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D 등급은 어때?"
"거기? 엄청 살벌해. 계현 쌤 그렇게 화내는 것 처음 봤어."
"뭘 했길래 그러냐."
"사이가 좀 안 좋은 애들이 있어. 대놓고 싸우는 건 아닌데, 둘이 좀 냉랭해서… 같이 나온 애들 맞나 싶어. 뭐, 우리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 등급 평가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잖아."
"다음에 또 붙으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런가?"
자판기 앞에 도착해서 들은 이야기였다. 훔쳐 들을 계획은 없었는데. 여기저기 불편한 일들이 존재했다.
…눈치라도 없었으면 편했을 걸. 이럴 때는 기싸움 레이더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뒤돌아서 나가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 굳이 피해 주고 싶지 않아 버텼다. 나는 그저 음료수를 뽑으러 온 일개 연습생이었다. 쟤네 때문에 매점까지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소리 죽여 옆으로 다가갔다. 나를 본 둘이 당황하다 도망쳤다. 옷 색을 보면 D 등급과 F 등급의 사람들이었다.
나도 나지만, 쟤네는 좀 심했다. 비웃는 게 어딘가 조롱이 느껴졌다. 저런 애들과는 거리를 두는 게 현명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거 김찬규랑 이정원 얘기 같지. 얘네는 뭐가 문제인 걸까? 전부터 보인 미묘한 기류였다. 한쪽은 날이 서 있었고, 다른 한쪽은 건조했다.
에휴… 이러기는 싫었지만, 선을 그어 놔야 할 것 같았다. 냉정해도 일단은 서바이벌이었다.
자판기 버튼을 눌러 연달아 음료수를 뽑아냈다. 몇 개면 되겠지 싶어 주워 드니, 옆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낯 모르는 연습생 한 명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옷 색상을 확인하니 A 등급인 사람이었다.
희멀건 안색에 시야가 높았다. 척 봐도 나보다 큰 체구를 갖고 있었다. 내 목적은 끝났으니 뒤로 물러나며 자리를 비켜 줬다.
눈짓으로 양보하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럼에도 지긋한 기운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싶어 눈길을 피해 버렸다. 어째 뺨이 탈 것처럼 뜨거워졌다.
부담스러운데 그만 좀 봐 주길 바랐다. 그냥 가 버릴까 고민이 들었다. 길목이 막혀 있지만 않았어도 도망갔을 예정이었다.
"……?"
"……."
불편한 침묵과 함께 오랜 대치가 이어졌다. 도대체 무슨 문제인데, 말이라도 해줄래. 불편한 자리에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때 연습생의 손에 들린 물건이 눈에 띄었다. 파란색의 판판한 사각형 물체, 바로 신용카드였다. 여기 자판기는 구형이라 현금 결제만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저걸로는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초면일 연습생이 알 수 있는 부분은 절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용히 물어봤다.
"…혹시 음료수 마시고 싶어요?"
"…네."
"이 자판기는 옛날 모델이라 동전이랑 지폐밖에 못 써요. 1층에 매점 있는데 거기로 가 보세요."
"…아."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팔자를 그리는 눈썹이었다. 사실 다른 곳에 다녀올 여유는 못 되는 시점이었다. 늦게 안 사실로 낭패를 봤다는 행색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준 내가 나쁜 인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천진난만하게 생긴 인상이 죄책감을 불러들였다. 어쩔 수 없이 자판기 쪽을 돌아보고는 고갯짓 했다. 부득이한 상황이 만들어 낸 지출이었다.
"…그, 뭐 마실 건데요. 저 잔돈 있으니까 뽑아 줄게요."
"…정말요? 그럼, 이거요."
얘를 왜 몰랐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랑말랑하니 참 잘난 유형이었다. 새로 뽑힌 캔을 쥐여 주니 묘하게 펴지는 낌새를 보였다. 화사한 얼굴에 눈이 부셨다. 얼른 떨어지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연습실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름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하던 찰나였다. 긴 팔이 내 허리춤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영문 모를 행동에 나서던 다리가 허공을 휘저었다.
