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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14화 (14/328)

14화

"결과표가 이거예요?"

옆에 있던 권혜성이 입을 벌렸다. 100명의 이름이 적힌 표가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내 이름을 찾다가 몸을 멈췄다. …어? 짐작했던 것보다 더 좋은 순위를 받아 냈다.

[(B)20위 – 신해신]

"형, 축하드려요!"

밝은 인사말이 들렸다. 본인 건 확인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구간이었다. 민망함에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B 등급에 올라간 소감이 어때요?"

"…해냈다?"

솔직하게 말하면 너무 힘들었다. 잠을 자기는 했다지만 부족한 수면이었다. 지친 상태라고 보는 게 정확했다.

거기에 안 쓰던 신체를 써 근육통까지 있었다. 멀쩡한 척하고 있는 것에 반해 거하게 구른 느낌이었다. 보는 눈이 많아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었다.

나머지 평가 리스트를 훑어 봤다. 얼마 안 가서 권혜성의 이름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서도 붙었네? 재밌는 우연이었다.

[(B)19위 – 권혜성]

"으흠, 좋은걸?"

"혜성아, 축하해. 너도 올라갔네."

"감사합니다. 이거 엄청 기쁘네요."

권혜성은 춤출 때 눈길을 끌 줄 아는 유형이었다. 타고난 감각으로 분위기를 장악할 줄 알았다. 화기애애한 장면이 상상되는 평가였다.

기억 속 모습 덕분인지 19위를 받으며 B 등급에 입성했다. A 등급을 근처에서 놓쳤지만 기뻐했다. 애처럼 굴어서 그렇지, 실력자에 속해 있었다.

"…유준이는 이거 봤나."

"글쎄요. 여기엔 안 보이는데, 먼저 확인하고 들어간 게 아닐까요?"

[(B)18위 – 이유준]

의외는 이유준의 순서에서 발생했다. A 등급에 있던 애가 B 등급으로 하락한 사건이었다. 예상치 못한 18위에 의아함을 품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이유준이 래퍼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보컬 능력이 높지 않은 특수한 환경이었다. 힘들 만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현명한 인물이었으니 낙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 자리에서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예상대로 상위권은 기존 A 등급들이 차지했다. 개중에는 낯익은 이름도 많이 섞여 있었다. 평가에서 거론된 적 있던 문채민이 대표적이었다.

[(A)5위 – 문채민]

얘도 래퍼라고 들었는데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유형이었나 보다. 존재감이 있었는지 꿋꿋하게 제 등급을 지켜 냈다. 내가 모르던 데뷔조 멤버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다른 한 명은 윤명이었다. 이 연습생, 그 자판기 남이지? 영상을 촬영하던 당시가 떠올랐다.

막바지에 하늘색 티셔츠 무리에서 흰 얼굴이 솟아올랐다. 처진 눈에 아이 같은 인상이 흔히들 말하는 입덕 멤버상이었다.

장신의 키가 위압감을 뿜어냈다. 전반적인 스탯도 훌륭하고 캐릭터도 좋은 인물이었다. 인기 요건은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쳤다.

주변에선 이미 유명 인사인 모양이었다. 모두가 그 애를 잘 아는 것 같았다. 무대를 보고 싶었다며 아쉽다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그대로 방으로 이동해 버렸다. 포커스가 집중되었음에도 태연한 자태였다. 저렇게 대담해야 A 등급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로 시간을 죽였다. 여러모로 시선을 끄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유달리 운 스탯이 높은 게, 연습생 전원을 통틀어 가장 상위 랭크라고 할 수 있었다.

방 밖으로 나선 실루엣을 보며 생각했다. 랜덤 미션에선 윤명을 쫓아가면 편할 느낌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윤명을 지켜봤다. 컨셉인가, 아니면 원래 저런 앤가? 천진한 외모가 나사 빠진 것 같은 성격을 매력으로 치환해 줬다.

고우림의 안색이 풀려 있는 게, 감화 능력이 예사롭지 않은 인간이었다. 사랑받는 부류인 건 알겠는데 말이야. 진짜 희한했다.

[(A)6위 – 윤명]

"참 묘하네."

"네? 뭐가요?"

"아니야. 우리 순위 발표되면 다음 일정으로 진행된다고 했지?"

"네, 아마 곧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럼 일단 방으로 돌아가 있자."

"넵!"

