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8인의 리더를 호명하겠습니다. 이름이 불린 연습생들은 앞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지경호 연습생, 문채민 연습생, 남시준 연습생, 안윤규 연습생, 장대언 연습생, 황찬빈 연습생, 김상혁 연습생, 김경빈 연습생."
연습생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떨떠름해 보이는 자도 있고, 신난다는 듯 뛰쳐나간 사람도 보였다. 개중에 익숙한 얼굴이 섞여 있었다. 이유준의 전 소속사 동료이자 A 등급인 인물, 문채민이었다.
"너는 저쪽에 가지 않을까."
"…글쎄요. 그리고 같은 그룹 된다고 끝이 아니잖아요."
"하긴, 적으로 갈리면 의미가 없긴 하겠지."
8인의 리더가 고우림의 옆으로 자리했다. 딱히 안면이 있는 관계도 없고, 그저 선발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리더는 11인을,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리더는 13인을 뽑으시면 됩니다. 자, 그럼 지경호 연습생부터 한 명씩 호명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저는 강태오 연습생을 뽑겠습니다!"
"오~!"
"지경호, 처음부터 세다!"
첫 타자부터 1위를 뽑았다. 아주 용기가 가상하다 못해 담력이 좋았다. 규칙을 듣고도 강태오를 지명했다. 저건 도박이라고 봐야 했다.
팀전이니 인지도를 끌어올 속셈으로 데려간 게 분명했다. 장점은 있었지만, 단점도 확실했다.
호명된 강태오가 몸을 움직여 리더 뒤에 위치했다. 벌써부터 존재감으로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아 버렸다.
…비교되겠지. 그것도 엄청. 얼굴만 잘난 게 아니었다. 쟤는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표를 끌어오는 걸 떠나 리스크가 컸다. 해당 그룹을 기피 대상 1위로 확정 지었다.
가만히 다음 순서의 문채민을 바라봤다. 줄곧 A 등급에 있었으니 소속사 동료부터 뽑을 것이다. 높지는 않았지만 낮지도 않은 중상위권 무리였다. 최적의 사양을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다음으로 문채민 연습생, 팀원을 호명해 주세요."
"저는 우정환 연습생을 뽑겠습니다."
과연 정답이었다. 일면식이 있다는 듯 손뼉을 치는 것에서 트레픽 연습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문채민은 브레인 계열의 유형인 것 같았다.
소속사 지인이라는 점을 떠나 데뷔권 안에 든 위험 순위는 택하지 않고 있었다. 이건 상대편으로 갈릴 걸 대비한 거였다. 수단과 방법을 찾는 게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준 연습생을 택하겠습니다."
"유준아, 너 불렸다."
"아……. 이따 봬요. 혜성아, 나중에 보자."
"유준이 형. 파이팅~"
잠시 고민에 빠진 찰나였다. 옆에 있던 이유준이 불려 나갔다. 작게 웃으며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순위에 비하면 상당히 앞의 순서였다. 하긴 최종 평가 전에는 A등급에 있던 실력자였다. 보컬로 인해 주춤한 정도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강자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다. 합당한 선택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유준이 형인가. 잘하잖아요."
"그렇지. 근데 내가 보기엔 너도 곧 호명될 것 같은데."
"그런가요?"
본인의 턱을 쓰다듬는 권혜성이었다. 말로는 저래도 결국은 동일한 선상의 연습생이었다. 활발한 캐릭터에, 성격도 좋은 편이니 리더들에게는 탐나는 인재일 것이다. 그렇게 마저 팀이 꾸려지는 걸 지켜봤다.
"권혜성 연습생!"
"어?"
"봐, 내 말 맞지?"
한 바퀴를 채 돌기도 전에 유쾌한 외침이 들려왔다. 권혜성은 제 이름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손을 뻗어 등을 두들기며 앞으로 떠밀었다.
"형, 저도 갈게요~ 금방 봬요!"
"그래."
엄지를 세워 주는 행동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안 그래도 곧 내 차례인 느낌이었다. 나와는 순위가 붙어 있던 이인방이었다.
쟤네가 불렸다는 건 내 순서가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일단 나는 입소 후 트러블을 만든 전적이 없었다. 무탈한 성격도 드러냈으니, 등급만으로 뽑힐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신해신 연습생을 뽑겠습니다."
누군가가 날 필요로 하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쟤가 나를 불렀네? 신기한 마음에 몸을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문채민이 꾸벅 고개를 숙여 왔다. 여기 저기서 자주 접한 인물이었다. 뒤에 줄을 서곤 대강의 흐름을 정리했다.
포지션도 겹치지 않는데 높지만, 위험군에 속하는 순위는 아니었다. 타당한 사유가 깔린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얘는 생긴 것만큼 차분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진행했다. 높은 순위는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우리 팀은 적으로 만났을 때를 대비했는지 중간 밸런스까지 맞춰져 있었다. 문채민의 센스는 기대 이상이었다.
어떻게 갈릴지는 모르겠으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박빙의 대결을 만들 수 있었다.
