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26화 (226/231)

제226화

“성국, 소개팅 나간다는 게 사실이야?”

사무실에 출근하고 나니 내 뒤통수 어디서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크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마크, 내가 소개팅 나간다는 게 언제 이렇게 소문이 퍼진 거야?”

“미미가 그 여동생 둔 직원에게 이야기했으니까, 쫙 퍼졌겠지.”

“근데 내가 소개팅 나간다는 것을 왜 저렇게 이상한 말투로 이야기하지?”

“네가 댓글 다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뭐 게이니 어쩌니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거든.”

“뭐어?!”

내 소리에 주변 직원들마저 놀라서 쳐다봤다.

“성국, 뭘 그래? 농담이잖아.”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는 건 아니지!”

“난 네가 그런 댓글도 의식해서 이번 소개팅 한다는 줄 알았더니, 안 읽었던 거야?”

[댓글은 정신 건강에 해롭다고!]

저번 생에서는 청문회 때 립밤 한 번 발랐다고, 어찌나 별의별 댓글들이 달렸던지. 그 이후로 댓글은 적당히 보고 지나쳤다.

마크는 내 등을 두드렸다.

“성국, 이번 기회에 소개팅 잘해봐. 나도 몰랐는데, 연애해 보니까 엄청 좋아. 내 편이 생긴 것 같다니까.”

“마크, 리미미 씨가 항상 네 편은 아니잖아.”

“미미는 좀 객관적이지. 그래도 일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데.”

“마크, 네가 항상 까먹는 게 있는데… 나 미성년자야. 동거는 성인들이나 하는 거잖아.”

“아, 맞다. 미성년자면 어때. 가끔 햄버거 먹고, 영화 보러 가면 되잖아.

말할수록 머리만 아팠다.

“마크, 오후에 새로 이전할 사옥이나 가보자.”

골치가 아플 때는 일로 잊는 게 최고였다.

* * *

새로 이전할 사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위치도 좋았고, 지은 지 얼마 안 돼 모든 시설이 최신식이었다.

렌트를 책임진 부동산 업자와 박성희 비서가 함께 건물을 둘러봤다.

마크는 보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우! 성국, 우리 진짜 성공한 것 같아.”

“마크, 앞으로 더 성공할 테니까… 걱정 마.”

부동산 업자는 친절하게 모든 장소를 일일이 설명했다.

“제가 듣기로는 가벽을 철거하고, 오픈된 스페이스에 테이블을 놓을 거라고 들었는데요. 맞죠?”

“네, 거대한 카페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물론 여러 개의 분리된 회의실 공간이 필요하긴 하지만요.”

나는 생각한 사무실의 모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거대한 나무로 된 테이블을 놓고. 각 테이블마다 콘센트를 둘 거야. 그리고 저기 벽 쪽으로 분리된 회의실 공간을 둘 거고…. 여기 가운데 여러 명이 마음대로 앉을 수 있는 소파도 두면 좋을 것 같아.”

“성국, 커피는 무제한으로 줄 거지?”

“당연하지. 커피머신은 공간이 크니까 한 세 군데 정도 분산해서 두면 좋을 것 같고….”

“성국 군, 대표실은 따로 안 두나요?”

박성희 비서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 앞으로 일할 때만 나올 거라서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분리된 공간이 필요하면 회의실을 쓰면 되고요.”

박성희 비서는 나와 마크의 요구사항을 모두 입력했다.

“한마디로 편안하고 소통하기 좋은 분위기를 원한다는 말씀이죠?”

“네, 비서님.”

“아마 인테리어 기간은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들어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박성희 비서는 칼 같은 성격답게 계약과 인테리어에 관한 모든 사항을 정리했다.

나는 아직은 텅 빈 ‘페이스 노트’ 사무실을 쳐다봤다.

저번 생에서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미 본사 건물이 있었고, 내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새로 시작해야 했다.

이제 이 공간에서 ‘페이스 노트’는 상장까지 달려갈 것이다.

나는 마크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크, 우리가 해낸 거 같지?”

“정말… 믿어지지 않아.”

마크도 감격한 얼굴이었다.

“성국, 오늘 저녁에 미미랑 축배라도 들어야겠는데. 어때?”

“내가 끼면 안 되는 자리 아니야?”

“무슨 소리야. 한식당에 음식 주문할게. 우리는 술, 너는 콜라. 어때?”

“좋지!”

* * *

오랜만에 한식 냄새를 맡으니 입맛이 저절로 다셔졌다.

마크는 한인 타운의 식당에서 김치찌개부터 시작해서 각종 요리를 싹 담아왔다.

“마크, 이걸 어떻게 다 먹어?”

“걱정 마. 주말이잖아. 남은 건 나랑 미미가 집에서 뒹굴뒹굴 거리면서 다 먹으면 돼.”

“사장님, 음식 많은 건 절대 걱정하지 말고 어서 앉으세요. 참, 사장님… 소개팅 날짜 다음 주 토요일 12시 어때요?”

