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럼 너네 그 형이란 연습생들은 어떻게 된 거야?"
"무대 끝나고 뭐 씹은 표정들이긴 했는데 뭐라고 못 하죠. 애매하게 정도를 조절했거든요. 다 마친 상태에서 눈에 띄어 버린 걸 어떻게 욕하겠어요. 게다가 저도 그렇게 상위 등급을 받은 게 아니잖아요. 마이크도 차고 있고 카메라도 한두 대 도는 게 아닌데. 아무 말 안 들었죠~"
"그 사람들 D 등급 이하지? 내가 A 등급에 있었을 때 인레코드 애들 못 본 것 같아서."
"맞아요. D 등급이랑 F 등급 받았어요! F 등급 받은 형 창피해 하는 것 같았는데 본인이 못한 거지,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소속사에선 별말 안 들었고?"
"어디 가서 소문 낼 일 있어요? 데뷔 론칭 준비 중인 연습생 내민 것도 들키면 큰일인데, 별말 못 하죠. 했더라도 그냥 듣고 넘기면 돼요. 저 연습하는 곳엔 자주 오지 않아서 상관없어요."
"…너 진짜 간도 크다."
"전 아직 어린 걸요.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저지른 일이기도 해요. 하지만 잘한 선택이었어요. 덕분에 형들이랑 만났잖아요. 과거의 나, 잘했다, 잘했어!"
미묘한 침묵이 감도는 현장이었다. 얘는 눈치 없는 게 아니라 없는 척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나한테도 사기 친 거라고 단언한 순간이었다.
이런 얘기를 해 주는 걸로 봐선 같은 편이라고 인지한 모양이었다. 내 한 몸도 버거워 죽겠는데, 존재감이 강한 게 들러붙었다.
"고생하겠네."
소속사로 돌아가게 되면 난처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 형들이란 애들도 좋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겠다고 확신했다.
쟤도 대적하는 사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외관상 붙어 다니는 나도 감시 대상일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틈에 적을 만든 게 됐다. 혼자 다닐걸. 차라리 아웃사이더가 낫겠다고 생각했다. 도움받으려다가 권혜성의 짐을 나눠 들게 생겼다.
"형, 저는요?"
"…이제 그만하자."
"그래도 저만 떨어졌는데, 제가 제일 응원받아야 하는 것 아니에요?"
"유준이 형 파이팅! 이제 등급 평가는 없잖아요! 괜찮아요!"
"…그래, 고맙다, 혜성아."
권혜성이 자연스럽게 이유준을 물 먹였다. 저것도 노리고 한 걸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전부 듣고 보니 보이지 않던 관계들이 추측됐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은 곪아 있는 인간이 널려 있었다. 하필 팀별 미션도 못 들어간 초반부였다. 여기서 이런 걸 알게 됐다.
머리가 아파 와 창밖을 내다봤다. 계획한 것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평화를 누리기로 결정했다. 될 대로 돼라 하는 회피였다. 저당금이 멀게만 느껴졌다. 돌려 받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 * *
예전에 빌렸던 연습실에 재방문했다. 여분의 코인을 벌어 두기 위함이었다. 최소 3,000은 만들어 놔야 안전하겠다고 계산했다.
돈으로 굴러가는 시스템은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다. 상태 창 위로 떠오른 재산을 체크했다. 저게 다 현금이었으면 좋았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착실하게 동태를 살피고 몸을 풀었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일까 잡아 놓은 목표는 금방 채울 수 있었다.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스페셜 스킬 트리가 눈에 띄었다.
잠깐의 고민을 끝으로 저번 경험을 살려 보자고 마음먹었다. 예측 불가능한 난관이 많은 프로그램이었다. 뭐든 뽑아 놓는 게 현명한 결정이라고 판단했다.
[스페셜 스킬 트리에 500 코인을 지불합니다.]
[현재 코인]
2,610 코인
[스페셜 스킬 트리 룰렛 오픈!]
[스페셜 스킬 '부릉부릉 운전기사(E)'를 획득하셨습니다.]
