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12화 (212/231)

제212화

리무진에 탑승한 우리는 라스베이거스 시내를 쭉 돌았다.

고급 리무진 안에는 각종 음료와 술, 거기다 간단한 핑거 푸드도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전태국뿐이었다.

“성국아, 네 덕분에 이런 호사도 다 누리네.”

“태국이 형이야 이 정도의 호사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잖아요.”

“성국아, 내가 카드 없이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다고나 할까. 역시 모든 힘과 권력은 돈에서 나오는 거였어.”

전태국은 슬픈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것을 이제야 알다니. 전태국, 너는 돈 빼면 원래 시체나 다름없어.]

전태국은 창밖을 바라보던 슬픈 눈으로 박성희 비서를 쳐다봤다.

“박 비서, 나 맥주 한 캔 부탁해.”

“도련님, 저는 하인이 아니라 비서인데요.”

“박 비서,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해볼래, 박 비서?”

박성희 비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전 하인이 아니라 비서라고요. 맥주야 충분히 도련님이 냉장고에서 꺼내서 드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아… 박 비서… 정말 You're Fired!”

“죄송하지만, 제 계약은 도련님이랑 한 게 아니라 삼전 그룹과 해서요. 이렇게 개인적으로 해고하시면, 불공정 해고에 해당되거든요. 도련님.”

“됐어. 됐다고! 내가 꺼내 마실게.”

전태국은 결국, 박성희 비서의 잔소리를 모두 다 듣고 스스로 냉장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나는 물끄러미 창밖의 라스베이거스를 쳐다봤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서 돈 좀 땄었는데….]

저번 생에서 재미 삼아 해본 카지노에서 돈을 따서 그 당시 잠시 만나던 여배우에게 목걸이를 하나 선물해줬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 돈으로도 충분히 사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왠지 돈 쓰기가 아까워서 그랬던 기억이 있는 것을 보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라스베이거스 시내를 보며 추억에 잠긴 사이사이 제이미 올슨은 창밖으로 보이는 라스베이거스를 가이드처럼 안내해줬다. 하지만 대부분 이미 아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심드렁해하자 제이미 올슨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냈다.

“지금부터 제가 라스베이거스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건데요. 맞추시는 분께 100달러씩 드리겠습니다. 아마 100달러는 저녁에 갈 카지노에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전태국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제이미, 어서 질문 던져 봐요!”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지금의 라스베이거스를 도박의 도시로 구상한….”

“성국! 벅시 시걸.”

“정답! 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맞추셨네요. 성국 군.”

[이 정도야 껌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잘난 척은! 제이미, 어서 다음 문제 내요.”

“네, 그럼 다음 문제입니다. 벅시 시걸이 라스베이거스를 구상한 마피아였다면, 현재의 라스베이거스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백만장자….”

“성국! 하워드 휴즈!”

“정답! 성국 군, 또 맞췄네요.”

나는 또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 문제 또 내요, 제이미. 어서요!”

전태국은 점점 다급해졌고, 나는 태연하게 다음 문제를 기다렸다.

“그럼… 이건 성국 군. 제발 문제를 다 듣고 대답해주세요.”

제이미는 거의 사정하다시피 했다.

“이번에는 나머지 두 사람을 위해서 그러죠.”

“이건 아주 쉬운 문제예요. 두 분 잘 들으세요. 자, 라스베이거스. 이 도시의 별명은 뭘까요?”

나는 일부러 전태국과 박성희 비서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입을 다물었지만, 두 사람 다 입도 벙긋 못 했다.

“이거 어쩔 수 없네요. 성국!”

“성국 군, 말해보시죠.”

“씬시티!”

“정답!”

전태국은 냉장고를 벌컥 열더니 맥주 캔을 요란하게 땄다.

“퀴즈고 뭐고 그만할래요. 제이미, 우리 언제 카지노 가요?”

“저녁 먹고… 셀린 디옹 콘서트 사이에 잠시 들릴 겁니다.”

제이미는 주머니에서 300달러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성국 군, 축하해요.”

나는 조용히 삼백 달러를 챙겼다.

나는 이 돈으로 오늘 밤, 전태국을 살 생각이다.

