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2008년 9월 5일 금요일.
‘페이스 노트’에 출근하자마자 마크가 뛰어왔다.
“성국! 네가 올린 글 때문에 투자자들이 난리 났다며?”
“마크, 조용히 말해.”
내가 낮게 타이르자, 마크가 얼른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마크, 다 말해놓고 지금 와서 입을 막으면 무슨 소용이야?”
“아… 미안.”
마크는 얼른 내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성국, 진짜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한두 달만 견디면 투자자들이 다시 들어올 거야. 걱정 마.”
“한두 달 견디는 게 보통 일이야?”
“버틸 자금은 내가 가지고 있어. 그리고 곧 <인턴>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새 사무실을 구해서 옮길 거야.”
“성국! 무슨 돈으로? 투자자들이 빠져나가는데!”
“내가 태국이 형이 <인턴> 첫번째 관문 통과하는 것을 도울 거거든. 성공하면 새 사무실 렌트비를 형이 세 달 동안 내주기로 했어.”
“그 이후에는?”
“세 달 안에 투자자들이 다시 돌아올 거야.”
내 확신에 마크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성국, 네 말대로라면 미국 전체가 경제 위기에 빠질 텐데. 그게 가능하겠어?”
“‘페이스 노트’의 서비스 지역을 확대해야지. 그걸 기사화하고. 때마침 <인턴>에서 새 사무실로 옮기고, 직원들도 더 뽑을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린 불황에도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안정적인 기업이 되는 거야.”
“네 예상대로 되리라는 법은 없잖아, 성국.”
“마크, 우리 어차피 한 푼도 없이 시작했잖아. 잃어도 우린 아직 20대이고.”
그 말에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체크 셔츠를 매만졌다.
“그래, 하버드로 돌아가서 공부나 더 하지 뭐. 빌 게이트한테 연락해서 프로그래머로 뽑아달라고 부탁하든지.”
“그리고 마크, 내 말대로 안 된 적은 한 번도 없잖아.”
“이 위기에도 잘난 척은. 암튼 잘난 척 안 하면 전성국이 아니지.”
마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 사무실을 나가려다 뒤를 돌아봤다.
“참, 성국. 이따 저녁에 우리 집에 와. 미미가 네가 준 한식 재료로 저녁 만들어준대.”
“알았어.”
* * *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옆으로 불고기가 놓였다.
리미미는 요리하는 동안 거실에 앉아서 고심에 빠진 마크를 몇 번이나 힐금힐금 쳐다봤다.
퇴근한 이후에 마크는 계속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두고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마크, 뭐 해? 사장님 올 때 됐잖아.”
“아하….”
마크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마크, 대체 노트북으로 뭐 하는 거야?”
“미미… 나 노티아 주식 팔까 봐.”
“마크, 내가 아니라 노티아 주식이랑 결혼한 거 아니었어? 죽을 때까지 안 버릴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지금 ‘페이스 노트’ 위기거든. 성국이가 쓴 글이 월가에도 퍼져서 우리 같은 신생 기업에 대한 투자가 확 줄었거든. 투자자들도 발을 뺀다고 하고….”
리미미가 놀란 눈으로 마크를 쳐다봤다.
“마크, 그걸 이제 이야기하면 어떡해?”
“나도 오늘 안 거야.”
“마크, 그 주식 팔아서 회사에 보태면 ‘페이스 노트’ 회생 가능한 거야?”
“우선은 성국이가 전 재산을 올인할 거야. 투자자들이 나가도 그걸로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거래.”
마크는 이제 거의 머리카락을 잡아 뽑을 기세였다.
“마크, 당신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성국이는 전 재산을 거는데.”
이때,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에 성국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마크, 사장님 왔어.”
그 말은 들은 마크는 주먹을 쥐고 외쳤다.
“그래, 결심했어!”
* * *
“와, 된장찌개에 불고기라니요…. 리미미 씨, 이런 건 언제 배웠어요?”
“인터넷 뒤지면 다 나오는 레시피예요. 하지만! 맛은 장담 못 해요.”
“미국에서 이런 거 먹는 게 어디예요.”
내가 자리에 앉자, 마크가 나에게 노트북을 들이밀었다.
“성국, 이것 좀 봐.”
“뭔데?”
“나 방금 노티아 주식 다 팔았어!”
“뭐라고?”
옆에서 리미미가 뿌듯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마크를 쳐다봤다.
“사장님, 마크가 정말 큰 결심했어요. 노티아 주식 팔아서 회사 어려울 때 보태겠대요.”
“마크…”
“성국, 뭘 그렇게 감동스럽게 봐? 저번 주 반등하고 좀 내려갔지만, 그래도 손해는 거의 안 봤어.”
