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지금 자네….”
대디 킹은 무슨 말을 꺼내려다 말을 멈췄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물을 마시고 샐러드만 연신 먹어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마크와 데니스는 대디 킹의 눈치를 살폈다.
탁- 정적을 깨는 포크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대디 킹은 샐러드를 다 먹고는 아내인 숀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숀, 커피 부탁해. 자네들도 다 마실 텐가?”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잠시 커피 준비하러 다녀올게요. 대화 나누고들 계세요.”
숀이 자리를 뜨자마자 대디 킹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렸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포즈를 취하더니 나를 쳐다봤다.
“숀은 밥 먹을 때, 내가 테이블 위에 팔 올리는 것을 너무 싫어하거든. 근데, 난 이렇게 안 하면 생각이 안 나.”
대디 킹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풀었다.
마크와 데니스도 겨우 한숨 돌린 눈치였다.
“성국, 자네 의견은 잘 알겠네. 이 늙은이가 방송국을 탈피해서 새로운 길을 갈 배짱이 있는지 한번 떠보는 거지?”
“너튜브에 대디 킹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새로운 매체를 주목하기 시작할 거예요. 그만큼 당신은 미국이나 전 세계 매체에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고요.”
“물론 자네는 너튜브에 지분이 있고?”
대디 킹이 이미 나에 대한 조사 정도는 했을 거란 것은 알고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흠… 만약 내가 여기서 거절한다면, 자네는 누굴 찾아갈 것인가?”
“두 번째 대안은 생각해 두지 않았어요, 대디.”
“이유는?”
“당신은 이 방송을 꼭 해야만 할 거거든요.”
“내가?”
대디 킹은 팔을 테이블 위에서 떼더니 몸을 젖혔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단언하는 게 웃기면서도 귀엽다는 느낌이었다.
“성국,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지?”
“사람들은 제 말을 예언이라고 생각하지만, 전 항상 모든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결론을 도출해요, 대디. 이 과정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지. 그리고 자네는 솔직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기 미국 대통령보다 더 미국인들에게 주목받고 있기도 하고 말일세.”
“그렇다면 단지 매체 때문에 인터뷰를 꺼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저는 이번 인터뷰를 ‘페이스 노트’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할 거예요. ‘페이스 노트’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SNS 중 하나에요, 대디. 그렇다는 것은 젊은이들을 바로 너튜브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렇다고 중장년 시청자들을 외면할 순 없지.”
“제 ‘페이스 노트’에 인터뷰 글을 올리면 아마 기자들은 신나게 퍼 나르기 시작할 거예요. 꼭 ‘페이스 노트’를 하지 않아도 또 다른 경로로 사람들은 당신과 나의 인터뷰를 알게 되는 거죠.”
“흠….”
대디 킹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세를 몰아 말을 이었다.
“제 작전은 결국, 이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이 보게 만든다는 의미인 거예요. 그저 TV를 틀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흘리듯이 듣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이 인터뷰가 궁금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시청한다는 건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대디 킹은 내 말에 조금씩 설득당하고 있었다.
“흠….”
이때, 대디 킹의 와이프 숀이 커피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대디 킹은 얼른 팔을 다시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20살이나 어린 와이프지만, 와이프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숀은 우리에게 모두 커피를 돌렸다.
“대디, 샐러드에서 올리브는 왜 꼭 이렇게 빼는 거예요? 올리브가 몸에 얼마나 좋은데요. 이제 먹기 싫은 것도 건강을 생각해서 먹을 나이잖아요.”
“숀, 내 나이가 어때서?”
“대디….”
숀은 타이르듯 대디 킹을 부르면서 어깨를 도닥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그런데 이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했다.
대디 킹은 커피를 마시고는 나를 쳐다봤다.
“성국, 도전해 보지. 내가 그동안 너무 한길만 고집한 것 같기도 하네.”
“대디, 그럼. 인터뷰 자료를 취합해서 실리콘밸리로 돌아가는 대로 보낼게요. 인터뷰는 어디서, 언제 할까요?”
“나도 실리콘밸리를 한번 구경하고 싶네. 다음 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서 녹화를 하지.”
“모든 경비는 저희 측에서 제공하겠습니다. 출연료도 말씀해주시면.”
이때, 대디 킹이 손을 저었다.
“성국 군, 난 이미 방송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네. 자네 같은 젊은이들에게 출연료는 받지 않을 생각이야.”