* * *

스테이크까지 푸짐하게 먹고, 우리는 제이미를 따라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큰 카지노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난 제이미를 붙잡았다.

“성국 군, 왜 그래요?”

“제미이, 나 카지노 못 들어가요.”

“왜요?”

“저… 미성년자예요.”

“네에?”

제이미는 무척 놀란 눈치였다.

도날드 트럼펫이 그 말까지는 안 한 모양이었다.

“말도 안 돼요. 성국 군, 진짜 미성년자예요?”

“네. 이 두 분이 증인이고요. 여권도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91년생인데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성국은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실래요?”

“그러죠. 저 셀린 디옹 콘서트를 꼭 보고 싶거든요.”

내가 카지노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전태국이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성국아, 아까 퀴즈 맞춰서 번 300달러 있잖아. 그거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맛있는 케이크나 사 먹을까 고민 중이에요.”

“성국아, 그 돈을 그렇게 헛되게 쓰면 안 되지. 나한테 주면 그 돈 딱 한 시간 내에 2배로 불려줄게.”

[쯧쯧, 이런 말 하는 사람치고 사기꾼 아닌 사람이 없지.]

하지만 나는 선뜻 삼백 달러를 꺼내서 전태국에게 건넸다.

“형, 못 따면 이 카지노에서 나올 생각 마세요.”

“나, 전태국이야.”

[그러니까 못 믿지.]

“참, 형. 저 돈 빌려주는 대신요. 내일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무슨 부탁인데?”

“그건 내일 말할게요.”

“알았어. 내가 이 돈 꼭 2배로 부풀려 나올게. 꼼짝 말고 기다려!”

전태국은 내가 건넨 삼백 달러를 품에 넣고는 박성희와 제이미와 함께 카지노 안으로 들어갔다.

* * *

한 시간 후, 제이미가 홀로 나와서 카페에 앉아서 책을 보는 나에게 다급히 걸어왔다.

“성국, 미안해요. 어서 콘서트장으로 이동하죠.”

“태국이 형이랑 박 비서님은 안 오세요?”

“태국 군은 콘서트 대신 카지노를 좀 더 즐기고 싶다고 하시고요.”

예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박 비서님은… 태국 군이 너무 도박에 열중해 있어서 기다렸다 같이 나와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흠…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셀린 디옹 콘서트 보고 싶어요.”

전태국이 셀린 디옹 콘서트 대신 카지노를 선택할 것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오늘 밤, 호텔에서 전태국을 못 볼 가능성도 있었다.

* * *

콘서트를 다 보고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가 조금 안 돼서였다.

하지만 스위트룸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다간 패가망신하겠어.]

나는 얼른 제이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제미이가 전화를 받았다.

- 성국 군, 무슨 일이에요?

“제이미, 방금 일 끝났는데 미안해요. 태국이 형이 아직 카지노에서 안 돌아왔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리고 나와야 할 것 같아요.”

- 아직 안 왔군요. 저희 보디가드 몇 명 보내서 금방 데리고 나올게요.

“고마워요, 제이미.”

나는 전화를 끊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는 사이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전태국이 잠시 절규하는 소리도 들렸고, 박성희 비서가 뭐라고 위로하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얼른 샤워가운을 입고 거실로 나갔다.

전태국은 저녁에 입고 나간 슈트 차림 그대로 소파에 널브러져서 이미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넋 나간 눈빛. 축 늘어진 손목.

한 마디로 오늘 전태국은 카지노에서 탈탈 털린 게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형… 많이 잃었어요?”

이때, 박성희 비서가 맥주를 두 캔 가지고 나왔다. 하나는 전태국에게 건넸다.

“도련님, 한 캔 드셔요.”

“박 비서, 고마워.”

맥주 캔을 받아드는 전태국의 손목이 허전했다.

[설마 롤아이도 팔아먹은 거야? 그게 얼마짜리인데!]

“형, 설마 롤아이도 잡히셨어요?”

“성국아… 내가 말이야. 처음에 네가 빌려준 삼백 달러하고 십 달러로 삼십 분도 안 돼서 2배로 만들었거든.”

