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11화 (211/231)

제211화

샌프란시스코의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재빨리 짐은 찾은 박성희 비서는 앞서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삼전 샌프란시스코 지사에서 차량 대기 중입니다.”

“근데 박 비서. 이제부터 어디서 지낼 거야?”

전태국의 물음에 박성희 비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도련님댁에 방 하나 빈다고 들었습니다.”

“뭐라고? 그 말은 나랑 같이 지낸다는 거야?”

“도련님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철저히 보필하려면 같이 지내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요? 전의 양 비서님도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거야… 양 비서는 어릴 적부터 같이 지낸 사람이라서 그런 거지. 박 비서는 아니잖아!”

“저는 앞으로 오래 지낼 사람으로 여겨 주십시오.”

박성희 비서는 정말 전태국에게 말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해.]

양 비서가 절대복종의 캐릭터였다면, 박성희는 전태국을 적절히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였다.

“‘페이스 노트’의 전성국 대표 맞으시죠?”

“누구시죠?”

“도날드 트럼펫이 보내서 왔습니다.”

도날드 트럼펫은 내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다.

“무슨 일이신데요?”

“도날드가 전성국 군을 바로 만나고 싶어 하셔서요.”

[급한 성격은 여전하네….]

“선약도 없이 무리하게 약속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도날드 트럼펫이 보낸 사람이라는 믿음도 없고요. 저는 피곤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남자를 쓱 지나쳤다.

그러자 남자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전태국과 박성희가 내 뒤를 쫓아오며 물었다.

“성국, 대체 누구야?”

“도날드 트럼펫이 보낸 사람.”

“도날드 트럼펫이라면? You're Fired! 맞죠?”

박성희 비서는 신이 나서 물었다.

“네, 그 사람이 보냈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없잖아요.”

“성국아, 내가 회사에 연락해서 알아보라고 할까?”

“괜찮아요.”

[도날드가 직접 나오지 않는 이상 안 만날 생각이거든.]

나는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

[도날드인가?]

나는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예상대로 도날드 트펌펫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 성국, 내 비서를 돌려보냈다고?

“비서가 확실한가요?”

- 못 믿는다는 말이군. 역시 자네는 나랑 통하는 데가 있어.

그때, 190cm가 넘는 거구의 금발 머리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바로 도날트 트럼펫이었다.

“성국, 자네는 내가 처음으로 직접 마중 나온 사람이라는 것만 기억하게.”

[잘난 척은.]

“그리고… 혹시 자네 바쁜가?”

“보시다시피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와서 막 내린 참이거든요.”

“흠… 난 하루에도 몇 개국을 오갈 때도 있네만.”

도날드 트럼펫은 말 한마디 지지 않는 전형적인 나르시스트였다.

그게 나랑 참 비슷했다.

“성국 군, 자네 라스베이거스는 가봤나?”

[물론 저번 생에서는 수없이 가봤지.]

“도날드, 저 미성년자예요.”

“잘 알지. 미성년자라고 해서 라스베이거스에 가지 말란 법은 없지 않는가. 내 전용기 준비되어 있는데, 라스베이거스로 같이 가지.”

“지금요?”

“캐리어에 여벌의 옷도 있을 것 같은데…. 없으면 사면 되고.”

정말 이럴 때는 내가 아직 10대인 것이 하늘에 감사한 일이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고도 또 떠날 체력이 있으니 말이다.

평소 같으면 거절했을 일이지만, 난 도널드 트럼펫의 의도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궁금한 건 또 못 참지!]

나는 속마음과 달리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죠, 뭐. 도날드.”

이때, 전태국과 박성희가 우리 뒤에 바싹 붙었다.

도날드 트럼펫의 시선이 내 뒤의 두 사람에게 향했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제 친구들이에요.”

“친구들은 먼저 집에 가라고 하지.”

나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인 전태국을 한번 도날드 트럼펫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10년 후에 도날드 트럼펫이 한국에 와서 삼전 전자의 반도체 공장을 시찰할 때는 전태국이 안내를 맡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날드, 여긴 삼전 그룹의 후계자 전태국이에요.”

