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13화 (213/231)

제213화

도날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삼전 그룹의 후계자라고?”

“도날드,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해 볼까요?”

나는 커피를 들이켰다.

도날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적수를 만났다는 느낌의 표정이었다.

도날드는 아침부터 콜라를 마시더니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상대를 압도하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도날드, 나 겉으로는 십 대로 보이지? 속에는 능구렁이 백 마리쯤 들어있다고.]

“성국 군, 그래 뭘 솔직히 이야기해 볼까?”

“저번 회 <인턴>의 시청률 바닥이지 않았나요?”

“흠….”

<인턴>은 도날드 트럼펫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룬 것처럼 포장해서 대통령이 되는 사람처럼 미국 국민들에게 도날드 트럼펫이 굉장한 카리스마와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판타지를 제공했다.

“지금 그 반등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 아닌가요?”

“뭐… 이건 <인턴> 시청자라면 누구나. 아니지, 미국 국민들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인데. 성국 군, 그런 얄팍한 분석은 나한테 안 통해.”

지금 도날드 트럼펫은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런 거만한 타입일수록 궁지에 몰리면 상대방을 얕잡아보는 말을 내뱉었다.

“도날드, 제가 말한 얄팍한 분석을 이미 하신 거 아닌가요?”

“끄응-.”

도날드 트럼펫은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얼굴이 슬쩍 붉어질 기미도 보였다.

[저렇게 쉽게 속내를 드러내서야….]

나는 차분히 물을 마셨다.

“성국 군,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저 대신 삼전 전자의 후계자를 <인턴>에 투입시켜 주세요. 그리고….”

“그리고?”

“대신 중간 경연장 중 하나로 ‘페이스 노트’를 제공하겠습니다.”

도날드 트럼펫은 그제야 흥미로운 얼굴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거 재미있는데?”

“이제부터 부동산 업자들도 ‘페이스 노트’를 통해서 부동산을 파는 시대가 올 거거든요.”

도날드 트럼펫가 고개를 끄떡하자 제이미 올슨이 다가왔다.

“네, 대표님.”

“성국 군한테 오늘 공항에서 찍을 <인턴> 콘티 미리 주고 변경하도록 하지.”

그러곤 도날드 트럼펫은 나를 쳐다봤다.

“성국 군이 오늘 <인턴>의 콘티를 바꿔보겠나?”

“물론이죠.”

나는 선뜻 콘티를 받아들었다.

* * *

스위트룸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제야 잠에서 깬 박성희 비서가 나를 반겼다.

“성국 군, 식사하고 오는 길이에요?”

“네, 어서 비서님도 해장하고 오세요. 쌀국수가 시원하네요.”

“안 그래도 해장이 필요했는데, 서둘러야겠네요.”

이때까지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전태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쌀국수?”

그러더니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형, 그 전에 내 부탁 하나 들어줄 게 있어.”

“부탁?”

“어제 300달러 있잖아.”

“아, 맞다. 순식간에 날아간 그 돈. 부탁이 뭐야? 샌프란시스코 돌아가면 카드 바로 풀릴 거야. 원하는 거 뭐든지 다 해줄게.”

“흠… 돈은 필요 없고.”

[전태국, 나도 돈은 많아.]

전태국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나를 흐리멍덩한 눈으로 쳐다봤다.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닥칠 것인지 전혀 모르는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럼?”

“형, <인턴>이라는 프로그램 좋아하죠?”

“나, 그거 완전 애청자야. You're Fired! 라고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속 시원한지 몰라. 근데 그건 왜 물어?”

“형이 그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내가?”

“네.”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물었다. 마치 장난처럼.

“좋지. 나가서 내가 그 멍청한 놈들 다 물리치고 1등 할 거야. 근데 겨우 연봉 25만 달러 아니야? 그 돈 받고 어떻게 일해?”

겨우 25만 달러라.

한국 돈으로는 3억 정도.

전태국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한 달에도 쉽게 쓸 수 있는 돈이었다.

“그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경쟁 프로그램에서 1등을 한다는 게 의미 있는 것 아닐까요?”

“뭐, 난 어차피 물려받을 기업이 있잖아. 그런 프로 1등 해서 뭐 해.”

“형, 제 부탁인데요. 그게.”

