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17화 (217/231)

제217화

리먼 브라더스 파산 바로 직전의 주말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실리콘밸리의 날씨는 여전히 쾌적했으며, 마크와 리미미는 내가 혼자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리미미가 또 미역국을 끓여서 들고 왔다.

“리미미 씨, 도대체 미역국을 얼마나 끊인 거예요?”

“제가 북조선에서 못 먹고 자라서 그런지 뭐든 음식을 하면 많이 하게 되네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리미미 씨, 대한민국에서는 미역국을 생일에는 먹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절대 먹지 않아요. 미끄러진다는 의미가 있거든요.”

마크가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성국, 그럼… 네 예언대로 주식이 미끄러질지도 모르는 거야?”

“마크, 말이 그렇다고. 미역국은 미신이지만, 내 분석은 과학이야.”

“암튼, 잘난 척은. 성국, 주말에 뭐 할 거야? 나랑 미미는 캠핑가려고 하는데….”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

“같이 가자고 한 말 아니야.”

마크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사장님, 할 일 없으면 같이 가요. 인터넷도 안 되고, 정말 쉬고 오기 좋아요.”

“태국이 형도 촬영 때문에 바쁘고. 제가 드디어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데,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사장님도 참 별나십니다.”

“미미, 냅 둬. 성국이 별난 거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

마크는 미역국을 참 잘 먹었다.

나는 잠시 창밖을 내다봤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정말 월요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마크는 문득 나를 쳐다봤다.

“성국… 근데 진짜 네 말대로 15일에 엄청난 위기가 올까? 이렇게 일상이 평범한데, 네 말대로라면 러시아에서 핵폭탄이 날아오는 것 같은 위기가 온다는 거잖아. 갑자기…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마크의 말대로 많은 이들이 나의 분석과 몇몇 경제지에서 내놓는 우려를 믿지 않았다.

“마크,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야. 마크 트웨인이 그렇게 말했어.”

“네 말은 우리가 모두 지금의 미국 경제 상황을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지?”

“모든 경제 수치가 보여주고 있지만, 다들 은행이 파산할 거라는 것을 생각조차 안 하잖아.”

마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내가 노티아 같은 아날로그 핸드폰이 계속 명맥을 유지할 거라고 생각한 것처럼?”

“마크, 이제 깨달은 거야?”

“아니! 성국, 진짜 노티아 반등하면 나, 너한테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자, 두 사람 모두 그만 싸우고 밥이나 먹어요! 월요일이 돼보면 알겠죠.”

나는 리미미가 끓인 미역국을 먹기 시작했다.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전태국이었다.

- 성국아, 푸드트럭에서 불고기 파는데… 우리 팀이 제일 못 팔고 있어. 어떻게 하지?

“홍보는 제대로 했어요?”

-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전단지 나눠주고 다했지.

“오늘은 주말이잖아요. 누가 전단지 보고 와요. 이럴 때 쓰라고 짹짹이랑 ‘페이스 노트’가 있는 거라고요.”

- 아, 맞다! 고마워, 성국!

[정말 손 많이 가는 전태국이야….]

* * *

2008년 9월 15일 새벽 2시.

나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눈뜨고 기다렸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 신청을 하는 시각. 그리고… 미국은 대혼란에 빠지는 역사적인 날이 된다.

인터넷은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미국 대선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달칵.

현관문이 열리면서 촬영을 마친 전태국과 박성희가 피곤한 얼굴로 들어섰다.

“성국, 아직 안 잤어?”

“네, 이제 좀 자려고요. 형은 촬영 다 끝났어요?”

“성국아, 우선 고마워. 간신히 꼴찌는 면했는데, 팀원들이 나를 막 비난하는 통에 싸우느라 혼났어.”

“뭐라고 비난했는데요?”

“난 좀 씻고 잘래. 박성희 비서한테 마저 들어.”

전태국은 지칠 대로 지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박성희 비서가 뒤이어 설명했다.

