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10화 (210/231)

제210화

도날드 트럼펫이라고?!

미간이 구겨졌다.

도날드 트럼펫이 나를 찾을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연락 주신 거죠?”

- 나도 ‘페이스 노트’ 하나 개설하고 싶거든. 성국 군.

“그거야 매뉴얼 보고 하시면 되죠. ‘페이스 노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거든요.”

- 내 말은 자네를 한번 보고 싶단 이야기이지. 만난 김에 ‘페이스 노트’ 개설도 하고 말일세.

“저를 왜 보고 싶으신데요?”

나는 직구를 던졌다.

도날드 트럼펫이랑은 말이 길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 흠… 한국이라고 들었는데, 맞나?

이미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네.”

- 미국에는 언제 돌아오나?

“다음 주에 갑니다.”

- 그럼, 그때 나 한번 보지.

“제가 미국 도착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 그러게.

약속의 주도권은 나에게 넘어왔다.

도날드 트럼펫처럼 모든 게 경쟁인 사람과는 뭐든 첫인상이 중요했다. 한번 끌려다니기 시작하면 영원히 끌려다니는 법이었다.

“오빠, 성국이 오빠!”

지희가 룸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희는 입가에 짜장면을 잔뜩 묻히고는 내게 어서 오란 손짓을 했다.

“오빠, 어서 먹어. 짜장면 불어!”

“알았어, 지희야.”

나는 얼른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전태국이 부러운 듯 지희와 나를 쳐다봤다.

“나도 저런 여동생 한 명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네….”

“형은 결혼해서 딸을 낳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전태국인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박성희 비서가 종알거렸다.

“도련님, 지희 같은 귀여운 여동생을 가지는 것도. 결혼도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십니다.”

“박. 비. 서.”

전태국은 어금니를 꽉 물고 박성희 비서를 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성희 비서는 팔보채까지 야무지게 먹고 있었다.

어쨌든 전태국 덕분에 지희가 캐스팅됐으니, 조금 기분을 풀어주기로 했다.

“태국이 형, 지희 촬영 보고 미국에 같이 가요.”

“진짜? 나 진짜 구경 가도 되지?”

[당연히 되지. 그래야 감독이라고 갑질하는 것들 조용히 하지.]

“물론이죠. 박 비서님, 저희 티켓 날짜 좀 촬영 다음 날로 바꿔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박 비서. 내 비서인데, 어찌 성국이 말을 더 잘 듣는 것 같은 건 내 느낌일까?”

“느낌 아니고 맞습니다. 양 비서님이 그러시더라고요. 판단이 안 설 때는 성국 군에게 물어보라고요.”

“진짜 다들 너무하네!”

이때, 지희가 전태국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태국이 오빠, 화내지 말고 어서 짜장면 먹어. 불어.”

“어… 지희야. 오빠 화낸 거 아니야. 그냥 의견 조율한 거야.”

전태국은 지희의 말 한마디에 화를 풀고 짜장면을 흡입했다.

* * *

삼전 호텔 로비는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내가 지희의 손을 잡고 막 로비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이때 익숙한 여자 한 명이 다가왔다.

“어머, 성국아!”

저번 생의 여동생 전미진이었다. 현재 전태국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와는 삼전 유치원 동창이었다.

“성국이 맞지?”

나는 얼른 전태국의 옆구리를 찔렀다.

“형이 여기 있다고 말했어요?”

“아니야. 전미진이 방학이라 삼전 호텔에서 사는 모양이야. 나 쟤 전화번호도 없어.”

전미진이 자신의 호텔에서 노는 거야 내가 여기서 짜장면 먹는 것보다 더 당연한 일이었다.

“성국아… 와우! 너 정말 멋있어졌다.”

이때, 엄마가 조용히 내 곁으로 왔다.

“성국아, 누구야?”

“태국이 형 여동생이요.”

“어머, 미진이? 삼전 유치원 동창?”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누가 네 어머니인데?]

전미진은 엄마에게 다가가 살갑게 인사를 했다.

“어머니, 저 미진이요. 기억하시죠?”

“그럼. 아기 때만 봤는데, 이제 완전히 아가씨 다 됐네.”

“어머니, 저 성국이랑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좀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래. 성국아, 우리 먼저 주차장에 가서 기다릴게.”

“어머니, 안 그러셔도 돼요. 저희 비서님이 성국이 데려다줄 거예요.”