“삼쩐!”

도날드 트럼펫도 삼전을 잘 알았다.

그의 호텔에 들어가 있는 TV가 모든 삼전이었다.

“역시 성국 국은 노는 물이 다르군. 삼전 후계자 반갑네.”

“아, 네. 반가워요, 도날드. 저 <인턴> 엄청 팬이에요!”

전태국은 얼떨떨한 얼굴로 도날드에게 대답했다.

“고맙네. 자네도 같이 가면 좋겠지만, 전용기에 좌석이 많지 않아서 미안하네.”

도날드 트럼펫은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오늘 그의 목적은 바로 나였다!

* * *

[도날드 트럼펫의 전용기를 타 보다니….]

확실의 우물 안 기업의 회장일 때보다 ‘페이스 노트’의 영향력은 더 대단했다.

도날드 트럼펫은 전용기에 타자마자 콜라를 주문했다.

“성국, 자네도 콜라 마실 텐가?”

“좋죠.”

도날드가 주문한 콜라가 나왔다.

도날드는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난 사람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몸도 망가지고, 기억도 망가지고.”

“콜라도 건강에는 그렇게 좋지 않을걸요?”

“하지만 콜라는 마신다고 해서 일하다가 실수를 하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지 않지 않는가.”

[도날드, 당신은 멀쩡한 정신에도 이상한 말은 많이 하잖아.]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부터 나르시스트의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었다.

이게 나와 도날드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는 나르시스트라면, 도날드는 막무가내 나르시스트라고나 할까. 도날드 트럼펫, 난 당신과 달라.]

나는 콜라는 마시며 도날드 트럼펫에게 은근히 오늘의 목적을 캐물었다.

“도날드, 일부러 저를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는 들리신 거예요?”

“물론이지. 하지만 막 일부러는 아닐세. 타이밍이 맞았다고나 할까.”

이 말은 일부러 억지로 타이밍을 맞췄다는 나르시스트식 설명이었다.

“절 라스베이거스까지 데리고 가시는 이유를 지금 물어봐도 되나요?”

“물론 안 되지. 난 자네에게 내일 저녁까지 라스베이거스를 잔뜩 구경시켜줄 거야. 그다음 내 전용기가 다시 자네를 샌프란시스코까지 데려다줄 텐데. 그 순간에 자네에게 내 진짜 목적을 말할 거야.”

“흠… 흥미롭네요.”

도날드 트럼펫의 제안은 대충 예상이 됐다.

하지만 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성국 군, 하루 동안은 라스베이거스를 즐기라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즐기지 않는 사람은 바보이지 않나.”

“그렇죠. 도날드….”

나는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콜라를 마셨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즐기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고? 그건 도날드 트럼펫, 바로 당신 이야기잖아.]

* * *

전용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트럼펫 호텔로 향했다.

미국에는 곳곳에 부동산 개발업자인 트럼펫의 이름을 딴 호텔과 리조트가 있었다.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바꿨다는 허드슨 강 개발로 이름을 날린 도날드 트럼펫은 특유의 캐릭터로 방송 등에 출연하면서 더 유명해진다.

도날드 트럼펫은 나에게 키를 하나 내밀었다.

“스위트룸이네. 자네가 오늘 하루 머물 곳이야. 씻고 한 시간 후에 우리 비서가 자네를 데리러 갈 걸게. 오늘 하루 멋지게 라스베이거스를 즐기라고.”

“도날드는 같이 안 가나요?”

“난, 일이 많아서 말이야. 우리는 내일 보자고.”

역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즐기지 못하는 건 도날드 트럼펫 자신이었다.

도날드 트럼펫과 나는 로비에서 서로 헤어졌다.

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전태국이었다.

“여보세요.”

- 성국아!

분명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지?

그 순간 내 눈앞에 전태국과 박성희 비서가 나타났다.

“두 사람 어떻게 된 거예요?”

“너 라스베이거스로 가고 우리도 바로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 타고 날아왔지. 퍼스트 클래스는 언제나 여유롭잖아.”

“왜 따라온 거예요?”

나는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너무 궁금해서!”

