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6화 (6/328)

6화

방향을 돌려 골라 둔 지점의 단상에 올라갔다. 51번과 52번. 낮지도 높지도 않은 커트라인 선의 순번이었다.

메인 스테이지도 잘 보이고 좋은 경로를 그리는 라인이었다. 다툼이 심한 가운데를 피해서 한적한 지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감정 표현이 풍부한 성미들은 아니었다. 편집으로 잘릴 여지가 크다고 계산했다.

표정이 다채로웠으면 좋았을 텐데. 알고 있는 지식을 써먹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여기 있으면 영상 팀에는 자주 노출될 일이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들어오면서 봤어. 멘토석 쪽 카메라는 잘 안 돌아가더라고. 제일 활발히 움직이는 게 리액션 따는 거겠지 싶어서."

"아, 그렇구나……."

"다음부턴 참고해서 앉아. 방송 나가고 나선 다들 알 것 같지만 말이야."

적당한 구실을 둘러대며 앞을 바라봤다. 얘 성격에 믿어 줄지는 몰랐다. 그래도 뭐 어때, 설마 도와줬는데 반박하겠어? 반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인드였다.

나름 경력을 알차게 써먹고 있었다. 몰린 연습생들은 스태프에 의해 퍼져 나가고, 그제야 녹화에 들어갔다.

"스탠바이 합니다!"

조명이 꺼지고 적막이 흘렀다. 무대 뒤 커다란 전광판에 불이 들어왔다. 귀퉁이에 놓여 있는 기계에서 스모그가 올라왔다.

웅장한 BGM과 함께 장신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시즌 2의 대표가 누구였더라. 기억을 더듬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화려하게 등장한 남자에 뜨거운 반응이 모두 이해됐다.

"와, 진짜 잘생기셨다."

"투 샷 피하고 싶어지는 비주얼이셔."

30대 초반에 접어든 톱 배우, 고우림이었다. 얼마 전 굵직한 작품의 주연을 꿰찼었다. 만인의 이상형이라 불리는 유명인이기도 했다.

조각 같은 미모가 카메라를 향해 인사해 왔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인근이 요동쳐 왔다.

여유 만만이던 이유준 역시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살짝 굳은 옆태에서 긴장감이 풍겨 나왔다. 아직 애였다는 걸 깨닫게 된 지점이었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편의 대표를 맡은 고우림입니다."

"와아!"

"지난 시즌 1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 힘입어 이렇게 시즌 2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배우다운 훌륭한 딕션에 묵직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이걸 노리고 대표로 세운 거였네. 방송국 인간들 계획을 눈치채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즌 2에 사활을 걸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너무 집요해서 무서운 수준이었다.

"당신의 아이돌 시즌2 take off는 케이팝을 향해 도약하는 꿈의 보이 그룹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100명의 연습생이 바로 시청자 여러분께서 만들어 주실 미래의 아이돌 후보입니다."

사방을 울리는 환호성에 적당히 미소 지었다. 카메라가 돌고 있는 걸 알아 관리한 표정이었다. 평정심을 지키며 자세를 유지했다. 타이밍에 맞춰 박수를 쳐 주고는 귀를 기울였다. 오프닝 멘트를 제외하면 VCR로 대체될 전개였다. 그 사이 멘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데뷔할 수 있는 최종 7인의 멤버는 엔필름의 지원으로 약 2년 6개월간 그룹 활동이 지속될 예정입니다."

"헉, 2년 6개월이래. 저번 시즌엔 1년이었잖아."

"뭐야!"

"엔필름에서 2년 넘게 지원한다고??"

좌중이 술렁이며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오디션 서바이벌로는 유례없는 장기 계약이 등장했다. 예전에도 2년을 넘겼었던가. 헷갈리는 내용에 당황스러웠다.

분명 시즌 3와 4 때는 2년씩 걸었었다. 하지만 그보다 긴 건 처음 들은 사실이었다. 뭐, 상부의 말은 자주 바뀌었으니까. 그저 혼동했던 것 같다고 넘겨 버렸다. 뭐가 됐든 나로서는 장기 계약이 유리했다.

소속사로 돌아가면 다시 모이기 힘들 멤버들이었다. 원래 데뷔했던 연습생들은 글로벌 진출까지 성공했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똑똑한 요건을 내민 격이었다.

머리를 잘 굴리는 인간에게서 지시가 내려온 게 분명했다. CP는 아닐 거라고 장담했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정말 일을 못했다.

"이번 시즌에는 기존 온라인 투표를 배제하고도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현장 아이돌 프로듀싱 서비스가 별도로 오픈, 진행됩니다. 시청자분들께서는 여기 연습생들의 스페셜 마스터 멘토가 되어 최종 7인을 데뷔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마스터님들의 소중한 한 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 이제부터 연습생들의 성장을 도와줄 트레이너 멘토단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중앙 스테이지 맞은편, 어둠에 잠겨 있던 멘토석이 환하게 밝혀졌다. 고우림이 나오기 전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곳 중 하나였다.

앉아 있는 대상들에게 포커스가 쏠렸다. 공중으로는 지미집 라인이 돌아다녔다. 제작비를 쏟아부었다고 생각한 연출이었다. 사활을 걸긴 했었나 보다.

"트레이너 멘토단 일곱 분입니다."

대형 스크린 위에 영상이 송출됐다. 대중에겐 인지도가 있는 유명인들이었다. 뒤 시즌도 만만치 않았지만 어째 2는 더했던 그림이었다.

저들 앞에서 춤과 노래로 평가받아야 했다. 그걸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째 환호성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문가의 등단에 심란한 건 나 혼자인 것 같았다.

