뽑힌 이유가 융통성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하아-.”

역시 예상대로 전태국을 잡을 사람은 박성희 비서뿐이었다.

이때,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 번호는 따로 뜨지 않았다.

나는 얼른 복도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영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 성국 군 맞지?

“누구시죠?”

- 나 도날드 트럼펫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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