“너무 불도저식으로 불고기를 해서 거의 꼴찌할 뻔한 거 아니냐. 간신히 SNS 홍보해서 살아나지 않았냐. 그 홍보도 사실은 네가 생각한 게 아니라 삼전 그룹의 아이디어맨에게 부탁한 거 아니냐. 엄청 공격받으셨어요.”

“태국이 형은 어떻게 대처했는데요?”

“어쨌든 떨어지지 않은 건 내 덕이니 감사하라고 소리치셨죠.”

역시 전태국다웠다.

전태국은 이번 <인턴> 시즌의 확실한 빌런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얼른 <인턴>의 메인 작가인 엘리자베스 브라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새벽에 미안해요. 이번 시즌 빌런인 전태국이 사실은 작가 그룹 중에 자신의 스파이 한 명을 심어두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서 중간에 불공정 행위로 탈락당하면 어떨까요?

물론 스파이 역할을 할 대역이 필요하긴 합니다. 전태국이 내부 인사를 돈으로 매수한 거죠.

비록 이 일로 탈락하지만, 후반부에 패자부활전을 통해서 극적으로 다시 합류해서 빌런미를 발산하고 장렬하게 죽는 것으로요.

이런 설정을 쌓아주기 위해서 전태국이 프로젝트 진행 중에 종종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연락하는 장면을 잘 잡아주세요. 그리고 에피소드 하나는 핸드폰을 전혀 쓸 수 없는 것으로 진행해야 할 것 같아요.

- 성국, 나 아직 대본 작성 중이라 깨어있었어요. 이번 <인턴>에서는 도날드가 아니라 당신이 아주 전태국을 살렸다 죽였다 하는군요.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극적 재미도 더 있을 것 같고요. 좋은 밤 돼요, 성국!

나는 답을 확인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곧 눈을 감았다.

* * *

2008년 9월 15일 월요일.

요란한 알람 소리?

이건 전화벨인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침 7시.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겨우 손을 뻗어서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거절을 누르자 곧이어 또 다른 곳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또 모르는 번호였다.

거기다 수십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지만, 대부분 언론사들의 인터뷰 요청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버리고 노트북으로 ‘페이스 노트’를 켰다.

내가 올린 글은 이미 성지글이 되어서 퍼지고 있었고, 댓글은 셀 수 없이 달렸다.

거실로 나가서 TV를 켜자 뉴스 앵커는 짐을 싸서 나오는 리먼 브라더스 직원들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띵동. 띵동. 띵동.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했고, 마크가 밖에서 소리쳤다.

“성국, 어서 문 열어!”

내가 문을 열자 마크가 잽싸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마크, 노티아 주식 팔기 잘했지?”

“성국,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한 말이 다 사실로 드러난 게 문제가 아니야?”

“지금 집밖에 너를 취재하겠다고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

“뭐어?”

나는 커튼을 살짝 올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콘도 아래 도로를 꽉 채운 취재 차량과 기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좀 골치 아프게 됐네….]

물론 인터뷰와 취재가 셀 수 없이 쏟아질 거란 예상 정도는 했다. 하지만 집 앞까지 와서 진을 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미 ‘페이스 노트’ 사무실에도 진을 치고 있겠지?”

“당연하지. 성국,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인터넷에서는 네가 무슨 기밀을 빼돌렸다는 말도 안 되는 루머부터, 네가 악마가 씌웠다. 아니다. 하늘이 내려준 예언자다. 난리도 아니야. 진짜 어떻게 할 거야, 성국?”

“흠… 이건 생각 못 했어.”

“진짜? 그럼, 대책이 없다는 거야?”

“마크, 우선 내 핸드폰은 지금 켜둘 수가 없어. 피터한테 연락 좀 해야 할 것 같아. 핸드폰 좀.”

“어, 여기….”

마크는 얼른 핸드폰을 내밀었다.

나는 마크의 핸드폰으로 피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피터가 전화를 받았다.

- 마크! 안 그래도 성국이한테 연락이 안 돼서….

“피터, 저예요.”

- 성국!

“피터, 전화가 너무 많이 걸려 와서 어쩔 수 없었어요.”

