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애덤이 나가고 마크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성국, 멋있었어!”
[나 멋있을 땐 멋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리미미가 내 어깨를 팍 잡았다.
“사장님, 잘난 척은 좀 자제하시고요.”
오른쪽 어깨는 마크가, 왼쪽 어깨는 리미미가 꽉 잡고 있었다.
“둘 다 내 어깨의 짐이라는 것은 알겠네.”
“진짜, 암튼 성국… 애덤, 나도 지켜보는 직원이야. 개발자로 빠른 스타일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루트를 개발하려는 친구거든. 저런 친구들이 나중에 크게 한 방씩 해줄 거야.”
“어쨌든 총 들고 온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야. 어서 햄버거나 먹자고. 오후에 <인턴> 촬영하려면 속이 든든해야 하잖아.”
나는 햄버거를 먹었다.
위기에 적군과 아군은 더욱 선명해지기 마련이었다.
* * *
<인턴> 촬영 시작 30분 전.
이번 촬영은 나와 마크에게 <인턴> 참여자들이 준비한 새 사옥에 대해서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이 중에서 추려진 세 군데의 사옥 중에 하나를 우리가 선택하면 그곳을 소개한 참가자가 우승을 한다.
마크와 나는 참가자들이 소개할 사옥 건물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마크는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인 사옥을 선호했다.
“성국, 이거 멋지지 않아? 여기서 일하면 자연 속에서 일하는 기분일 거야. 피톤치드 장난 아니게 나오겠지?”
“그렇지. 피톤치드뿐 아니라 저녁에는 멧돼지도 나오고.”
“성국!”
“마크, 농담이야. 근데 위치 좀 봐. 너무 외지지 않아? 출퇴근하는 사람들 고충도 생각해야지.”
“우리 기숙사를 짓는 건 어떨까?”
마크는 들뜬 얼굴로 이야기했다.
“마크, 고등학교 3년. 거기다 하버드에서 기숙사 생활한 게 좋은 추억인 건 알겠지만. 나 빼고 모두 성인이라고. 너만 해도 리미미 씨랑 헤어져서 기숙사 방에 살 거야?”
“아, 그건 아니지. 싱글들만 기숙사 생활하는 건 어때?”
“마크, 싱글들한테 지금 시골에 갇혀서 일만 하라고 시키는 악덕 업주가 되고 싶은 거야?”
“그건 절대 아니지….”
마크는 금세 꼬리를 내렸다.
나는 마음에 드는 사옥 두 곳을 마크에게 보여줬다.
하나는 세련된 스타일의 사옥에 공원도 가깝고, 오픈된 스페이스가 많아서 직원들과 소통하기 좋아 보였다.
“마크, 난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
“태국이가 추천한 데야?”
“아니, 태국이 형은 다른 곳이야. 태국이 형이 소개할 곳은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 곳이긴 해.”
마크는 내가 내민 사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괜찮네. 근데 태국이 소개할 사옥이 더 멋진데? 오픈 스페이스에. 와, 여기 정원도 장난 아니게 멋져. 난 여기가 더 좋은 것 같은데?”
“흠… 그렇긴 한데. 여긴 월세가 훨씬 더 비싸.”
“진짜네. 한 달에 만 달러 차이이면 솔직히 고민되지.”
“세 달이야 태국이 형이 내주겠지만, 그다음은 우리가 내야 하잖아.”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럼, 나도 첫 번째가 좋아.”
마크도 동의했다.
“마크, 그럼. 우리는 이 건물을 최우선으로 하고 의견 조율하자.”
“오케이!”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거대한 윙클 형제가 걸어 들어왔다.
“성국, 생각보다 지금 사옥도 멋진데?”
사교성 좋은 타일러가 빙긋 웃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직원들이 더 늘어날 거라서, 이제 좀 더 넓은 공간으로 옮기려고.”
“그래, 직원 수에 비해서 공간이 좀 좁아 보이긴 하더라.”
까칠한 캐머런이 응수했다.
나는 얼른 타일러와 캐머런을 쳐다봤다.
“두 사람 다 보고 갈 거지?”
“당연하지.”
“참, 두 사람 카메라에 좀 잡혀도 돼?”
“우리가 참관하는 거?”
“응.”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물어봤다.
윙클 형제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타일러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국.”
* * *
타일러와 캐머런은 2층 난간에서 촬영이 이뤄질 1층 사무실을 내려다봤다.
캐머런이 약간 짜증 난 어투로 타일러에게 물었다.
“카메라에 얼굴 내미는 건 안 하는 게 좋잖아.”
“캐머런, 이 회사를 인수하든 못하든 성국을 적으로 돌리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제발 성격 좀 죽여.”