“좋아요.”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눈앞에 김치찌개와 잡채가 있는데, 소개팅이 귀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근데… 사장님. 소개팅에도 후드 티에 데님 입고 나가실 거예요?”

“소개팅이라고 정장 입어야 해요?”

“그게 아니라요. 좀 더 요즘 애들처럼 입어야 상대방이 좋아하지 않을까요?”

“이게 요즘 애들 스타일 아닌가요? 마크, 넌 어떻게 생각해?”

“성국, 내 체크 셔츠 빌려줄까?”

마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미미가 소리를 질렀다.

“그건 절대 안 돼!”

리미미의 말에 마크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미미, 내 패션이 어때서?”

“마크… 그게 말이야.”

리미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크, 내 말은… 체크셔츠는 사장님한테 안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

“그렇지? 그리고 이제 성국이가 나보다 너무 커서 빌려주지도 못해. 아마 성국이가 내 셔츠 입으면 팔이 다 나올 거야.”

“맞아, 마크.”

리미미도 마크의 체크셔츠가 패션 테러리스트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제 체크셔츠는 마크의 상징과 같았다.

리미미는 맥주와 콜라를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사장님, 콜라 마실 거죠?”

“당연하죠.”

나는 콜라를 집어 들었다.

마크는 이제 제법 익숙한 젓가락질로 잡채를 열심히 먹었다.

“성국, 우리 나중에 성공하면 한국 음식 레스토랑도 차리자. 미미 때문이 아니라 한식 먹으면 속이 든든한 기분이야.”

“그래… 회사 구내식당 메뉴에 넣지. 뭐.”

“성국, 너랑 이런 상상만 해도 막 즐거운 거 있지?”

“마크, 상상은 꼭 현실이 될 거야.”

우리 둘의 대화를 듣더니 리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암튼 둘 다 긍정적이에요.”

[사실이래두…. 리미미.]

이때, 초인종이 미친 듯이 울렸다.

“누구지?”

인터폰에는 전태국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문을 열자 전태국이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테이블에 앉았다.

“역시 김치찌개 냄새 맞았어! 마크, 잘 먹을게.”

연이어 박성희 비서도 뛰어 들어왔다.

“저도 같이 먹어도 되죠?”

“그럼요. 음식 넉넉해요.”

전태국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더니, 부른 배를 튕기며 나를 쳐다봤다.

“성국, 소개팅 나간다며?”

“태국이 형도 알아요?”

“너 소개팅 나간다는 얘기로 지금 ‘페이스 노트’ 난리도 아니야.”

나는 리미미를 쳐다봤다.

“리미미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사장님, 말이 퍼지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특히 ‘페이스 노트’에서는요.”

* * *

“안 돼! 갈아입어!”

전태국이 아침부터 내 방문 앞을 지키고 서서 소리를 질러댔다.

“태국이 형, 난 이게 편해요. 소개팅이라고 때 빼고 광내는 일에는 관심 없다고요.”

“박 비서! 어제 내가 골라놓은 옷 좀 가지고 와봐.”

“네!”

박 비서는 전태국이 어젯밤에 골라놓은 옷들을 들고 왔다. 골라놓았다고는 하지만 택도 떼지 않은 새 상품들이었다.

분명 소개팅 나간다는 말에 옷을 사둔 모양이었다.

“성국, 이거 입고 나가.”

“형, 전 후드 티가 편해요.”

“소개팅에 후드티를 입고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태국이 형, 나야 회사 생활하는 사람이지만 오늘 만나는 친구는 고등학생이라고요. 고등학생들은 다 이렇게 입고 다녀요.”

전태국은 박 비서까지 동원했다.

“박 비서, 성국이 어때?”

“늘 같은 성국이죠.”

“내 말은 저 의상이 소개팅에 맞다고 봐?”

“흠… 좀 후줄근하긴 합니다.”

“성국, 박 비서도 후줄근 하다잖아!”

“태국이 형, 이런 명품은 필요 없고요. 제 옷 중에 깨끗한 후드 입고 나갈게요.”

“안 돼! 안 된다고! 박 비서, 어서 성국이 잡아!”

때마침 도착한 마크도 내 어깨를 잡았다.

“성국, 그러면 내 체크셔츠 입고 나갈래?”

“그건 아니지!”

* * *

나는 결국 전태국이 준비한 명품 셔츠에 데님을 입었다.

후드티를 벗는 대신 평범한 셔츠를 선택했다.

거기다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나이스 운동화 대신 새 운동화도 신었다.

[소개팅에 이럴 일인가… 난 얼굴이 열일하는데….]

나는 종알거리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약속 장소는 요즘 10대들이 주로 논다는 거대한 쇼핑몰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소개팅 코스는 커피 후 식사, 뭐 그런 순이었다.

