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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5화 (5/328)

5화

"네,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형은 생각해 보던 게 있으세요? "

"아뇨. 저도 이유준 연습생과 비슷해요. 그냥 처음부터 같이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저희 마음이 꽤 잘 맞을 것 같지 않나요."

"네. 뭐……."

나는 딱히 아니라고 보는데…….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식어 빠진 음료 두 잔, 저당 잡힌 재산, 초면인 낯선 인물, 스태프로 일하던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하는 상황……. 이 모든 게 전부 믿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입이 바싹 말랐지만, 방송까지 그리 길지 않은 일정이었다. 뭐가 됐든 공동 운명체의 동행. 힘을 내기로 결심했다.

* * *

땀에 전 채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폐가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수준이었다. 이유준이 축축한 이마를 훔쳐 내곤 허리를 세웠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 말을 걸었다.

"…제발 조금만 쉬자."

"그래요. 10분 있다가 다시 해요."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허물어지듯 드러누웠다. 한기가 올라와 후끈거리는 열을 식혀 주는 것 같았다. 옆에서는 근육 놀란다며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보며 며칠 전을 회상했다.

이유준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습득했다. 소속사 계약 만료 이후 개인으로 참가하게 된 케이스라고 알려 줬다. 초짜인 나와 달리 경력직 신입인 연습생이었다.

단정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인형을 바라봤다. 스무 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 싶어 신기했다. 그래도 물리적으로 갓 성인인 애와 어울리는 건 민망했다.

그러다 얘의 포지션이 래퍼라는 걸 확인했다. 상태 창을 못 봤다면 예측하지 못했을 면모였다. 스탯이 A-였으니 상당한 실력자였다.

개인 연습생 조가 2개여서 안도했다. 잘못했다면 이유준과의 비교에 포커스가 맞춰질 뻔했다. 그랬다면 평가부터 망했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날 우리는 오랜 시간 의견을 나눴다. 천생 여유로운 타입인지 적응력이 엄청난 편이었다. 자연스럽게 형이라 부른 건 둘째치고, 내게 반말까지 유도하는 태도를 보였다.

어딘가 예사롭지 않더니 성격 때문인 게 분명했다. 조곤조곤 얌전한 말씨임에도 불구하고 거부를 할 수 없었다. 사회초년생답지 않은 은근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얘한테 완전히 말렸다.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도 저쪽은 경험이 있었다. 뭐가 됐든 리드해 주니까 수월한 계획이 만들어졌다.

이유준은 본인이 사용하던 연습실의 환경이 괜찮다며 제안해 왔다. 나야 그를 비좁은 곳에 초대할 수 없었으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슬슬 다시 연습할까?"

"더 안 쉬어도 되겠어요?"

"어, 이제 괜찮아."

몸을 일으켜 정해진 대형에 자리했다. 그런 내 옆으로 음악을 재생한 이유준이 다가왔다. 건반 소리를 기점으로 비트가 흘러나왔다. MR에 맞춰 노래까지 불러야 해서 죽을 맛이었다. 당장 무대가 코앞이었다.

* * *

어느덧 촬영일이 다가왔다.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방송국 안에는 어리고 풋풋한 애들이 가득했다. 지금부터 얘네랑 경쟁을 하란 말이지.

막막함을 감추며 스태프로 보이는 인물에게 다가갔다. 신분을 점검하더니 캐리어에 참가 번호가 적힌 네임 태그를 붙여 수거해 갔다. 연습생 신해신, 앞으로 쉴 새 없이 불릴 내 지명이었다.

[신해신]

나이: 22

외모: B

보컬: C+

댄스: B

운: C

끼: B-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그사이 스탯에는 큰 변동이 있었다. 쉬는 기간 내 만들어 놓은 능력이었다. 출연이 확정 지어진 후 떠오른 상태 창이었다.

[미션]

'시작이 반이다'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출연을 확정 지으세요.