“근데 타일러. 성국, 정말 무슨 꿍꿍이지? 분명 투자자들이 등 돌렸다고 확인했잖아.”
타일러는 턱을 매만졌다.
“투자자들이 등을 돌린 건 사실이고. 하지만 성국의 그 미국 경제 예언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아우성을 쳤는데도 다 거절한 상황이잖아.”
“똥고집 때문에 회사 말아먹는 사람 우리가 한두 명 본 거 아니잖아.”
“성국은 똥고집이 아닐 거야.”
“그럼?”
“뭔가 다 계산된 느낌이야.”
캐머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일러, 그럼 넌 ‘페이스 노트’가 건재할 거 같다는 거야?”
“응.”
“그럼, 우리한테 기회도 없는 거잖아.”
“아마도.”
“그런데 왜 오자고 한 거야? 그런 수작은 왜 하고?”
“그냥. 계속 성국이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보고 싶었어.”
타일러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촬영 중인 성국을 쳐다봤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블라인드 사이트에 돈 써가며 그런 글을 올렸다고?”
“응. 왜 그런 거 있잖아. 평생 저 사람 눈에 거슬리고 싶은 마음.”
“그런다고 성국이 우리를 신경 쓸 성격 같아?”
“사람 속은 모르는 거지. 지금 당장은 신경 안 써도 계속 이렇게 방해물이 되다 보면 언젠가는 한번쯤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불편해 하겠지.”
캐머런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쌍둥이라고 해도 네 마음은 알 수가 없어.”
“암튼 오늘 성국이 우리를 어떻게 써먹나 잘 보자고. 나중에 우리도 똑같이 되갚아 주면 되잖아.”
“근데 타일러, 너 왜 그렇게 성국한테 집착하는 거야?”
“나보다 어린데 동양인이야. 거기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 출신인데, 우리보다 항상 높은 성과를 거두잖아. 난 성국이 추락하는 걸 이 두 눈으로 꼭 지켜볼 거야.”
* * *
드디어 촬영이 시작됐다.
우선 나와 마크과 현재 ‘페이스 노트’ 사무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카메라는 사무실 이곳저곳을 잡았다.
“현재는 직원들과 의사소통이 편하지 않은 구조라서요. 좀 더 오픈되고, 직원 수도 앞으로 늘어날 예정이라 좀 더 큰 공간도 필요한 상황입니다.”
진행자는 ‘페이스 노트’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기업이라고 덧붙였다.
이때, 카메라에 ‘페이스 노트’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는 윙클 형제가 잡혔다.
“어, 저 두 분은 누구죠?”
“아하, 윙클 형제 모르세요?”
“혹시 그 유명한 윙클 인베스트먼트의 윙클 형제인가요?”
“네, 하버드 동창들이에요.”
나는 단순히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만 설명하고 곧 다시 사무실 소개로 넘어갔다.
이 짧은 순간만으로도 미국 유명 투자사들이 노리는 ‘페이스 노트’라는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킬 게 뻔했다.
* * *
이제 마크와 나를 상대로 <인턴>의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찾은 새 사옥을 소개했다.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서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 했던 사옥을 찾은 참여자와 전태국만 남은 상태였다.
“성국, 마크. 두 사람은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오픈된 공간을 원한다고 했잖아요. 제가 찾은 곳은 실리콘밸리 중에서도 공원과 가깝고. 실내도 가벽으로 나눠져있어 언제든지 오픈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제가 건물주와 상의했는데, ‘페이스 노트’가 들어오기만 한다면 지금 세워진 가벽들은 모두 무료로 오픈해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렌트비 조정은 되나요?”
내 물음에 참여자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 건물주가 성국의 광팬이라고 하더라고요. 들어오기만 한다면 최대한 맞는 가격에 조정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나와 마크는 눈을 마주쳤다.
적당한 가격에 매력적인 공간인 것은 분명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전태국이 자신이 소개할 사옥을 가지고 나왔다.
“성국, 마크. 저는 삼전 그룹의 샌프란시스코 법인 직원을 총동원해서 ‘페이스 노트’의 명성에 걸맞은 사옥을 찾았습니다.”
전태국은 이미 시작부터 반칙이었다.
참여자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제 빌런 역할에 제대로 맛을 들인 전태국은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며 야유를 환호인 듯 받아들였다.
“다들 날 질투하네요.”
“전태국 도전자, 이 건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해 주시죠.”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서 전태국은 건물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는 실리콘밸리에서도 가장 좋은 위치로, 가장 최근에 최신식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층고도 높고 공간은 오픈되어 있으며 건물 근처에 공원이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공원보다 더 멋진 정원이 갖춰진 공간이죠. 이런 곳에서 일한다면 ‘페이스 노트’가 더 승승장구할 것 같지 않나요?”