“마크…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어서 주식 팔았다고 ‘페이스 노트’에 알려! 사람들이 너랑 나랑 내기하라고 할 때, 할걸!”
나는 아쉬움을 삼켰다.
“전성국! 난 주식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판 게 아니라, 회사에 위기가 오니까… 도우려고 판 거라고.”
마크는 버럭 큰소리를 쳤다.
“마크, 진짜 며칠 후면 주식 지금 판 거 감사하게 생각할 거야.”
“암튼 잘난 척은.”
[내가 사람 한 명 살려준 거야, 마크.]
리미미도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 근데 마크 성격에 거짓말은 못 할 거고. 회사 위기 때문에 주식 팔았다고 하면 투자자들 또 빠져나갈 거잖아요.”
“내 말은 그러니까 거짓말하라는 게 아니라. 주식을 팔았다! 이렇게 사실만 올리면 되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알아서 생각하겠죠.”
“성국, 넌 내가 패배를 인정하기를 바라는 거지?”
“마크, 나는 너를 큰 곤경에서 구해준 거야.”
“성국, 나는 너를 돕기 위해 판 거야.”
노티아 주식을 판 마크도 한마디를 지지 않았다.
[이것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마크, 9월 15일에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할 거야. 그 이후의 미국 경제는 바닥을 칠 거고. 주식 시장은 당연히 수직 하락이겠지. 안 그래?”
“성국, 네가 무슨 예언자라도 되는 줄 알아? 날짜까지 맞추게?”
“전반적인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다는 거야. 리먼 브라더스가 버틸 수 있는 시간 말이야.”
“딱 열흘 남았으니까, 지켜보자고.”
그 순간, 나는 재미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마크, 노트북 좀 쓸게.”
나는 얼른 ‘페이스 노트’를 열어서 숫자 10을 올렸다. 그리고 그 아래 설명을 덧붙였다.
- 미국 파산의 날이 앞으로 열흘 남았습니다.
댓글들은 정말 입에 담기 힘든 내용들로 넘쳐났다.
- 성국, 제발 병원 좀 가봐. 미국이 파산한다고? 그럼 세계가 망하는 거야.
- 마크, 제발 성국 좀 말려.
- 진짜 가지가지 하는 놈이네. 완전 관종이잖아.
나는 거기에 댓글을 달았다.
- 미국이 파산 위기까지 몰릴 정도로 경제적 쇼크가 곧 올 것입니다. 전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뭐, 달리는 댓글들은 대부분 입에 담기 힘든 욕이었다.
* * *
2009년 9월 6일 토요일.
<인턴>의 기획 회의가 시작됐다.
기존의 연출자와 작가가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와… 이런 말 실례일 수도 있는데. 진짜 잘생기셨어요.”
연출을 맡은 팀 바튼이 악수를 청했다.
“과찬이세요.”
잘난 척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나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메인 작가인 엘리자베스 브라운도 반겼다.
“도날드가 처음에 막 꽂아 넣어서 제가 반감이 좀 있었거든요. 근데 이력 찾아보고 완전 반했어요. 앞으로 활약 기대할게요.”
“회의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회의해볼까요?”
팀의 주도로 회의가 시작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좀 가볍게 가고 싶은데… 다들 어때요?”
“이번 출연자들이 재벌 후계자에서부터 대부분 다 엘리트들이라서요. 그런 점을 이용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전 오히려 반대인데요.”
내가 손을 들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오히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땀의 결과를 알게 해주는 에피소드가 어떨까 해서요.”
“그런 게 뭐가 있을까요, 성국 군?”
“예를 들면 푸드트럭에서 음식 장사를 해서 가장 많이 매출을 올리고. 그 매출 모두를 기부하는 거죠. 푸드트럭은 하나의 기업이잖아요. 그걸 운영하는 사람이 실전 요리부터 마케팅까지 모두 다 해야 하는.”
“괜찮은데요? 다들 어때요?”
팀이 찬성하자 반대는 거의 없었다.
“첫 에피소드로 좋을 것 같아요. 보통 첫 관문은 팀전이니까 음식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팀워크도 알 수 있고. 재벌 후계자가 땀 흘리며 요리하는 모습 보는 것도 재미있겠는데요.”
엘리제베스 브라운도 적극 찬성했다.
“성국 군, 다음 에피소드가 ‘페이스 노트’ 대표의 요구에 따른 신사옥 구하는 거잖아요. 그때, 생각해둔 방향 있어요?”