품에 안고 있던 음료수 캔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둔탁한 맞물림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뒤를 돌아봤다. 순간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은 마음이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 왔다. 괜히 사 줬다….
"윤명."
"…네?"
"윤명입니다."
"아, 예……."
"…그쪽도 이름 알려 주세요."
이상한 애들을 피해 나오니 더 이상한 것에 걸려 버렸다. 이런 인기는 필요 없는데. 고집 어린 입매와 굳센 태도가 어린애처럼 보였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놔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포기가 빠른 인간이었다.
"…신해신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큰 덩치를 움츠려 보이는 인사였다. 제 할 일이 끝나 후련하다는 뉘앙스를 보여 왔다. 이내 등을 돌려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뭐야, 쟤… 한참을 거기에 멈춰 서 있었다. 넋이 빠진 얼굴로 굳어 버린 상태였다. 파악이 안 되는 인물과 독특한 접점이 생겼다. 썩 반갑지는 않은 부근이었다.
* * *
어느덧 시침이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하는 버스에 탑승해 숙소로 돌아온 지점이었다.
하루 종일 흘린 땀에 온몸이 찝찝한 것 같았다. 눈만 감으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극한의 피곤함이었다.
"으, 녹초다!"
"내 침대에 눕지 마, 이 자식아."
"싫거든."
"복수다!"
"쟤네는 사이가 좋은 거야, 아님 나쁜 거야?"
"…좋은 게 아닐까?"
벌써 친해진 것인지 베개가 날아다니는 풍경이었다. 멘토들에게 깨지는 모습을 목격했었다. 회복력이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마침 권혜성도 자리를 비웠다. 눈에 띄지 않게 씻으러 가기 좋아 보였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일어나 움직였다.
[미션이 완료되었습니다.]
[미션]
'연습생의 첫걸음'
'당신의 아이돌 시즌 2'에 출연해 전문 트레이닝을 받으세요.
보상: 500 코인 + 스탯 1회 분배권
[현재 코인]
1,710 코인
저번과 같은 장치에 한번 받아 본 적 있는 보상이 다시 주어졌다.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디에 분배할지가 가장 큰 고심이었다.
평가를 대비하자면 보컬과 댄스였다. 하지만 전자는 오전 중에 업데이트한 기록이 존재했다. 과도하게 실력이 상승하면 견제를 사기 마련이었다.
트레이닝 과정에서 겪은 살벌한 촉의 원겸도 걱정됐다. 이건 무조건 자연스러운 성장이 받쳐 줘야 했다.
파트별로 낱낱이 따져 생각했다. 댄스를 올리기에는 아직 연습 첫날이었다. 안무 외우기도 벅차 하던 차에 움직임이 좋아지는 건 수상쩍은 이야기였다.
더불어 나는 중간인 C 등급이었다. 노력했다는 자료를 만들어 둔 후 실행해야 했다. 그게 안전하겠다고 분석 내렸다. 운이나 끼에 사용기에는 입소 직전이 떠올랐다. 당분간 이건 패스해도 괜찮을 수준이었다.
그럼 남은 건 외모 단 하나뿐이었다. 때마침 타이밍이 배경을 만들어 줄 것 같았다. 결정이 완료되자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모르게 마법 같은 샤워 시간을 만들어 볼 작정이었다.
[신해신]
나이: 22
외모: B+
보컬: B-
댄스: B
운: C
끼: B-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보유 스킬]
'한 번 보면 잊지 못해(F)' - On
거울 속 미묘하게 달라진 이목구비에 감탄했다. 어찌 됐든 이건 아이돌을 뽑는 프로그램이었다. 잘생긴 타입은 눈길을 끄는 법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투자였다. 젖은 머리 위로 수건을 얹어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아직까지 장난치는 연습생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형, 언제 화장실 차지했어요!"