“뭐어?”

여전히 술이 덜 깨서 흐리멍덩한 눈으로 전태국이 나를 바라봤다.

“형이 <인턴> 이번 시즌에 출연하는 거요. 제가 300달러 빌려드린 것에 대한 부탁이요.”

* * *

나는 도날드 트럼펫이 건넨 콘티를 살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라스베이거스 관광을 마치고 나오는 나를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뒤쫓는 카메라.

공항에 도착하자 전용기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도날드 트럼펫이 서 있다.

도날드 트럼펫은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네고 여행에 대한 간단한 질문을 한다. 물론 나도 대답하겠지.

그러곤 마지막으로 내게 손을 내밀며 다가오면서 <인턴> 제안을 하는 것이다.

승낙을 하면 전용기로 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거절하면 바로 전용기에서 내 짐을 내던지는 것이었다.

[흠… 예상을 하나도 빗겨나가지 않는군.]

나는 <인턴>의 마지막 회 콘티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전태국의 등장.

도날드 트럼펫의 전용기를 타기 위해서 공항에 도착한 나와 전태국과 박성희 비서.

나는 당연히 도날드 트럼펫을 거절하는데. 도날드 트럼펫은 평소처럼 성질을 못 이겨서 짐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

이때, 건너편에서 또 다른 전용기가 도착한다.

바로 삼전 그룹에서 보낸 전용기이다.

나와 전태국은 도날드 트럼펫의 행패에 주먹 감자를 날려주고 옆의 전용기로 옮겨타는데,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도날드 트럼펫이 우리에게 달려와 내가 아닌 전태국에게 <인턴> 제의를 한다.

전태국은 고민 끝에 승낙하고, 대신 조건이 있다는 말을 한다.

- 전 경쟁을 하고 싶을 뿐이지, 당신이 주는 연봉 25만 달러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래도 괜찮은가요, 도날드 트럼펫?

- 물론이지. 삼전 그룹의 후계자가 이 경연에 참여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영광이야.

내가 그리는 콘티를 내려다보고 있던 전태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국, 이 대사 진짜 멋있는데 말이야. 전용기 보내주실까?”

나는 박성희 비서에게 콘티를 내밀었다.

“비서님, 한 시간 내로 확답 받아주세요. 삼전 광고도 될 테니, 허락 안 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태국이 형이 이런 프로에 나가 알몸 사진 같은 추문 덮기에도 좋고요.”

“성국! 나 그거 거의 잊고 있었다고.”

“형, 추문은 잊으면 안 되죠.”

박성희 비서는 내가 내민 콘티를 받아들었다.

“바로 호텔 비즈니스 센터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불가능하면 다른 대안이 있나요?”

“삼전에서 못 보낸다면 도날드가 알아서 하겠죠, 뭐.”

* * *

양 비서는 미국에서 온 콘티를 출력해서 그대로 전재형 회장에게 달려갔다.

전재형 회장은 막 동탄 공장으로 떠나려던 차였다.

“회장님, 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보시고 허락해주셔야할 것 같습니다.”

“뭔데, 그래?”

“태국 군이….”

양 비서는 대답 대신 미국에서 온 콘티를 내밀었다.

전재형 회장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우선 출발하면서 보지.”

“네, 회장님.”

양 비서는 얼른 앞자리에 올랐다.

* * *

동탄으로 가는 내내 전재형 회장의 얼굴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태국이가 <인턴>에 나간다고? 도날드 트럼펫이 하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뒤에 성국이가 있겠군.”

“네, 회장님.”

전재형 회장은 심각한 얼굴로 양 비서를 쳐다봤다.

“양 비서, 기획실에서는 어떤 판단인가?”

“삼전을 홍보하는 데는 굉장한 효과이다. 특히 도날드 트럼펫이 마지막에 하는 대사를 좀 더 유리하게만 바꿀 수 있다면 말이죠. 이건 아마 성국 군에게 저희가 특별히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성국이 키를 잡고 있단 말이지?”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전재형 회장은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다시 물었다.

“만약 태국이가 초반에 떨어지면 타격은 없을까?”

“성국 군의 코멘트가 후반부에 있습니다.”

전재형 회장은 맨 마지막을 살폈다.

