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축하합니다!'
'총 34억 4,727만 1,875원.'
당첨이다. 세트장에 서 있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로또라는 게 원래 이렇게 쉽게 되는 건가. 놀란 것보다 얼떨떨한 마음이 훨씬 컸다. 머리를 긁적이다 용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 이제 회사 때려치워도 되는 거지. 요즘 물가에 평생 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생만 하며 여유 없이 달려왔던 삶이었다. 모처럼 찾아와 준 행운을 기회 삼아 1년은 놀아 볼 심산이었다. 그리고 갚아야 할 은혜도 남아 있었다.
"신해신, 뭐 해! 얼른 와!"
"네! 지금 갑니다!"
우렁찬 목소리의 선배가 나를 불렀다. 저 사람 꿈을 꿀 리는 없으니 이건 현실이 확실했다. 돈 없고, 빽 없어 흘러 들어온 방송국 말단 인생. 드디어 피는 건가. 그간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너, 오늘 유달리 굼뜨다? 핸드폰 보고 있던데, 뭔 일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기계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요."
"하긴, 그 폰 쓴 지 오래됐지. 기변 하는 게 어때?"
"…이거 바꾼 지 몇 년 안 됐는데요."
"참, 요즘 애들답지 않아. 예전 그 고물 고장 안 났으면 계속 썼겠다."
"그랬을 수도 있고요."
당첨된 걸 알리고 싶지 않아 둘러댄 핑계였다. 여러모로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다. 대응해 놓지 않으면 난감해질 수 있었다. 머쓱하게 대답해 주니 그제야 노선을 변경하는 선임이었다.
"어휴, 말을 말자. 내일 본리허설이라 오늘 다 할 거래. 서둘러야 되겠는데?"
"…윽, 진짜요?"
"손도 빠른 놈이 앓는 시늉하기는. 자, 그럼 오늘도 한번 굴러 봅시다."
어깨를 감싼 팔이 거세게 몸을 눌렀다. 허우적거리다 들리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평상시와 달리 힘을 줘 슬쩍 빠져나왔다. 퇴사하면 연락처부터 바꿔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좋은 일은 알려 주는 게 아니라고 배웠던 삶이었다. 귀찮았지만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야, 근데 네 또래 애들 데뷔하는 것 보면 기분 이상하겠다?"
"그럴 게 뭐 있어요. 그리고 제 또래 아니거든요. 제가 6살은 족히 더 많아요."
"내가 봐선 거기서 거기야, 인마. 교복 벗은 지 10년 안 됐으면 다 똑같은 거지, 뭐."
"…선배 6살 많게 보면 화내실 거잖아요."
"이 자식, 왜 어린 게 아니냐?"
"아! 아파요. 오늘 할 것도 많다면서요."
풍겨 오는 담배 냄새에 코가 매웠다. 그만 떨어져 주면 좋을 것 같았다. 밀려오는 피곤함에 시선을 돌려 무대를 바라봤다.
뜨거운 조명 아래로 계단 형식의 좌석 백여 개가 펼쳐져 준비되어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방송인데, 하기만 하면 그렇게 인기가 많으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어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매무새를 정리하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일찍 퇴근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나저나 너는 이런 것 관심 없냐?"
"…저요? 이거 아무나 하는 것 아니에요. 무서우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하여간에 진짜 겁 많다니까. 생긴 거랑 달리 내용물은 흐물흐물해서……."
민망함에 코밑을 훑었다. 어차피 저것도 더는 못 들을 농담이었다. 언제 어디서 심기 틀어진 인간들의 불호령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도급 업체 소속 말단이란 건 참 서글픈 직급이었다. 책 잡힐 사건은 만들지 말아야 했다. 해탈한 기분으로 어깨를 돌렸다. 이제는 정말로 일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왜 너도 곱상하잖아. 연출부의 자랑스러운 날티 훈남 신해신이 아냐. 걔네만큼 할 수 있지."