"미안. 너네 한참 놀고 있길래 먼저 씻었어."
"…어?"
한 명이 나를 보며 손가락질해 왔다. 어물거리는 동작은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눈치 볼 필요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뭐지? 형 느낌이 좀 다른데?"
"그래?"
"그, 왠지 잘생겨 보인다고 해야 하나?"
"멍청아, 무슨 소리야. 샤워하면 나도 잘생겨 보여!"
"악! 왜 때려! 그리고 그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데!"
같이 있던 연습생이 등을 때려 저지했다. 샤워 후 맑아지는 외견을 이용한 점이었다. 눈썰미 좋은 인간 옆엔 굼뜬 인물이 있었다. 방 분위기상 반드시 통할 정공법이었다.
예상이 적중해 미소 지었다. 여기서 농담 한 번만 날려 주면 완벽한 엔딩이었다. 단순한 성미의 연습생들이 모여 도전할 수 있었다. 내 수준에선 과감한 언사의 멘트였다.
"우리 반하진 말자."
"엑, 형까지 왜 그래요."
질색하는 몰골들을 지켜보다 침대로 돌아갔다. 한 단계 정도의 향상이라 가능했던 수법이었다. 이 작전에서는 젖은 머리카락이 포인트였다.
게다가 여기에 다른 핑곗거리도 준비 중이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라고 했다. 변화를 감추려면 요란을 떨어라 작전이었다.
"혹시 왁스 있는 사람?"
양아치 이미지보다는 눈총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내 얼굴에 적응하기 전까진 스타일링을 하고 다닐 계획이었다.
* * *
"형, 그거 잘 어울려요."
"괜찮아?"
"네! 뭐라고 해야 하지? 이목구비가 엄청 또렷해 보여요!"
"그래? 해 보길 잘했네."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찰나였다. 생김새와 어우러져 괜찮은 느낌을 내는 모양이었다. 훤히 드러난 눈가가 어색해 고맙다고 대꾸했다.
그냥 칭찬이 민망해서 넘겨 버렸다. 권혜성이 없던 사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 빌려 온 왁스였다. 새벽녘, 남들 몰래 화장실에 앉아 연습한 성과이기도 했다.
방송국을 오가며 마주쳤던 아이돌 그룹이 큰 도움으로 다가왔다. 과거 기억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듯한 형태는 나온 헤어 스타일이었다.
솔직히 하루아침에 잘생겨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술이나 성형을 받을 수 있는 공백기가 없었다. 덕분에 미용으로 해결됐다고 넘어가 주는 무드였다.
급하게 떠올린 차선책이었지만 효과가 괜찮아 만족스러웠다. 밥을 한술 뜨기가 무섭게 다시 수다 폭격이 날아들었다.
"손재주 되게 좋으신 것 같아요. 다음에 저도 만져 주시면 안 될까요?"
"대신 나 이거밖에 못 해. 똑같아도 상관없어?"
"…아, 그건 좀 그런데."
권혜성이 난감하다는 듯 눈을 피했다. 외관을 꾸미는 것과는 멀었던 삶이었다. 그래서 다른 머리는 못 만질 확률이 컸다. 진심이 느껴졌는지 권혜성이 입을 다물었다.
다른 걸 떠나 종일 붙어 다니는 무리였다. 동일 스타일링을 하고 있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이럴 때는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 줘 다행이었다. 상상 속 광경에 피식거리며 밥을 먹었다.
"많이 먹어. 넌 지금 그게 제일 잘 어울려."
"앗, 진짜요? 그럼 계속 이러고 다녀야겠어요."
회피하기 위해 꺼낸 칭찬이었다. 그럼에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니까……. 양심에 찔렸지만, 적당히 말을 흐리며 마무리 지었다.
드러나는 스탯일수록 처리가 복잡하다는 걸 깨달은 참이었다. 다음에는 어찌 빠져나갈까 생각해 봤다. 타당한 사유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