보상: 1,000 코인 + 스탯 1회 분배권

알게 모르게 시스템 내 이벤트가 있었던 정황이었다. 스탯 1회 분배권이라고? 말 그대로 한 등급을 올려 주겠단 뜻이었다.

불안하게 너무 좋은 걸 준다 싶었다. 의심은 했지만, 언제 이런 걸 받아 볼까 싶어 그냥 써 보기로 결정했다.

시즌들을 거쳐 가며 느낀 점이었다. 타고난 연습생도 좋지만, 이목을 끄는 건 발전형 연습생이었다. 시청자들은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를 원했다. 그래서 나도 그 방향을 선택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천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능력 부족으로 우회한 거였다. 쉽게 가는 걸 기피할 인간은 없었다. 핑계라도 대야 덜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보컬 혹은 댄스를 올리지 않았다. 중간은 넘는 수치인데, 더 올리기엔 일반인 프레임을 달고 가기 힘들 것 같았다.

포지셔닝은 확실히 하되 심한 욕을 먹지 않을 정도의 역량이면 충분했다. 당장은 그보다 과하면 독이라고 분석했다.

거기에 외모는 걸리는 점이 남아 있었다. 나는 단순히 4년 전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평범한 이가 프로그램 첫 촬영에 미남이 되어 나타난다? 성형 논란을 부르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과거 사진은 1화와 대조될 확률이 높은 업계였다. 이 항목은 수술설을 제기하기 힘들 서바이벌 기간 내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때는 이런저런 밑밥을 까는 것도 가능할 느낌이었다. 시청자들이 합리적인 생각을 하기 힘들게 만들 예정이었다.

성형 논란 보단 초반에 조금 묻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뒤에 가선 하나씩 올릴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맨몸으로 부딪치는 건 무리수였다. 그래서 선택한 게 바로 끼 스탯이었다.

완벽하지 못해도 시선을 끌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잠재성을 엿볼 수 있게 만드는 설계였다. 평가 기준은 경력 없음을 갖고 가면서 앞날이 기대되는 유망주가 되고 싶었다.

분배권과 코인을 통해 해금법을 오픈했다. 낮은 스탯이라서 그런가, 그리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었다. 연습 할당량만 채우면 된다는 지령에 쾌재를 부른 게 얼마 전이었다. 덕분에 손쉽게 B-까지 올릴 수 있었다.

접수도 끝났고 뭘 해야 할지 고민하던 타이밍이었다. 남아 있던 잔여 코인이 눈에 띄었다. 녹화장에 들어가면 정신이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스킬 정도는 편하게 뽑아 놓고 싶었다. 유일하게 안 해 본 장치였다. 여유가 될 때 써 보는 게 좋을 듯했다.

[현재 코인]

2,370 코인

[스페셜 스킬 트리에 500 코인을 지불합니다.]

[스페셜 스킬 트리 룰렛 오픈!]

거창한 배경음과 함께 원판의 룰렛이 나타났다. 총 6칸으로 모든 곳에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START' 초록 버튼과 'STOP' 빨간 버튼이 존재했다. 예시조차 알려 주지 않겠다는 불친절한 의미였다.

이미 쓴 코인, 망설이지 않고 두 개의 버튼을 연달아 터치했다. 한참을 빙빙 돌더니 이내 한 곳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물음표가 지워지며 글씨가 나타나는 형식이었다.

[스페셜 스킬 '한 번 보면 잊지 못해(F)'를 획득하셨습니다.]

나도 센스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건 좀…….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기이한 명칭이었다. 뭘 보면 잊지 못한다는 건데. 아이템명이 추상적이어서 유추할 수 없었다. 그냥 500 코인 날린 걸까, 심란하던 찰나 상태 창과 함께 스킬에 대한 설명이 나타났다.

[스페셜 스킬]

'한 번 보면 잊지 못해(F)'

습득의 왕! 암기력은 맡겨 주세요!