“저희가 신사옥 구하는 것과 동시에 직원도 더 늘릴 거거든요. 늘어난 직원들이 직책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구조가 가능한 건물과 인테리어 도안을 요구하면 어떨까 해요.”
이때, 팀 바튼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다가 나를 쳐다봤다.
“성국 군, 제가 성국 군 ‘페이스 노트’를 팔로우하고 있거든요.”
[나 팔로워만 수십만 명이야.]
팀 바튼은 말을 이었다.
“근데 오늘 본 모습과 ‘페이스 노트’에서의 성국 군 모습은 좀 다르거든요. 나쁜 의미가 아니라… ‘페이스 노트’에 거의 확실하게 미국이 앞으로 열흘 안에 파산 위기를 겪을 것이다. 이렇게 굉장히 자신 있게 글을 쓰잖아요. 댓글들에도 독설도 서슴지 않고요. 그래서 난 오늘 성국 군을 보기 전까지는 찰리 잡스나 도날드 트럼펫 같은 스타일이라고 혼자 상상했거든요.”
[다 맞는 말이야, 감독. 나 지금 연기하는 중이야. 참, 내가 대한민국에서 아주 유명한 아역 모델이었던 사실을 말했던가?]
팀 바튼은 살짝 웃더니 내 눈을 쳐다봤다.
“성국 군, 오늘 첫날이라 살짝 본모습 숨기는 거죠?”
“감독님, 근데 그게 왜 궁금하시죠?”
“사실은요. 성국 군이 지금 막 ‘페이스 노트’ 직원들을 구할 거라고 해서 생각난 건데요. 저희 <인턴>의 스핀오프로 ‘페이스 노트’ 직원 채용하는 프로그램을 하면 어떨까 해서요. 물론 성국 군이 도날드의 역할을 해야 하고요.”
“어머! 감독님! 정말 좋은 생각인데요!”
엘리자베스 브라운이 격하게 반겼다.
“저희 메인 작가도 그렇게 생각한다네요. 성국 군, 생각은 어때요?”
“전 그럼, You're FIred. 안 외쳐도 되죠?”
“당연하죠. 그럼, 진짜 기획서를 올려서 한번 바로 추진해볼게요. 물론 성국 군에게도 출연료는 나갈 겁니다. 도날드 정도는 아니겠지만, 적지 않은 금액일 거예요.”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스 노트’ 광고도 하고, 돈을 벌 기회. 거기다 불황 속에서도 건재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줘서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할 수도 있는 이 제안을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감독님. 추진해 주세요!”
* * *
2008년 9월 10일 수요일.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기 닷새 전.
기획 회의 때 추진한 <인턴>의 스핀오프인 <인턴 : 페이스 노트에 취업해라!>라 내년 상반기 편성이 확정됐다.
거기다 내 출연료는 물론 현재의 도날드 트럼펫보다 적지만 한 회당 100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0억이 넘는 금액이 책정됐다.
계약금으로 시즌의 30% 출연료를 먼저 받기로 했고, 내가 적극적으로 이 프로그램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는 것이 조건으로 붙었다.
나는 집 거실에 앉아서 계약서를 살폈다.
의논하기 위해 우리 집에 온 마크가 휘둥그레 한 눈으로 나를 봤다.
“성국, 네가 진짜 <인턴>을 진행하는 거야?”
“어차피 우리 ‘페이스 노트’ 직원 뽑을 거잖아. 이 기회에 홍보도 하고 일석이조! 거기다 내 출연료가 있어서 투자자들이 손을 떼도 당분간 걱정도 될 거고….”
“나도 나가야 해?”
마크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싫으면 안 나와도 되지만, 누굴 떨어뜨릴지 결정하는 회의 장면 같은 게 필요할 거야. 그때 네가 나와서 착한 역을 하고, 나는 악역을 맡는 거지. 어때?”
“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크는 갑자기 손으로 배를 만졌다.
“마크, 왜 그래?”
“나도 살 좀 빼야 하나….”
“뭐, 살 뺀다고 달라질까?”
“성국,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진실을 말하면 상처받지.”
“이게 <인턴> 속 내 콘셉트야.”
“콘셉트 아니고, 실제도 네가 그렇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독설 뱉는 거.”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면 꼭 싫어하더라.”
나는 마크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참, 전태국은 미미 씨한테 불고기 잘 배우고 있지?”
“근데 성국… 너 이런 거 막 유출해도 돼? 다른 참가자들은 아직 첫 번째 미션이 뭔지 모를 거잖아. 이거 불공평한 거잖아.”
“마크, 제일 중요한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는 거야.”
마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들은 종종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도날드 트럼펫이 하는 <인턴>에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내가 뒤에 있는데, 무조건 이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