[스페셜 스킬]
'부릉부릉 운전기사(E)'
오늘의 조별 과제는 내가 조장! 빛나는 나의 리더십!
*스킬 버프: 모두를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이 생깁니다.
(처음 1회 한정 시스템 게이지 도입 *확인 시 부속품 필요*)
저번부터 느낀 점이었다. 네이밍 센스에 문제가 있는 시스템이었다. 일명 버스를 태워 준다고 할 때의 운전기사를 말하는 거였다.
태워 주는 것보다는 타고 싶은 입장이라 난처했다. 그래도 제법 괜찮은 효과를 갖고 있다며 안도했다. 분란의 중심에서 피해 있다가, 필요할 때만 치고 빠지자고 다짐했다. 이런 건 모두 다 써먹기 나름이었다.
…그런데 시스템 게이지는 뭐지? 1회 한정? 부속품은 또 뭐려나. 설명이 너무 부족했다. 이건 찾아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넘겨 두기로 했다. 언젠가는 사용할 수 있을 노릇이었다.
그렇게 2차 촬영 날이 다가왔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에 심란해지는 감정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캐리어를 이끌었다. 합류한 시점부터는 정신을 차려야 하는 시각이었다.
[신해신]
나이: 22
외모: B+
보컬: B
댄스: B
운: C
끼: B-
정보: 플레이어
이벤트: '당신의 아이돌, 그 시작' 진행 중
[보유 스킬]
'한 번 보면 잊지 못해(F)' – On
'부릉부릉 운전기사(E)' - Off
[현재 코인]
2,610 코인
상태 창을 옆으로 치우며 연습생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스태프들의 고함이 여기저기 빗발치는 현장이었다.
정해진 순서가 다가옴에 따라 일정이 급박하게 몰아쳤다. 이게 뭔가 싶다가도 남들이 하는 건 모조리 챙겨야 했다.
"연습생분들은 접수 센터에 가셔서 본인 확인을 받으신 후, 트레이닝복을 지급받아 주세요!"
그 컬러풀한 옷과는 안녕인 모양이었다. 그건 여러모로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휩쓸리듯 가 접수 센터 앞에 도착했다.
저번과 같이 이름을 대니 스티커가 붙은 캐리어를 수거해 갔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과거에 속이 쓰렸다. 사실 저건 나도 전부 해 본 적 있는 일들이었다.
저녁 무렵에는 파스 투성이가 되어 통증을 호소했다. 잡일 담당이란 손이 부족한 모든 팀에 불려 다니는 파트였다.
회상과 동시에 비닐에 싸인 옷 한 벌을 건네받았다. 이게 이번 시즌의 공식 연습복이었다. 남색 반팔 티와 회색 트레이닝 세트로 구성 자체는 단출했다.
바지의 측면에는 흰 줄 2개가 늘어져 있었는데, 흔하게 볼 수 있는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상의에는 별도의 특색을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왼쪽 가슴팍에 프로그램의 메인 로고가 박혀 있었다. 탈의실에 들어가 의상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촬영장에 입실했다.
전개상 곧바로 1차 배틀을 진행하려는 듯했다. 옷을 받은 것부터 대강의 흐름이 예상됐다.
강당에는 빼곡하게 만석의 인원이 들어차 있었다. 어디쯤 앉아야 할까, 가늠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나를 찾는 부름이 들려왔다.
"형~ 여기요! 여기!"
"아……."
얼마 전에 만난 적 있던 권혜성이었다. 그 옆을 보니 역시 이유준도 함께 있었다. 창피하니까 크게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흘낏거리는 시선을 받으며 서둘러 둘에게 다가갔다.
"일찍 와 있었네."
"네! 사람 많을 것 같아서 빨리 왔어요!"
"연락할 길이 없었는데 다행이에요. 어떻게 무사히 만났네요."
"그러게 말이야."
그래 봤자 곧 팀이 갈릴 예정이었다. 소용없는 만남이었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나을 거라며 위안 삼았다. 자주 봐서 그런지 딱히 어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의상을 보아하니 팀 미션 같지."