"……그 호칭은 또 뭐예요? 그리고 저 처음에 양아치인 줄 아셨다면서요. 다 들었어요."
"아이고, 들켰네. 누구야, 그 입 가벼운 자식은?"
킬킬거리는 선배에 한숨을 내쉬었다. 날 놀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일은 하지도 않았는데 진이 다 빠져 있었다. 아, 집에 가고 싶어졌다.
얼른 끝내고 퇴근해 버려야지. 그러곤 은행에 방문해 팔자를 고치는 거야. 원대한 계획을 세우며 희망에 부풀었다.
장비를 주워 들고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빛냈다. 고된 잡일도, 새벽 세트장도 이제는 전부 안녕이었다. 순탄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 * *
…뭐지? 정신이 들지 않았다. 당첨금을 수령하고 회사를 그만둔 다음 날이었다. 지긋지긋한 상사들과 헤어진다는 결론에 그저 기쁜 하루였다.
이 생활도 끝이라며 귀가한 게 바로 어제저녁이었다. 잠자리에 든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어째서인지 길바닥 한가운데 서 있었다. 서늘한 바람에 몸을 떨었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잠이 덜 깼나."
망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경한 공간이었다. 높은 빌딩과 상가가 즐비한 도심 한복판이었다. 인근을 돌아보며 위치를 파악했다.
모두 아이디카드를 목에 맨 채 커피를 들고 움직였다. 직장인들이 지나다니는 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여긴…….
"회사 앞이잖아."
이곳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어제 때려치운 방송국 인근의 오피스 단지였다. 맞은편에 보이는 음식점은 종종 밥을 시켜 먹은 곳이었다.
"퇴사가 너무 기뻤나……."
무슨 놈의 잠꼬대가 이러냐며 놀라고 있었다. 일단은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몸을 돌린다는 게 그만 뒤편의 건물과 부딪쳐 버렸다. 통증에 놀라 턱을 들었다. 코팅된 가게 유리에 얼굴이 비쳤다. 미묘한 이질감에 그만 침묵했다.
"……?"
아직도 잠에서 못 깬 건가? 날카로운 눈매가 풀려 끔뻑거렸다. 놀란 심정에 그대로 뺨을 비틀어 꼬집었다. 알싸한 통증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아픈데?"
다소 긴 앞머리가 눈을 찔러 왔다. 입으로 불어 넘기니 드러난 피부가 말갛다.
"…눈이 나빠진 건가? 그럴 리는 없잖아…."
하룻밤 새 1.0에 달하던 시력이 떨어졌을 리는 없었다. 알 수 없는 위기의식이 느껴졌다. 보육원을 나왔을 때의 막막함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그만 인정해야 하는 사실 같았다.
건너편에 비친 인물은 사회에 찌든 26세의 내가 아니었다. 아니, 나는 맞았지만 이건 현재로부터 꽤 과거의 낯이었다.
갓 성인이 되었을 무렵의 어딘지 어린 티가 나는 신해신이었다. 뭐지? 의문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현듯 촬영장에서 본 연습생들이 떠올랐다. 그 또래라 해도 무방할 연령대처럼 느껴졌다. 원래도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이건 제법 뽀송한 얼굴이었다.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가능하던가.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금융 치료로 인한 심리적인 회춘? 도파민 분비 뭐, 그런 건가……."
[빰빠라밤]
['랜덤! 스타★코인 아이돌'에 입장하셨습니다.]
폭죽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정체불명의 소음이 들리는 괴상한 상황이었다. 삽시간에 눈앞으로 흰 창이 떠올랐다.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플레이어 '신해신' 님 반갑습니다.]
"…누구세요?"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정면을 응시했다. 인파가 지나다니는 만큼 수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잔고]
23억 4,267만 2,486원.
…저거 내 당첨금?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통장에 얌전히 들어 있어야 할 금액이었다. 정체 모를 미확인 생물체보다 내 돈의 안위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신해신' 님께 미션이 주어집니다.]