“하지만 렌트비가 먼저 참가자보다 만 달러가 더 비싸네요.”
“겨우 만 달러 때문에 이 멋진 공간을 지금 놓치겠다는 건가요, 성국?”
겨우 만 달러라니?
한 달에 천만 원이 훨씬 넘는 돈이라고. 이 돈이면 유능한 개발자 두 명은 고용하는 금액이었다.
[역시 재벌은 경제 관념이 없단 말이야….]
내가 고개를 젓자, 마크가 더듬더듬 물었다.
“태국, 혹시 전 도전자처럼요. 렌트비를 조정할 수 있나요?”
“마크, 렌트비를 왜 조정합니까?”
“그, 그거야… 비싸잖아요. 오늘 본 매물 중에서 가장 멋지고 마음에 들긴 하지만 가장 비싼 것도 사실이잖아요.”
전태국은 비열하게 미소를 짓더니 팔짱을 꼈다.
“만약 제 매물을 선택한다면 일 년 치 렌트비를 제가 내드리겠습니다!”
동시에 참가자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말도 안 돼!”
“거짓말쟁이!”
그러자 전태국은 참가자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나 삼전 그룹 후계자야! 이 정도는 껌값이라고!”
나는 그 순간 마크와 눈을 마주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로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는 참가자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저희의 선택은! 전태국 씨가 구해온 매물입니다!”
* * *
전태국인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사무실로 걸어 들어왔다.
“성국! 축하해줘! 나 다음 라운드 진출이야!”
“형, 그 정도 돈 썼으면 우승을 해야죠. 겨우 다음 라운드 진출에 도대체 돈을 얼마나 쓴 거예요?”
“어차피 세 달 치는 내줄 거잖아. 아홉 달 치 더하는 거가 뭐가 어때서. 그리고 사옥이 번지르르해야 투자도 더 잘 되는 법이야. 사람들은 아무리 안 그런 척해도 겉모습에 현혹당해.”
전태국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잘생기고 아름다운 남성과 여성에게 더 친절했고, 더 많은 기회를 준다.
회사의 외관도 마찬가지이다.
다 쓰러져가는 우범 지대에 위치한 회사보다야 당연히 쾌적한 공간을 갖춘 회사를 신뢰했다.
“태국이 형, 계약서 써야죠.”
“성국, 법무팀 통해서 계약서 보낼게.”
“참, 형. 이사는 다음 주에 바로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저기 텅텅 비어있어!”
* * *
그날 밤, 나는 달력을 살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한 달이 훌쩍 넘었다.
내가 한 미국 경제가 폭락한다는 분석도 잊혀질쯤이었다.
대량 해고가 이어지고, 경제는 정말 최악의 수준으로 치달았다.
이제 품고 있던 떡밥을 뿌릴 때가 됐다.
나는 ‘페이스 노트’에 글을 올렸다.
- 다음 주 토요일 저녁 6시 <인턴>에 ‘페이스 노트’ 새 사옥 구하기 미션이 방송됩니다.
- 다음 주 토요일 저녁 8시 대디 킹과의 인터뷰. <너튜브>로 독점 공개!
- 참고로 이사 후 새 사옥 랜선 공개합니다. 많관부!
댓글들이 주룩주룩 달리기 시작했다.
- 경제 위기에도 ‘페이스 노트’는 끄떡없네.
- 미래를 보는 사나이 전성국이 대표인데, 말해 뭐 해.
- 근데 성국,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성국은 연애 안 해?
갑자기 댓글의 방향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 미국에서 만 17살이면 뭐든 할 나이이지.
- 너무 갓벽해서 여자 만나기 힘든 거 아닌지 몰라.
- 성국, 나르시스트잖아. 자기 자신만큼 사랑할 여자가 없는 거야. 이 세상에는.
마크가 웃으면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더니 마크가 소리쳤다.
“성국, 댓글 봤어?”
“봤어.”
나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성국, 지금 댓글로 다들 네가 연애를 못 하는 열 가지 이유 달기 놀이에 심취해 있어.”
“난 미성년자라고.”
“성국, 중고등학생들도 다 연애라는 것을 하는 게 미국이야.”
“마크, 넌 못 했잖아!”
“나는 예외고!”
마크도 지지 않았다.
이때, 뒤에서 리미미도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성국, 소개팅할래요?”
[흠… 소개팅이라….]
“우리 개발팀 막내 여동생이 이 근처 고등학교 다니는데, 성국이랑 동갑에 치어리더래요. 사진 봤는데, 완전 예쁘고. 공부도 잘한대요. 어때요?”
“흠… 소개팅 해보죠, 뭐!”
인생에는 원래 평범한 순간도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