[대디, 너튜브 조회수 잘 나오면 나도 돈을 버는 구조라고….]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대디 킹은 그의 말대로 너튜브 수익 따위 없어도 이미 돈은 죽을 때까지 못 쓰고 죽을 만큼 벌어놨다.
“그럼, 실리콘밸리 돌아가는 대로 비행기와 숙소 예약해서 보내겠습니다.”
“난 그동안 정말 자네에 대해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알아볼 테니까, 잔뜩 긴장하고 있게.”
“대디, 이번 인터뷰의 주제는 미국 경제를 예측한 단 한 명의 인물, 전성국이라는 것만 잊지 마세요.”
“인터뷰는 내가 하는 거네. 주제는 분명 그거지만,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자네에 대해서도 엄청 궁금해 할 거거든.”
역시 베테랑 진행자다운 모습이었다.
“내가 자네 잘난 척의 원천을 아주 샅샅이 파헤쳐주겠어!”
대디 킹의 말에 마크와 데니스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 * *
대디 킹과의 미팅을 마치고 나온 우리는 데니스의 차에 올라탔다.
“비행기 내일 아침이지?”
“응.”
마크가 대답했다.
“그럼, LA에 온 김에 별이나 보러 갈까?”
“지금 우리랑 별 보러 가자는 거야, 데니스?”
마크는 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난 꼭 가고 싶었다.
“마크, 가보자고. 별 보러.”
“성국, 남자 셋이서 별 보러 가는 게 말이 돼?”
“마크, 너 결혼하면 이런 일도 흔치 않을 거야. 그리고 멋있으면 다음에 리미미 씨랑 오면 되잖아.”
“아, 그럴까?”
“역시 마크한테 리미미 씨만 붙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니까. 데니스, 별 보러 가보자.”
우리는 그렇게 남자 셋이 별 보러 그리피스 천문대로 향했다.
* * *
별 보고 내려오는 길, 데니스의 눈망울이 별처럼 반짝였다.
아마 요즘 데니스는 한참 힘든 타이밍일 게 분명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감독이 될 기회를 노리곤 있지만, 영화는 단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뒤에서 마크는 피곤한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데니스, 하버드로 돌아가면 단편 영화 연출 하나를 해보는 게 어때?”
“단편을?”
“응. 네가 쓴 건 모두 장편 영화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시나리오만 보고 너에게 덥석 감독 자리를 안길 제작사는 아무 데도 없을 거야. 우선 네 실력을 단편으로 증명해 보이면 점차 기회가 생길 거야.”
데니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성국. 내가 너무 계단을 한꺼번에 오르려고 했나 봐. 천천히 올라가도 부족할 판에… 실력도 안 되는데, 말이야.”
“데니스, 넌 실력은 충분해. 내가 보기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네 실력을 알아봐 주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야.”
데니스는 내 말을 듣더니 빙긋 웃었다.
“성국,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닭살 돋게 왜 이래? 친구끼리.]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국, 너 그거 알아?”
“뭐?”
“너 맨날 잘난 척하면서 이기적으로 굴어도 결국, 네 주변 사람들 다 챙기고 있다는 거.”
“그거야….”
[나한테 이익이 되니까 그러는 거야, 데니스. 나 저번 생에서 영화광이어서 할리우드에 친한 영화감독 한 명 친구로 두고 싶다고. 그게 바로 너고….]
나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쩔 땐 말보다 침묵이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할 때도 있으니까.
* * *
데니스는 ‘페이스 노트’ 사무실을 살펴보고 있었다.
“성국, 촬영을 여기서 했으면 하는 거지?”
“응. 이왕이면 저 벽면에 쓰여있는 ‘face-note’가 아주 선명하게 나오게.”
“흠… 그건 나쁘지 않은데, 너무 ‘페이스 노트’ 광고 같지 않을까?”
“내 목적이 그건데?”
“진짜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그럼, 오늘 이 공간의 배치 좀 따로 해야 할 것 같아.”
“직원들 퇴근하고 하지, 뭐.”
데니스는 며칠 전부터 실리콘밸리에 와서 우리들과 같이 지내면서 촬영 계획을 짜고 있었다.
“성국, 간단한 메이크업 해줄 사람도 필요할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한테 부탁해볼게.”
“그게 누군데?”
“<인턴> 메인 작가야.”
데니스의 눈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데니스는 여자, 특히 방송일 하는 여자에게 약했다.
“데니스, 엘리자베스는 이미 40대야.”
“아하…. 근데 어떻게 너 내 눈빛 읽은 거야?”