“그건 저도 봤어요. 그리고 3분 만에 바로 다 잃으셨어요.”

전태국은 박성희 비서에게 뭐라고 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성국아, 그래서 말이야… 내가 정말… 정말… 잘했거든. 정말 오늘 대박이 날 것 같았단 말이야. 그래서 롤아이도 잡혀서 했는데….”

전태국은 애꿎은 맥주만 벌컥벌컥 마셨다.

그 누구도 전태국을 위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동시에 박성희 비서도 전태국 옆에 앉아서 맥주를 들이켰다.

“도련님, 롤아이야 다시 사시면 되잖아요. 지금은 롤아이보다 아버지께 어떻게 변명하실 건지 생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박 비서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카지노에서 다른 일이라도 있었어요?”

“삼전 임원진들이 단체로 연수 왔다가 태국 도련님을 봤거든요. 아마 이미 전재형 회장님 귀에 들어가셨을 거예요.”

전태국은 절망적인 얼굴로 맥주만 들이켰다.

* * *

도날드 트럼펫은 나에게 무슨 제안을 하려는 것일까?

솔직히 난 그 제안이 대충 뭔지 알 것 같아서 라스베이거스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때마침 알람이 울렸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달칵- 방문을 열고 나갔더니 거실에는 수북하게 쌓인 맥주 캔들과 소파에서 그대로 잠든 전태국과 박성희 비서가 보였다.

둘이 성격은 안 맞아도, 술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나는 둘을 남겨두고 조식을 먹기 위해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하자 제이미 올슨이 보였다.

[제이미가 있단 것은 트럼프가 있단 건가….]

나는 얼른 제이미에게 걸어가 모른척 말을 걸었다.

“제이미…. 어제 늦었는데,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에요?”

“대표님이 여기서 식사 중이세요.”

“같이 먹어도 될까요?”

내 제안에 제이미는 망설이더니 곧 대답을 했다.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잠시 후, 제이미는 나를 도날드 트럼펫이 앉은 자리로 안내했다.

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햇살이 좋은 창가 자리였다.

“성국 군, 이따 라스베이거스 떠날 때나 만나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보게 되네.”

“어제 너무 잘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자네 같이 똑똑한 친구들에게 베푸는 재미도 있어야지. 돈 벌어서 다 짊어지고 죽을 것도 아니지 않나.”

[갑자기 현자 같은 소리는 안 어울려, 도날드.]

나는 막 나온 커피를 마시며 도날드 트럼펫을 쳐다봤다.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정갈한 슈트. 말끔하게 빗어넘긴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머리 스타일. 거기다 빨간 넥타이까지.

[흠… 내가 예상한 게 맞는 모양이군.]

나는 커피를 마시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날드….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게, 뭔가?”

“오늘 제가 공항에서 당신의 전용기를 타는 모습이 <인턴> 프로그램의 카메라맨들이 잡나 해서요. 그러면 저도 당신처럼 말끔하게 차려입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에 도날드 트럼펫은 적잖이 당황하더니 손에 든 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그게 무슨 소리지, 성국 군?”

[시치미는…. 선수끼리.]

도날드 트럼펫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인턴> 프로그램은 좀 더 자극적인 출연진들이 필요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깜짝쇼를 좋아하는 도날드 트럼펫의 습성상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항으로 떠나는 순간에 이 제안을 할 것이다.

아마 이 제안을 거절하면 전용기에서 바로 내리라며 윽박지르는 게 콘티에 이미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당황하는 나를 잡는 카메라까지.

“도날드, 나는 우선 거절이에요. <인턴>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가 당신의 명령을 듣고 행할 만큼 난 당신이 벌이는 사업에 관심 없어요.”

“성국 군,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솔직히 ‘페이스 노트’는 아직 상장도 안 된 기업이지 않나.”

“도날드, 후회는 할 생각도 없어요. 대신 제가 재미있는 출연자 한 명을 추천 드리죠.”

“그게 누구지?”

“대한민국의 재벌이자 삼전 그룹의 후계자 전태국이요.”

나는 턱을 손에 괴고 도날드 트럼펫을 쳐다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