[메인 미션]
1군 아이돌이 되어 보자
[성공 시]
저당 금액 반환
[실패 시]
잔고 '0'원
"네?"
너무 비현실적이다 보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느 때와 같은 평일 일상이었다. 말도 안 되는 기행에 이마를 매만졌다. 이거 확인할 방도가 있는 건가. 믿기지는 않았지만, 의심은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별안간 핸드폰의 존재가 떠올랐다. 은행 앱에 들어가 보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머니를 뒤져 찾아내는 것까진 성공했다. 하지만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이게 왜."
이 모델은 과거에 사용한 구형 기기였다. 세트를 철거하다 망가트려 새 걸 구매한 게 재작년의 일이었다. 이질감을 무시하며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했다.
떠오르는 계좌주가 내 이름인 게 예전에 쓰던 물건이 맞는 것 같았다. 기다림 뒤 나타난 숫자에 크게 경악했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칠백이십?!"
통장에는 당첨금을 제외하고 백 단위의 금액만이 찍혀 있었다. 정말 감쪽같이 23억이 사라진 형편이었다. 모든 게 진실이라 판명되니 넋이 나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진짜로 내 돈을 저당 잡았다는 말이었다.
[메인 미션]
1군 아이돌이 되어 보자.
[성공 시]
저당 금액 반환
[실패 시]
잔고 '0'원
물음에 응대하듯 같은 창이 나타났다. 연속으로 깜빡이는 게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뉘앙스였다. 한순간 생판 모를 이에게 23억을 빼앗겼다. 기절하지 않은 게 대단한 이야기였다.
별의별 부당한 일은 다 겪어 봤다고 자부했다. 악덕 업주 밑에서 일해 본 적도 있었고,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진 경우도 빈번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고난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보면 여태까지 중에 가장 질 나쁜 조롱이라고 장담했다.
"야 이 미친놈들아, 이건 아니잖아."
바른말 청년을 자처하던 내 입에서 비속어가 튀어나왔다. 한마디로 나는 얼굴이 어려졌고, 전 재산을 저당 잡혔으며, 아이돌이 되지 못하면 모든 걸 잃는 상태에 처해 버렸다.
회사도 때려치운 마당에 굶어 죽으란 건가. 당장의 앞길이 막막했다. 게다가 나보고 연예인을 하라니, 내 나이가 스물여섯이었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라도 마주쳤다가는 최악이었다. 주책 부린다며 놀림받아도 할 말이 없는 관점이었다.
"아이돌이 무슨 뚝딱하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1군을 떠나 아이돌이 되는 것부터 문제였다. 소속사에서 귓등으로도 안 들을 논제라고 자신했다. 그 어떤 바보도 일반인을 데뷔시켜 주진 않을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가 당한 일과는 관계없다는 듯이 화창한 날씨였다. 그러다 고층 건물 꼭대기 부근의 대형 스크린을 목도했다. 공영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 현실을 회피하는 중이었다.
저 앵커, 몇 달 전에 음주 운전으로 자숙에 들어갔었다. 새삼 복귀가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걸리는데 데자뷔인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잠겨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201X년 1월 7일, 오늘의 소식 전달드립니다. 정재계에 새로운…….]
"201X년? …이거 방송 사고 난 것 같은데."
일시가 전혀 맞지 않았다. 직업병처럼 원인부터 추론하던 찰나였다. 그러다가 영상 상단부의 날짜를 보게 됐다.
201X년 1월 7일 12:50 pm. 손아귀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을 벌리고는 그저 하염없이 눈만 깜빡였다.
"하… 하하… 진짜야……?"
바람이 들어찬 듯 헛웃음 지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모두 뻥이라고 해 주기를 기다렸다. 꿈이라면 이건 악몽이었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내가 로또에 당첨된 건 202X년이었다. 나는 지금 4년 전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