“데니스, 넌 여자한테 약한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아, 알았어. 혹시 조명도 빌릴 수 있냐고 물어봐 줘.”
“데니스, 나는 너튜브 촬영답게 아플폰으로만 했으면 하는데.”
“조명 몇 개만 있으면 돼. 네 말대로 아플폰으로 이 과정을 담을 거고….”
“잠깐만, 데니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나는 얼른 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찰리 잡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찰리 잡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성국, 오랜만이야.
“찰리, 제가 재미있는 일을 하나 벌이는데 아마 찰리도 들으면 엄청 좋아할 것 같아서요.”
- 대체 무슨 일을 또 벌이는 거야?
“이번 주말에 대디 킹이 와서 저랑 인터뷰를 하기로 했어요.”
- 대디 킹? 그 토크쇼의 레전드?
“네, 그 대디 킹이요.”
- 대디 킹 이름만 들어도 흥미진진한데. 어서 말해봐, 성국.
나는 그간 있었던 일과 대디 킹과 인터뷰를 하게 된 사연을 모두 이야기했다.
“찰리, 우리는 너튜브로 이 인터뷰 영상을 풀 건데요. 너튜브라는 사이트 특성상 거창한 카메라가 아니라 아플폰으로 촬영을 진행할 거예요. 그 과정을 아플사에서 담아서 광고로 이용하는 거 어때요?”
전화기 너머로 찰리 잡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성국, 네가 천재인 건 알았는데… 암튼 이건 그냥 할 수 없는 일이잖아.
“당연히 광고 계약을 맺어야죠. 참, 대디 킹의 허락도 필요하고요.”
- 오케이. 그 문제 바로 해결해줘. 안 그래도 우리의 영상 편집 기술이랑 광고를 같이 하고 싶었는데, 너무 좋은 기회 같아. 금액은 상관하지 말고 대디 킹이랑 꼭 이 건 성사시켜줘. 성국, 물론 자네 출연료도 걱정하지 말고. 말로 이럴 게 아니지 1시간 내로 계약서 초안 작성해서 보낼게.
찰리 잡스는 전화를 끊고 말처럼 1시간이 채 안 돼 계약서를 보냈다.
그사이 대디 킹과 통화한 나는 대디 킹이 원하는 금액 등을 확인했고, 찰리 잡스가 보낸 계약서 내용에는 대디 킹이 원하는 조건들과 대부분 일치했다.
그리고 나는 데니스에게도 계약서를 내밀었다.
“성국, 이게 뭐야?”
“너도 돈 받고 일해야지. 계약서 쓰자.”
“네가 돈 주기로 했잖아. 난 그거면 됐어.”
난 데니스에게 촬영의 대가로 1,000달러를 지불하기로 했다.
“데니스, 그걸로는 단편 영화 찍을 수 없잖아.”
“어?”
데니스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데니스, 이번 촬영은 너튜브에 공개도 되지만. 어쨌든 아플사의 광고로도 쓰일 거야. 거기엔 네가 촬영한 영상도 쓰일 거고. 이 일은 네 커리어에 굉장히 큰 한 부분이 될 거야. 그리고 아플사에서 쓸 광고에도 들어가는 영상을 촬영하고 돈을 안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돼!”
“성국아….”
데니스는 말을 잠시 멈췄다.
[감동 받은 모양이지?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때, 데니스가 나를 와락 안았다.
“성국아, 진짜 고마워. 진짜 고마워.”
“데니스, 출연료로 딴짓하지 말고 단편 영화 꼭 찍어야 해.”
“당연하지! 진짜 이걸로 단편 영화 꼭 찍을게!”
* * *
촬영 전날 밤.
나는 노트북으로 마지막으로 촬영 콘티를 확인했다.
대디 킹이 미리 보낸 인터뷰 질문들도 숙지했다.
일적인 부분에 대한 질문들이 주로였지만, 대디 킹은 분명히 사적인 질문들도 마구잡이로 던질 것이고 그건 나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막 씻고 나온 데니스가 머리를 털면서 물었다.
“성국, 안 자? 내일 촬영 힘들 거야. 잠 좀 자둬.”
“마지막으로 질문 좀 더 확인하고.”
“그럼, 나 먼저 잘게.”
“잘자, 데니스.”
나는 이제 혼자 남겨진 거실 한구석에 다시 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을 고치고 또 고쳤다.
이때, 식탁 위에 오른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발신자는 알 수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는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 자네가 성국 군인가?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VIP?
- 나 임명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