* * *

프로필 촬영 전 휴식이 주어진다고 얘기했다. 등급 변화로 인해 안색이 좋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다행히도 우리 방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다. 큰 산을 넘기 위해 많은 체력을 소진했다.

쪽잠이라도 자고 싶었는데,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포기했다. 이대로 잠들면 붓겠지……? 도무지 쉴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가물거리는 눈가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아는 지인들과 잡담 비슷한 수다를 떨었다. 인근 자판기에서 뽑아 온 커피도 함께 있었다.

퇴사하면 그만 마셔도 될 줄 알았는데… 카페인을 수혈하며 생각했다. 내 인생과는 절대 멀어질 수 없는 피로 회복제였다. 위염도 갖고 가겠다며 헛웃음 지었다. 어쩐지 속이 쓰린 것 같았다.

얼마나 쉬었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스튜디오에 입실해 있었다. 근심하기가 무섭게 소품 박스 사이로 권혜성이 나타났다.

"형, 뭐 쓸 거예요?"

교복 재킷 안에 후드 티를 받쳐 입고 보드를 탄 형상이었다. 장애물을 피해 요리조리 잘도 달려온다. 부슬거리는 곱슬머리가 움직임에 따라 나풀거렸다.

이내 발을 멈춰 점프하며 보드 위에서 착지했다. 자기 객관화만큼은 잘되어 있었는지 쾌활한 본인에게 어울리는 걸 찾아냈다.

"아직 모르겠어. 너는 그거 용케도 찾아냈다?"

"제일 처음 열어 본 박스 안에 있었는데요……? 타고 싶어서 꺼내 봤어요."

"…아, 그래?"

취소하겠다. 생각 없이 속 편한 성격일 뿐이었다. 멀리서 권혜성의 보드를 탐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얘도 그럴듯한 걸 건져 냈는데, 자괴감이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혜성아……."

"네?"

"그거, 잘 챙겨."

"네?"

나는 물러 터진 인간이었다. 통하지 않을 조언이었지만, 던져는 줘야 할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기려 하니 이번에는 이유준이 다가왔다. 이럴 거면 한 번에 와 주기를 바랐다.

"형, 준비 다 했어요?"

반듯하게 챙겨 입은 교복에 얇은 테의 안경이 특징이었다.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는데, 당사자와 무척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아니, 이제 해 보려고. 넌 잘 건졌네."

"그렇죠, 예전부터 안경 어울린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요."

"근데 좀 특이하다. 바른 느낌이긴 한데……."

속내가 시커먼 것처럼 보였다. 왼쪽 입가의 점 때문인가. 원래 겉으로 강한 애들보다 저런 스타일이 더 지독한 법이었다.

말끝을 흐리자 무슨 뜻인지 안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외견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 혀를 내둘렀다.

"…사족은 안 붙일게."

"마저 말씀해 주셔도 되는데."

"됐어……."

"유준이 형 멋지다. 대박 공부 잘하는 포스."

"혜성이 너 지금 고등학생이지. 성적은 괜찮니?"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이유준은 권혜성을 다룰 줄 아는 타입이었다. 저 둘이 같은 등급에 있어야 했는데, 애꿎은 나만 가운데 껴 고생이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쓸 만한 게 빠지기 전에 서둘러 찾아내야 했다. 침묵을 유지하며 이동하니 둘이 따라붙는다.

"생각해 둔 건 있어요?"

"아니, 전혀."

그런 게 있었다면 진즉 찾고 털어 냈을 것이다. 사진 찍는 일 자체도 걱정이지만 소품을 써야 한다는 게 가장 암담했다.

힘이 빠진 손으로 박스를 뒤적거렸다. 별의별 물체가 다 쏟아져 나왔다. 방송국 소품실에 있던 걸 모두 끌어온 것 같은 그림이었다. 이건 또 뭐지……. 들어 보는 것마다 난감한 물건 투성이었다.

때마침 여유 있던 애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줬다. 나를 유심히 쳐다본 후 이것저것 꺼내 댔다. 뭐가 잘 어울리는지 판가름하는 뉘앙스였다.

"음, 이건 아닌데."

"총은 어때요. 빵야!"

"…힘들 것 같은데."

저건 포즈를 취할 자신이 없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증명사진이 전부인 인생이었다. 퀄리티를 위해서라도 거리감이 적은 아이템을 찾아야 했다. 서둘러 몸을 돌려 다른 박스를 쳐다봤다.