내가 카페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자 리미미의 말에 따르면 인근 하이스쿨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여학생 한 명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 금발에 푸른 눈동자. 전형적인 금발 미인에 상큼함까지.

인기가 있을 만한 외모였다.

“혹시, 성국?”

“네, 맞아요.”

“엠마 버튼 맞죠? 우리 회사 줄리아 버튼의 여동생이죠?”

“네! 우리 언니가 천재라고 그러던데, 외모는 천재가 아니라 완전 프롬킹인데요.”

“프롬킹도 했어요.”

“와, 대박. 고등학교를 도대체 몇 살에 졸업한 거예요?”

엠마 버튼은 십 대 여학생답게 궁금한 것도 많았고, 나는 최대한 성실히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저번 생에서 소개팅을 극도로 싫어했던 이유가 막 떠올랐다.

이런 자기소개 시간이 싫었기 때문이다.

저번 생에서는 삼전 그룹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면 그것대로 질문을 수없이 받았고, 밝히지 않으면 나중에 뒤에서 재수 없단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엠마 버튼은 옆에서 연신 종알종알 떠들었다.

“사실은 우리 언니가 자기 회사 사장이 두 명인데. 한 명은 전형적인 공돌이고, 다른 한 명은 전형적인 나르시스트라고 해서 엄청 궁금했거든요.”

[뭐야, 직원들도 내가 나르시스트인 거 아는 거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엠마, 커피 마실래요?”

“전 탄산수요. 성국, 제가 말했던가요? 저 꿈이 가수거든요. 그래서 지금부터 몸매 관리하는 중이에요.”

엠마 버튼은 그 뒤로도 정말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놨다.

[아… 나랑 10대 여자는 정말 안 맞는군….]

나는 그저 엄마 버튼이 떠드는 말을 들어주거나, 고민을 상담해줬다.

“성국, 제가 너튜브에 동영상 올려서 가수 될 수 있을까요?”

“엠마, 뭐든 한번 시도라도 해봐요. 그렇게 생각하고 말만 할 동안에 한 번이라도 시도를 해보면 달라질 거예요.”

그 이후에도 엠마는 나에게 친구 관계부터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상담했다.

“근데, 엠마. 오늘 나랑 소개팅하러 나온 거 아니에요?”

“아, 맞다! 그냥 성국이랑 있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져서요. 미안해요. 근데, 성국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이상형이라?

“우리 그런 이야기 말고 이번 대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요?”

나는 이상형 같은 한심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흥미가 없어서 이야기를 대선 쪽으로 유도했다.

[지금까지 재미있게 해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내 매력을 어필해야겠군.]

“엠마, 이번 미국 대통령 누가 될 거 같아요?”

“어… 그건… 글쎄요. 전 투표권도 없는데요.”

“그래도 생각은 할 거잖아요? 미국 시민인데, 그 정도는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성국… 아직은 별생각이 없어요.”

엠마는 당황스러운지 괜히 배시시 웃었다.

나는 시계를 봤다.

이제 내가 나오는 <인턴>의 방영 시간이었다. 그리고 2시간 후에는 유튜브에 내 인터뷰도 독점으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엠마, 오늘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영화나 봐요.”

[훗. 나한테 푹 빠진 것 같지만 이건 예의상 하는 말이야, 엠마.]

“아… 성국, 성국 말 듣고 나 이제부터 너튜브에 영상 올리게 연습 좀 더 하려고요.”

이 반응은 뭐지?

“성국, 미안해요. 앞으로 나 바빠서 연락 안 될지도 몰라요.”

[영화 보자고 한 건 그냥 빈말이라고!]

“오늘 즐거웠어요, 성국!”

엠마 버튼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카페를 빠져나갔다.

* * *

집에 도착하니 거실에서 ‘페이스 노트’를 보고 있던 마크와 전태국이 미친 듯이 웃으면서 소파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성국, 도대체 너 소개팅을 어떻게 한 거야?”

“다들 왜 그래?”

“엠마가 너랑 소개팅한 후기를 자기 ‘페이스 노트’에 올렸어.”

“뭐라고 올렸는데?”

“직접 봐.”

나는 전태국이 가리킨 후기를 읽어 내렸다.

- 성국은 겉모습은 완벽한 10대 킹카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따분한 정치 이야기나 하는 우리 아빠와 다를 게 없었다.

영화 보자며 애프터 신청을 했지만, 나는 정치 이야기나 하는 따분한 남자를 도저히 만날 자신이 없어서 도망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두 나의 태연한 태도에 놀란 듯 보였다.

마크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너 지금 완전 노잼이라서 완벽하게 까인 거잖아.”

“마크, 이제 다들 내가 연애 안 하는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을 거잖아. 난 그걸로 됐어.”

전태국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역시 전성국은 다 계획이 있을 줄 알았어.”

마크도 내 등을 툭 쳤다.

“암튼 연애 안 하는 핑계 만드는 것도 천재적이야.”

[그래. 이건 내가 의도한 거야. 의도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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