나는 얼른 엄마에게 속삭였다.

“엄마, 나 그냥 같이 갈래.”

그러자 엄마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성국아, 네 또래 친구 좀 만나. 암튼 우리 먼저 갈 테니, 일 보고 와.”

전태국이 나를 향해 찡긋 윙크까지 했다.

“성국아, 꼭 살아서 보자!”

그렇게 모두들 나만 삼전 호텔 로비에 덩그러니 남겨둔 채 떠났다.

* * *

“성국아, 우리 호텔 망고 빙수 정말 유명해. 이거 먹어봤어?”

“난 단 건 별로라.”

삼전 호텔의 망고 빙수는 이것만 먹기 위해서 호텔을 찾을 정도로 유명한 메뉴였지만, 나는 저번 생에서도 썩 즐기지는 않았다.

“근데, 미진아. 나한테 할 말 있어?”

“오랜만에 만난 동창끼리 무슨 그렇게 서운한 말을 하니, 너는.”

[우리가 동창 이전에 저번 생에서는 남보다 못한 가족이었거든.]

나는 말을 줄이기 위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망고 빙수를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성국아, 단 거 별로라도 이건 맛있지?”

“응. 괜찮네.”

[말하기 싫어서 먹는 거야, 전미진.]

전미진은 괜히 내 앞에서 머리를 한 손으로 넘기며 예쁜 척을 했다.

정말 운명은 잔인했다.

왜 하필 그토록 싫어하는 저번 생의 여동생이 나를 남자로 보는 것일까?

전태국이야 호구라도 잡지. 패션 사업한다고 나대는 게 미래인 전미진은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성국아, 난 네 소식 들을 때마다 마치 딴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거든. 근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까 말도 안 나와.”

“왜? 멋있어서?”

그렇다면 정 떨어지게 잘난 척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나는 살면서 너처럼 멋있는 사람 본 적이 없어.”

“전미진, 학교는 다닐만해?”

“어?”

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전미진은 당황했다.

전태국이나 전미진이나 머리는 고만고만했다. 한 마디로, 둘 다 공부를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게… 학교야, 뭐. 대학을 가기 위해서 다니는 거지. 난 뉴욕에 가서 패션 공부할 거거든.”

[잘 알지. 아주 야무지게 말아드시잖아.]

전미진이 패션 브랜드 만든다고 나대는 바람에 적자만 보고 결국, 브랜드도 문을 닫았다.

“공부가 별로라서 패션 하는 건 아니고?”

“아하… 들켰네. 사실은 공부 쪽보다는 패션 쪽이 내가 더 잘하는 거더라고.”

이건 내가 생각한 대화의 방향이 아닌데.

“미진아, 나 일어날게. 한국에서도 회사 일 봐야 할 게 많아서 시간이 없어.”

“어… 그래. 망고 빙수 좀 포장해 갈래?”

그러고 보니 엄마, 아빠에게 이 유명한 삼전 호텔의 망고 빙수 맛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래.”

“성국아, 그거 알아?”

“뭐?”

“나한테 그렇게 잘난 척 정떨어지게 굴 필요 없어.”

전미진이 이렇게 눈치가 빨랐나.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성국아, 나 남자친구 있어. 그러니까 너한테 크게 관심은 없어. 물론 네가 나한테 관심 있다면 지금 남자친구는 정리할게.”

“전미진.”

“응?”

“난 너한테 영원히 관심 없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아는 척하지 마.”

이때, 포장된 망고 빙수가 나왔다.

나는 망고 빙수를 들고 자리에서 유유히 일어났다.

“집까지는 내가 알아서 갈게. 지금 남자친구랑 잘 지내길 바랄게. 그리고 말이야.”

나는 저쪽 구석에 숨어서 나와 전미진의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미진, 내가 너랑 같이 있는 사진 찍어서 날 삼전 전자의 사위로 점찍고 싶나 본데, 그런 환상은 좀 안 가졌으면 좋겠어. 대한민국에서 삼전이 할 수 없는 일은 바로 나 전성국을 돈으로 매수하는 일이야.”

전미진이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전태국은 이 사실을 조용히 박성희 비서에게 알렸고, 물론 박성희 비서는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전태국의 알몸 사건 유출로 이미지 실추를 한 삼전 그룹이 나와 전미진의 관계성을 은근히 보여주면서 후계 구도에 대한 불신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

나는 벙찐 얼굴의 전미진을 뒤로하고 유유히 삼전 호텔의 로비를 빠져나갔다.