"…이건 뭐지?"

단말마의 외침에 이유준을 돌아봤다. 이유준이 들어 올린 제품에 아이디어가 떠오른 지점이었다. 잘하면 적당한 장면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이바지를 한 정황이었다.

* * *

"신해신 연습생, 촬영 들어갈게요."

"부탁 좀 할게."

"네~"

응원을 받으며 배경지 위로 올라갔다. 뜨거운 조명과 함께 관심이 치우쳤다. 현란하게 준비했던 연습생들에 반해 밋밋한 모습이었다. 의아함을 느낀 사진작가가 한껏 소리치며 질문했다.

"혹시 원하는 거 있어요?"

"클로즈업으로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반신으로? 알겠어요."

렌즈를 조여 오는 손길에 주머니에 넣어 둔 물품을 꺼내 들었다. 이건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장난감 플라스틱 버블 건이었다.

타인에 의해 헤집어지다 깊은 곳까지 들어갔는지 이유준이 발굴해 낸 물건 중 하나였다. 응용법만 따지자면 좋은 소재였는데 진짜 운이 좋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저게 뭐야?"

"총 아니야?"

나는 초보자였다. 자세부터 진지해야 하는 아이템은 무리였다. 자연스러운 선이 제격이라며 캐주얼 한 걸 원했다.

괜찮은 그림 정도만 연출할 심산이었다.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누가 봐도 어린이용이었다. 총구 안, 사전에 채워 놓은 비눗물이 찰랑거렸다.

그와 동시에 이유준과 권혜성이 의자를 끌고 다가왔다. 앵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나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다.

"저 둘은 뭐 하는 거야?"

"…글쎄?"

"파티 용품 쓰고 싶어서 둘에게 부탁했습니다."

"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원하는 대로 찍어 줄게요."

고개를 끄덕인 사진 작가의 모습에 안심했다. 정해진 표상을 잘 파악해 준 느낌이었다. 그럼 이야기가 쉽지. 그립을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겨눠 들었다. 스탠바이가 완료됐다는 내용의 신호였다.

"갑니다!"

외침과 동시에 방아쇠의 손가락을 당겨 눌렀다. 총구 끝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터져 나왔다. 비눗방울을 체크하며 사방을 둘러봤다.

알록달록한 종이 조각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아까 건져 낸 소품은 버블 건뿐만이 아니었다. 파티용 컨페티, 즉 종이꽃 가루도 함께 발견됐다. 두 개 쓰기에는 손이 부족할 것 같은데. 잠시 옆의 둘을 보며 고민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어 제의해 봤다. 시간 좀 비어? 나 좀 도와줄래? 남들에게 협조받지 말라는 규칙은 없었다. 이건 반칙이 아니었다.

"좋아요. 몇 컷 더 갑니다!"

나는 아이돌이다…. 자기 암시를 걸어 봤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동작을 취했다. 그럴듯한 제스처를 행하는 게 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정신력이 필요했다.

"마지막 한 컷."

열성 어린 외침에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봤다. 그대로 작게 웃어 보이며 마지막 컷을 끝내 버렸다. 내 기준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천재 아이돌 같은 모멘트 잘 봤어요."

수건으로 비눗물을 닦다 맞은 폭격이었다. 이유준의 놀림에 가만히 굳어 버렸다. 아무 말 못 한 채로 어깨를 떨었다.

아까 전 자신의 행태들이 스쳐 지나가는 과정이었다. …진짜 성격 특이하다. 앞으로 쟤한테 부탁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칭찬이었는데."

나는 다른 애들처럼 재능이 있지 않았다. 인상도 곱지 않으니 풍경 정도만 만들고 싶었다. 소품 속에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더 고심하며 고른 아이템이었다.

"멋있는 걸 들었어도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난 색다른 느낌이어서 이게 더 좋았는데."

이유준의 얘기에 귀 기울였다. 정확하게 내 의도를 꿰고 있는 인물다웠다. 몽환적인 이미지는 이유 불문으로 눈길을 끌기 쉬웠다.

괜찮은 성과가 나올 거라고 추측했다. 이번 절차도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 있었다. 어째 잔머리만 늘어 가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흑역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떨어졌을 때도 대비해둬야 했다. 탈락하면 다시 직장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영원히 고통받는 짤은 절대 안 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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