- 그 큰 사고를 쳤으니 당연하지. 참, 내가 전화한 이유는 말일세. 지금 상황이 바뀌고 있단 말을 해주려고!

“손 뗐던 투자자들이 다시 돌아온다고 하던가요?”

- 그렇지! 성국, 위기가 기회가 됐어.

위기가 기회라고?

아니, 이건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투자자들을 걸러낼 절호의 찬스였다.

- 성국, 내 말 듣고 있지? 자네가 사비 털어서 버틸 이유가 사라졌단 말이야. 성국, 정말 잘되지 않았나?

“피터, 저에게 등을 돌렸던 투자자들 이번 기회에 다 정리하겠습니다.”

- 뭐?

옆에 있던 마크도 놀라서 피터와 똑같이 되물었다.

“뭐라고, 성국?”

전화기 너머로 피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성국,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투자자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야. 돈이 안 될 게 보이면 떠나는 존재들이라고. 그들을 잘 이용하는 것도 우리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지 않나.

피터는 이제 거의 나를 아기 달래듯 달래고 있었다.

[피터, 왜 이래. 나 전직 재벌이야.]

나는 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피터, 전 투자자들에게 의리를 요구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는 꼭 필요하다고 봐요. 나를 믿고 기다려준 이들에게는 더 큰 이익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손절이 기다린다는 것을 이 기회에 다른 투자자들에게도 보여줘야 한다고 봐요.”

- 성국, 하지만….

나는 피터의 말을 잘랐다.

“피터, 기업과 투자자 간에 신뢰와 믿음이 없다면 그런 투자자들은 언제든 저를 또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봅니다. 전 등을 돌렸던 투자자들의 재투자를 반대합니다. 마크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렇지, 마크?”

내 물음에 마크도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에 대고 말했다.

“피터, 이건 성국의 말이 맞아요. 성국이는 이번 일로 주식 전부를 팔았고,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피터, 우리는 약삭빠르게 위기에 우리를 손절한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아도 버틸 수 있어요!”

마크도 이번 일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연이어 피터에게 이야기했다.

“피터, 그들이 돌아오지 않아도 이번 일로 나와 ‘페이스 노트’의 가치는 더욱 올라갈 거고, 투자자들은 자연스레 몰릴 거예요. 피터, 옥석을 가릴 준비나 해주세요.”

- 성국, 자네 말을 잘 알겠네. 두 사람의 의견도 존중하고. 하지만 투자자들이 물갈이되려면 족히 두세 달의 시간이 필요하네. 자네도 알지?

“물론이죠. 그 정도 시간은 버틸 수 있어요. 피터, ‘페이스 노트’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요. 참, 이 사실을 언론에 흘려주세요.”

- 등 돌린 투자자들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고 자력으로 버티겠다는 거 말인가?

“네…. 약삭빠른 투자자들이 등을 돌려도 ‘페이스 노트’는 건재하고, 우리는 배신한 이들은 다시 받아주지 않는다. 이것을 이번에 보여주고 말겠어요!”

* * *

피터는 우리의 의견을 100프로 수용하고 전화를 끊었다.

[뒤통수친 놈들은 언제든 또 뒤통수칠 수 있다고….]

마크가 난감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우리 잘 헤쳐나갈 수 있겠지?”

“마크, 걱정 마. 내가 있잖아. 참, 전화 한 통 더 쓸게.”

“그래….”

난 바로 <인턴>의 연출은 팀 바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성국, 기사 봤어요. 대박이네요! ‘페이스 노트’의 천재가 미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정확한 분석을 통한 예견까지 했으니… 우리 스핀오프는 촬영하자마자 완전 흥할 거예요! 분명히요!

“팀.”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팀을 불렀다.

아마 내 목소리에서 팀도 뭔가를 직감했는지 들뜬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 성국, 원하는 조건을 이야기해봐요.

[역시, 방송국놈들이야….]

나는 다이렉트로 내가 원하는 조건을 이야기했다.

“제 출연료를 도날드 트럼펫과 동등하게 올려주세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드디어 팀 바튼이 입을 열었다.

- 성국, 방송국 측에 긍정적으로 어필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