[대한민국에서 삼전이 할 수 없는 일은 바로 나 전성국을 돈으로 매수하는 일이야. 이거 좀 멋있는 대사 같은데…]

어깨가 한껏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 * *

지희의 CF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나는 전태국, 박성희 비서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서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에서는 세 명이 나를 붙잡고 우는 통에 한바탕 또 난리를 했다.

“최정우, 너는 왜 울어?”

“성국아, 너랑 또 이렇게 헤어지니까… 예전에 이사 가는 날 생각이 나서….”

“하아… 정말. 전민국, 최정우. 내 말 잘 들어. 방무혁 대표 말 잘 듣고, 괜히 음악 한답시고 이상한 애들이랑 어울리지 말고… 다들 연습 열심히 해. 알았지?”

“응, 성국아!”

“형아! 나 또 에미넘 콘서트 보러 미국 갈게.”

“에미넘 보고 한국에서 콘서트 한번 하라고 할게. 그리고 우리 지희.”

“응, 오빠”

지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조용히 지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희야, 밥값 알지?”

“응! 지희 밥값! 오빠 말대로 시작이 늦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할게!”

뒤에서 눈물의 이별을 하는 우리를 지켜보던 엄마, 아빠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아빠가 내 등을 토닥였다.

“성국아, 너야 항상 혼자서도 잘하지만….”

[당연하지, 아빠.]

“항상 한국에 가족들이 멀리서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 잊으면 안 돼?”

“으응.”

나는 괜히 목이 메었다.

공항은 만날 땐 기뻐서 눈물이 나고, 헤어질 땐 슬퍼서 눈물이 나는 이상한 곳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찰나에 나는 칼같이 뒤돌아서 공항 게이트로 향했다. 누구에게도 나의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때, 게이트로 향하는 우리를 향해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의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전태국 씨, 걸그룹 나희 양이 벌인 알몸 사진 유포 사건의 경위 좀 말씀해 주십시오!”

역시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전태국은 나를 한번 보곤 기자들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 사과를 했다.

“저로 인해서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저 역시 술에 약을 타서 먹은 이후에는 기억이 없어서 피해자 입장으로 고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선량한 피해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일벌백계가 필요하단 의미에서 나희 양을 고소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박성희 비서가 기자들을 정리했다.

“공식적인 해명문은 각 신문사로 보내겠습니다.”

전태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침통한 얼굴로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나를 보더니 찡긋 윙크를 했다.

“성국, 내 연기 어땠어?”

“봐줄 만했어요.”

전태국의 사과에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다 들어있었다.

자신도 피해자. 그리고 본보기.

기자들은 삼전 그룹에서 보내는 공식 해명문과 더불어 같이 전달되는 회식비에 아마 전태국을 선량한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본보기를 통해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는 그런 인물로 그려줄 것이다.

* * *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

퍼스트 클래스에 처음 탄 박성희 비서는 연신 들떠서 종알거렸다.

“퍼스트 클래스는 정말 처음입니다. 이런 거 맨날 타시면 비즈니스만 타도 막 불편하고 그러시죠, 도련님?”

“좌석 없으면 비즈니스도 타. 근데 일반석은 정말 못 타겠어.”

“일반석 타신 일도 있으세요?”

“부모님이 서민 코스프레 하라고 해서 몇 번 타봤는데, 다리도 아프고… 다시는 안 타고 싶어.”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비행기에 구비된 각종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한국에 와있는 동안 미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미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선 열기로 뜨거웠다.

대부분 버락 오마하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그리고 버락 오마하가 승기를 잡은 지점을 딕 파웰이 지지 선언을 한 이후라고 모두 극찬했다.

더불어 햄버거 외교로 보수와 진보의 징검다리가 되어준 ‘페이스 노트’ 대표인 나에 대한 분석을 실은 기사들도 많았다.

설마 도날드 트럼펫이 벌써부터 대선을 준비하는 것인가?

아직 도날드 트럼펫이 미 대선 후보로 떠오르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지금 도날드 트럼펫은 열심히 <인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You're Fired.”를 한창 외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도날드의 야심은 언제부터인 거지, 대체….]

그러는 사이 저 멀리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활주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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