전태국이 대답했다.

“뭐가요?”

“도날드 트럼펫이 널 찾는 이유 말이야. 그게 뭐래?”

“그런 건 전화로 물어봐도 되잖아요.”

“네가 말 안 해줄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지.”

[흠… 전태국, 눈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목적은 내일 저녁에 헤어질 때 이야기해 주겠대요.”

“도날드 트럼펫 정말 독특한 사람이란 말이야. 성국아, 방 키 좀.”

“그건 왜요?”

“너 따라오느라 호텔은 예약을 못 했지. 스위트룸은 이미 나갔다는 거 보니까, 네가 지내는 거 아니야? 같이 지내자. 나 스위트룸 아니면 다른 객실은 좁아서 폐소공포증 생기거든.”

뭐라고?

이건 또 뭐 듣도 보도 못한 말인지.

뒤에서 박성희 비서가 얼른 뒤따르며 속삭였다.

“성국 군, 도련님이 라스베이거스행 티켓을 끊고 나자마자 도련님 카드가 모두 정지당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돈을 물 쓰듯 쓸 게 보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 태국이 형 빈털터리인가요?”

“제가 쓸 수 있는 법인카드가 있지만, 한도가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도련님은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우선 저도 모른 척하고 있을게요.”

[빈털터리 전태국을 보는 건가?]

아무래도 라스베이거스는 또 다른 의미로 흥미로울 것 같았다.

* * *

정확하게 한 시간 후, 도날드 트럼펫이 보낸 비서가 도착했다.

공항에서 처음 나를 맞이한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저희 구면이죠? 인사드리죠. 제이미 올슨입니다.”

“반가워요, 제미이. 공항에서 무례했던 거 사과드릴게요.”

“아닙니다. 성국 군 같이 유명인이라면 당연히 경계를 해야죠.”

제이미 올슨은 인상처럼 유연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우선 오늘 일정을 말씀드릴게요. 호텔에서 나가시자마자 준비된 리무진으로 라스베이거스를 한 바퀴 도신 다음에 저녁은 유명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준비 중입니다. 그리고 카지노를 간단히 즐기시고 <타이타닉> 주제가를 부른 가수 셀린 디옹의 콘서트를 즐기신 다음 다시 호텔로 돌아오시는 일정입니다.”

이건 진짜 라스베이거스를 즐기는 평범한 관광객의 스케줄이었다.

도날드 트럼펫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스케줄대로 따르기로 했다.

“근데… 저한테 혹이 두 명 있습니다.”

“혹이라고요?”

“추가 비용은 제가 다 지불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건 제가 도널드 트럼펫에게 한번 여쭤보긴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저 두 사람은 제가 책임져야 할 인생들이거든요.”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양복으로 갈아입은 전태국은 머리까지 짝 넘기고, 손목에는 롤아이 시계까지 찼다. 오늘은 돈 많은 동양인 콘셉트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박성희 비서는 배낭여행객 콘셉트로 목에 디지털카메라까지 걸었다.

제이미는 빙긋 웃었다.

“재미있는 친구분들을 두셨네요.”

[재미도 있고, 골치도 아픈 사람들이지.]

“암튼,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우선 리무진으로 이동하시지요.”

나는 뒤를 돌아봤다.

“태국이 형, 비서님. 저희 리무진으로 이동할게요.”

전태국은 롤아이 시계를 흔들면서 내게 다가오더니 조용히 물었다.

“성국아, 나 돈 좀 빌려줄래? 현금은 안 가지고 다니는데, 글쎄. 아버지가 카드 막은 거 같아.”

나는 지갑에 있는 십 달러를 꺼내서 전태국이에게 내밀었다.

“형, 제 전 재산이에요.”

“야! 너 돈도 많으면서 겨우 현금이 이것밖에 없어?”

“돈은 형이 더 많은데, 형도 현금은 없잖아요.”

“아… 그렇지! 암튼 잘 쓰마. 내가 오늘 십 달러의 기적을 한번 보여줄게!”

[그 말 하는 사람치고 돈 따는 사람을 못 봤어, 전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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