*스킬 버프: 일시적으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등급에 따라 차등 효과가 부여되며, 암기력 활성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체 내용의 %로 적용)

S: 90 / A: 80 / B: 70 / C: 60 / D: 50 / E: 40 / F: 30

기억력을 상승시켜 준다는 특징의 버프였다. 등급에 따라 차등 효과가 부여된다는 점이 있었다.

이걸로 얻을 수 있는 게 많은 건 확실했다. 한 번 봐서 30%를 외울 수 있다니.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었다. 첫판에 코인값은 하는 걸 뽑아냈다고 생각했다.

"형."

때마침 등 뒤로 접근해 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이유준이었다. 교복 차림을 한 채 손을 들어 인사해 왔다. 아는 이를 봐서 그런 걸까, 그가 반갑게 느껴졌다.

"어, 안녕. 이거 어색하네."

"그럴 게 뭐 있어요. 아직 옷 못 갈아입었네요? 저랑 같이 가요. 이게 이번 시즌 메인이래요."

회색 블레이저에 남색 타이를 맨 이유준이 앞서 걸었다. 주변에는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자가 태반이었다.

착용 상태는 각양각색이었지만 얘가 스탠더드라는 건 확실했다. 단추 하나까지 정갈하기 그지없는 복장이었다. 내가 입었을 때는 저런 무드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형은 다른 교복 입을 것 같은데요."

"옷이 더 있나 보네?"

"네. 몇 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대충 봐도 색상만 같지, 디테일에서는 차이가 나는 걸 알 수 있었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연습생 한 명이 길게 늘어진 리본 타이를 자랑해 보였다.

이번 시즌에도 여러 대체재가 준비된 모양이었다. 내가 소화할 수 있을 조합이 있었나 떠올려 봤다.

인파를 뚫고 도착한 현장이었다.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교복을 나눠 주고 있었다. 신분이 확인되자 의상으로 보이는 비닐 팩을 전달받았다. 얼떨떨하게 바라보니 구석 한쪽을 가리켜 줬다.

"저기서 갈아입으면 된다고 했어요. 저 바로 앞에 있을게요. 이따 같이 메이크업 받고 들어 가요."

그렇게 한참을 휩쓸려 다녔다. 탈의를 마치니 얼굴 위로 화장품이 발렸다. 깃이 세워진 다른 유형의 교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 나이 먹고 입어 볼 줄이야. 단추 하나 채워지지 않은 불량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깔끔하게 하고 다녔는데. 선별 사유가 추측되니 어쩔 수 없는 부근이었다. 귀까지 뚫었으니 일관되게 밀어야 할 이미지라고 각오했다.

"연습생분들은 세트장으로 이동해 주세요!"

"들어가자."

"네."

앞서 가는 무리에 흩어지지 않도록 걸음을 재촉했다. 세트장에 입성하니 피라미드 형식의 계단 좌석이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 비슷한 걸 만든 경험이 남아 있었다. 제작만 하던 세트에 내가 앉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의자마다 숫자가 적힌 게, 서바이벌이라는 실감이 났다. 모두 최상위 공간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일부는 어디쯤 위치해야 하는지 눈치를 봤다. 가만히 지켜보니 용기를 낸 서넛이 꼭대기로 올라가 버렸다. 나머지가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대다수가 멘토석 뒤쪽 중앙으로 쏠려 버렸다. 적당한 순위와 함께 카메라에 잡히기 좋은 곳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체면상 뛰지는 못했지만, 경쟁이 느껴지는 속도감이었다. 저기 그렇게 좋은 자리 아닌데….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곤 이유준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저 앞 카메라 거의 안 돌려서 이쪽으로 가는 게 나아."

"네?"

"중앙석 카메라는 고정이라고. 저기 있는 게 리액션용일 거야.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데 앉으면 계속 걸리겠지. 편집될 수도 있겠지만 안 찍히는 것보단 나을걸. 저리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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