"헐, 계현 쌤이다. 저분, 심사도 해?"

"나 민나연 님 팬인데! 오는 길에도 노래 들었어."

"인클루분들이야? 와… 선배님들이 멘토라고?"

시선을 돌려 이유준을 체크했다.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쟤가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였다. 힘들어도 무조건 챙겨야 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다행히도 멀끔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이한 성격이 이럴 땐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이쪽은 걱정할 일이 없을 예정이었다. …나만 잘하면 되겠네.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마침 소개가 끝났는지 메인 카메라가 고우림을 잡고 있었다. 그만두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은 부근이었다.

"안무가 서계현 님, 백승준 님, 보컬리스트 민나연 님, 원겸 님, 베이스 님, 래퍼 적시 님, 공태서 님께서 함께해 주셨습니다."

본격적인 소개말에 트레이너 멘토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인사해 오자, 그에 맞춰 연습생들에게서 호응이 터져 나왔다.

분량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팬심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욕먹고 난 뒤에는 저러기 힘들 것 같은데…. 굳이 따지자면 내 처지도 거기서 거기였다. 소심한 사람이라 긴장하고 있었다.

"그럼 등급 평가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지금 바로 도약합니다!"

* * *

평가의 막이 열린 지점이었다. 트레이너 멘토단 앞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그럼 그에 맞는 등급이 주어졌다. 팀끼리 묶여 전개되는 방식이었다.

최상위인 A 등급부터 최하위인 F 등급까지 6개의 반으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판정 자체는 개별이어서 희비가 갈렸다. 사악하기로는 최고인 포맷이었다.

"KM 김형준 연습생 B 등급, 박세림 연습생, 서동민 연습생은 E 등급을 받으셨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B 등급과 E 등급이라면 최악은 아닌 편차였다. 가장 크게 나뉜 팀은 A 등급과 F 등급이었다. 매서운 평론과 오랜 녹화 시간이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안색들이 썩 좋지 못한 게 메이크업을 받은 의미는 없는 것 같았다. 통로를 통해 나가면 호명된 순번이 스탠바이 하는 형식이었다.

우린 개인 B조였으니, A조 이후의 차례였다. 주시하고 있던 무리가 명령에 맞춰 일어났다. 슬슬 준비하자고 생각한 타이밍이었다.

"개인 B조 내려오실게요."

이어 마이크를 단 스태프가 작게 손짓했다. 기왕이면 앞 조의 무대를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소리로 파악했다.

같은 부류로 엮인 이상 비교당할 위험도가 높은 집단이었다. 대처와 피드백을 알아 두는 게 관건이었다.

개인 A조 2인은 연습생 생활을 해 본 유형들이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인트로를 틀었다.

최근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의 업 템포 댄스곡이었다. 빠른 비트에 일렉트로닉 한 사운드가 세트장에 울려 퍼졌다. 퍼포먼스 위주로 승부수를 띄우려는 거였다.

사실 보컬을 보여 줘야 중간 등급은 받을 수 있었다. 겪어 본 시즌의 과정을 떠올리며 미스 선곡이라고 분석했다.

이 곡은 MR보다 AR 특화 곡이었다. 보컬 멘토들의 성향을 따지면 아슬아슬한 지경이었다.

스태프가 건네주는 인이어를 귀에 걸었다. 이렇게 많은 관객 앞에서 보여 주기는 처음이었다. 실전 경험이 제로라는 건 어떻게 보면 큰 약점이었다. 그나마 전 직장이어서 적응된 환경이었다는 게 천운이었다.

"개인 A조 황찬빈 연습생은 E 등급, 권지우 연습생은 D 등급을 받으셨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예상했던 낮은 등급의 연속이었다. 트레이너 멘토단이 분위기를 탄 것 같았다. 한참 전의 B 등급 이후로는 냉정한 비판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좀 불길한데.

한두 단계는 변동 가능한 게 서바이벌의 특성이었다. 안 그래 보여도 두뇌 싸움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뜻이었다.

"중앙 통로로 나가시면 스테이지입니다. 개인 B조 나가실게요."

빛나는 복도를 일직선으로 통과했다. 넓은 시야의 단상이 나타났다. 백여 명의 인파와 카메라가 눈에 띄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느낌의 광경이었다. 숨을 고르며 무해한 성격을 보이려고 분투했다.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고 했다.

"개인 연습생 B조,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개인 연습생 B조 신해신."

"이유준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전에 이유준과 맞춰 둔 인사말이었다. 트레이너 멘토단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 ……냉정하시네. 무감각한 얼굴에 뻘쭘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 개인 연습생 조가 두 개라고 들었는데, 이유준 연습생은 앞 팀처럼 소속사에 계셨던 분이네요?"

"트레픽 출신이야? 먼저 했던 친구들이랑 아는 사이겠어요."

"…네, 4년 있었습니다. 아는 친구들도 올라왔습니다. 문채민 연습생과 우정환 연습생이라고."

"아아, 그 친구들? 실력이 좋던데 기대되네요. 이유준 연습생도 열심히 해 봐요."

"네, 감사합니다!"

누가 봐도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었다. 티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전 소속사 관계자들도 함께 출연했던 것 같다.

결과만 들어 봐도 상당한 실력파로 추정됐다. 카메라 한 대가 방향을 틀어 클로즈업하는 걸 목격했다.

어린 티가 나는 연습생 둘이 바짝 굳어 있었다. 단정한 차림에 학생 같은 깔끔한 인상이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쟤네들인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문득 무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나는 걸 보니 잘하는 연습생들이었다. 덕분에 이유준이 래퍼 멘토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유하게 풀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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