- 물론 태국이 형이 초반에 떨어진다면 처음에는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경쟁을 하고 싶어서 나왔고,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이제부터 정신 차리고 삼전 그룹의 후계자 수업에 전념하겠다고 하면 분명 사람들은 다시 태국이 형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알몸 사진 유출. <인터> 초반 탈락자. 그 모든 게 사실은 대한민국의 삼전 그룹 후계자로서 겪어야 할 통과의례로 포장해서요.

전재형 회장은 성국이가 쓴 코멘트를 보자마자 양 비서에게 지시했다.

“삼전에서 전용기 보내고, 그 전용기에 샌프란시스코 삼전 직원들도 태워 보내. 의전팀이랑. 그리고 도날드 트럼펫의 대사에 삼전에 대해서 좀 더 우호적인 멘트를 넣길 바란다고 전달하게나.”

“네, 회장님.”

양 비서는 조수석에 앉아서 곧 전화를 돌렸다.

이때, 문득 전재형 회장이 중얼거렸다.

“삼전을 전성국이 쥐고 흔드는 느낌인데 말이야….”

통화하던 양 비서가 뒤를 돌았다.

“회장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전재형 회장도 아직까지는 전성국의 행보가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삼전과 전태국에게 도움이 되긴 하는 행보였기 때문이다.

* * *

트럼펫 호텔 스위트룸.

모두들 테이블 위에 놓인 전성국의 전화가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드디어 요란하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에 양 비서가 떴다.

성국은 얼른 핸드폰을 받았다.

“네, 양 비서님! 저 성국이에요.”

- 성국 군, 다른 곳들이랑 먼저 조율하느라 늦었어요.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 당연히 오케이입니다! 시간 맞춰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직원들과 의전팀도 같이 이동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전화기 너머로 양 비서가 나를 진정시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 성국 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양 비서님.”

- 저희 측에서도 조건이 있습니다. 삼전에서 협찬할 수 있는 부분 있는지 조율해줄 것. 그리고 도날드 트럼펫의 멘트에서 지금보다 삼전을 더 띄울 멘트 추가해 줄 것. 이건 절대적으로 추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다 확인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전태국은 박성희 비서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성국아, 나 이제 미국 방송에도 얼굴 알리는 거지? 이 기회에 코 좀 세울까?”

“형, 이제 바로 방송 촬영인데, 너무 늦었죠. 다이어트나 좀 하세요.”

나는 양 비서가 지적한 도날드 트럼펫의 멘트를 수정했다.

- 물론이지. 세계적인 기업인 삼전 그룹의 후계자가 이 경연에 참여해준 것만으로도 나는 영광이야.

그리곤 바로 트럼프에게 팩스를 보냈다.

트럼프가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 성국, 이게 조건인가?

“네, 모든 회의마다 등장하는 노트북과 TV를 비롯한 가전제품도 모두 삼전에서 협찬하는 조건입니다.”

- 협찬이야, 나는 늘 옳다고 생각하지. 그럼, 이 대사로 변경하지…. 성국, 내가 다른 제안 하나 해도 될까?

“뭔데요?”

- 당연히 ‘페이스 노트’가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자네가 나오겠지만, 이 프로그램에 아이디어맨으로 합류하는 건 어떤가?

“한번 생각해 볼게요.”

- 시간은 많지 않고,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만 기억하게나.

“물론이죠!”

나는 전화를 끊고 전태국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전태국은 몸을 들썩이며 욕실로 향했다.

“이제 미국 방송까지 타면… 여자들 줄 서는 거 아니야?”

[쯧쯧, 여자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 못 차렸네.]

곧 욕실에서는 물소리가 들렸다.

박성희 비서는 은근히 내게 물었다.

“성국 군, ‘페이스 노트’도 바쁘고 일도 많은 것으로 아는데… 왜 연고도 없는 삼전 그룹까지 도와주는 거예요? 솔직히 도련님과의 친분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네요.”

“왜요? 친구보다 더 큰 설명이 필요한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박 비서,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야. 내가 왜 전태국을 물심양면 돕는지. 이렇게 전태국도 삼전 그룹도 나에게 서서히 스며드는 거야. 그러다 정신 차리면 이미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 있을 거야. 나는 그때를 기다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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