"네. 시즌 1이랑 동일 포맷이면 그러겠죠?"
"같은 팀 되면 좋겠네요!"
사람을 너무 따랐다. 어디 가서 사기당하는 거 아니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져 줄 타입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지나치게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될까."
"그래도 가능성이란 게 있잖아요!"
"…일단 상황 보고."
"형은 너무 냉정해요~."
"…너네 이게 서바이벌이란 건 잊지 않았지?"
의미 불명의 고집을 듣고 있었다. 곧 촬영에 임박한 부근이었다. 슬레이트가 겹쳐지며 녹화가 시작됐다.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멀끔한 차림새의 고우림이 문을 가르며 등장했다. 환호와 박수 세례 속에서 보이는 그린 듯한 미모가 근사했다.
같은 앵글에 담기는 건 피해야겠다는 둥 실없는 결심을 했다. 대표부터가 너무한 프로그램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의 대표 고우림입니다. 마스터 여러분들께 인사드리겠습니다."
"다시 만난 연습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좋은 휴식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형, 대표님 진짜 잘생기셨죠!"
"제발 얌전히 있자."
가만히 있지 못하는 권혜성을 끌어내렸다. 재밌다는 듯이 방관하는 이유준의 모습에 진정시키는 건 전부 내 몫이었다. 그냥 따로 앉을걸. 밀려오는 후회를 뒤로했다. 들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부터 새로운 평가를 위해 2차 합숙에 돌입합니다. 연습생분들은 탈락자가 발생하는 단계에 진입하셨습니다."
"첫 번째 순위 결정식에서 탈락하는 인원은 바로 40명입니다."
짐작한 것보다 많은 인원수에 전원이 놀랐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반응들이 갈리는 추세였다. D 등급 이하는 조바심이 느껴질 환경이었다. 패널 결과물만 따지면 일단 나는 안정권이었다.
"평가를 위한 첫 번째 무대는, 바로 그룹 배틀입니다."
연습생들의 낯빛이 흐려졌다. 배틀이라는 단어가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좀 더 순화된 워딩을 써 줄 수 있었으면서. 속으로는 혀를 차며 앞을 내다봤다.
이건 혼자 잘하는 걸로 역부족이었다. 팀원을 잘 만나는 게 필수인 항목이었다. 전체적인 퀄리티와 관계성 등 다양한 조건으로 승패가 정해질 수 있었다.
"미션곡 선정법은 이따 공개되므로, 그룹에 대한 설명부터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추첨을 통해 8인의 리더를 모집합니다. 각 리더 중 6인은 12인, 2인은 14인을 선발해 그룹을 꾸립니다."
"선택되지 않으셨다고요?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실력과 운, 친분을 막론하고 호명되어야 그룹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와……."
"큰일이다!"
뽑히지 않으면 떨거지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주 작정을 했던 시즌이었다.
스태프 측에 있을 때는 몰랐다. 직접 겪어 보니 잔인하기로는 으뜸이었다. 자존심도 짓밟고 기운까지 빠지는 룰이었다.
"그렇게 선발된 그룹은 다시 한번 두 개의 팀으로 나뉘어 이번에는 적이 됩니다."
"실력자와 같은 그룹이 됐더라도, 잠시 후에는 상대방으로 만날 가능성이 있겠죠?"
"같은 팀 될 확률이 별로 없겠는데?"
"…이럴 수가."
권혜성이 낙담했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실력자 내지 친분 있는 자를 뽑는 게 끝이 아니었다. 재수 없으면 적으로 만날 수도 있었다.
여기서는 머리 쓰는 걸 완벽하게 차단당했다. 백 퍼센트 운에 의해 흘러 버렸다.
"그럼 각 팀의 리더를 선발해 보겠습니다. 캡슐 머신 나와 주세요."
제작진의 도움하에 기계 한 대가 나타났다. 어릴 때 자주 본 적 있는 뽑기 기계였다.
색색의 캡슐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안에 얼핏 종이가 돌아다니는 걸 확인했다. 고우림이 레버를 돌려 선택지를 뽑아 들었다. 추측대로 연습생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명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