사실 여기에는 문채민을 제외하고도 A 등급이 한 명 더 존재했다. 트레픽 연습생 다음으로 뽑힌 윤명이었다.
어째 쟤랑은 저번부터 엮이는 기분이었다. 쳐다보기가 무섭게 눈이 마주쳤다. 카메라 앞이니 피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렸다.
"이제 연습생은 20명만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것만으로 자존심이 박살 났을 것이다. 그걸 굳이 강조까지 해 버렸다. 이 장면은 적나라하게 방송을 탈 것 같았다.
전 직장 동료들이지만, 이런 걸로는 머리 회전이 비상했다. 방금 합류한 연습생이 크게 안도하는 얼굴을 보였다. 지명이 될 때마다 빈 좌석이 늘어 갔다. 체념한 인간도 보이고, 곧 울 것 같은 표정도 섞여 있었다.
김찬규, 쟤도 아직 뽑히지 못했다. 실력 자체는 평타를 치는 사람이었다. 최종 평가에서 B 등급 경계선에 들어갔을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 밀려 C 등급에 안착했다. 중간 이상은 되는 게 팩트였다. 그런데 왜 아직 남아 있던 걸까. 이유는 전부 알고 있었다.
같은 소속사 동료와 척진 연습생이라고 소문이 났다. 1차 배틀은 팀전이었다. 팀워크가 나쁜 사람은 뽑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정원도 아슬아슬하게 불려 나갔다. 간신히 마지막 턴을 피한 느낌이었다. 저기는 타고난 보컬 실력 때문에 불린 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의 포기한 걸로 보였다. 계속 끌고 가긴 힘든 일이었다.
리더들의 고민 속에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그래도 위치라는 게 사라지진 않았다.
슬슬 누군가는 김찬규를 데려가려 들 거였다. 어쩌면 한 명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저 애를 잘 알지 못했다.
무리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유추가 되지 않았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다.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여기서 스톱, 이제 마지막 호명만이 남아 있는데요. 8인의 연습생분들은 모두 저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중단에 불길함을 느꼈다. 이번엔 뭘 하려고. 이상한 짓을 많이 했다. 덕분에 신뢰가 바닥이었다.
"지금부터는 전세 역전입니다. 최후의 연습생에게 팀 선택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단순히 팀만 선택할 수 있냐고요? 아니요, 여러분께는 아주 큰 혜택을 함께 드릴 예정입니다."
"이번 무대는 K-POP 선배 그룹 중 한 그룹을 택해 다른 곡으로 대결하는 미션입니다. 제 앞에 계신 8인의 연습생분들께는 이 미션곡 그룹의 선택권이 주어지겠습니다."
"…뭐?"
"와… 와… 진짜 대박."
"큰일 났다! 이거 누가 어떤 선배님 곡 들고 올지 모른다는 소리잖아!"
제대로 물먹었다. 전세 역전 차원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전혀 다른 결과물을 받아볼 수 있었다.
잔류 연습생들에게서 희망이 엿보였다. 반면 이쪽은 죽을 맛이었다. 특히나 리더들이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연습생은 어떻게 하면 잘 섞일 수 있었다. 문제는 곡에 대한 선택지였다.
"그럼 미션곡의 그룹들을 공개합니다."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던 커튼이 내려갔다. 벽에는 그룹 이름이 나열된 팻말 8개가 붙어 있었다.
대부분이 히트곡을 갖고 있는 2, 3세대의 유명 아이돌이었다. 저기 숨겨 놨었구나. 부자연스럽던 세트장이 이해됐다.
"…선배님들은 발라드가 압도적이지 않았나?"
"…저쪽 선배님들은 앨범 전 곡이 힙합인 걸로 알고 있는데……?"
같은 팀의 연습생이 말을 더듬었다. 인기 아이돌이란 점도 막막했는데, 거기에 장르와 성별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문채민은 혼란스러운 안색이었다. 계획했던 바가 무너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럼, 한 분씩 그룹을 택해 주세요."
"저는……."
혼돈과 경악 속에서 연습생들의 그룹 선발이 완료됐다. 남은 건 고난과 함께 찾아올 선정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내가 노리던 그룹은 세 번째 순서에서 사라졌다. 해당 패널을 뽑은 인물이 우리 팀으로 와 주기를 기원했다. 솔직히 뜻대로 이루어질지는 자신 없었다.
"어떤 선배님들 곡을 하고 싶으세요?"
"…저요?"
"네."
문채민이 나직하게 질문해 왔다. 적극적인 물음에 의아해하다가 고심해 둔 답변을 말해 줬다.
"제이오원에이 선배님이요."
"…저랑 같은 의견이네요."
"어? 저도인데."
"우정환, 너도 비슷한 생각 중이야?"
"응."
모두 비슷한 추론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이오원에이(JO-1A). 댄스, R&B, 팝 계열을 주로 다루는 그룹이었다. 청량하고 밝은 노래를 많이 내 편곡 방향이 순탄할 것 같았다.
게다가 명단 속 선택지들 중에서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추구하는 아이돌이었다. 그룹 내 미션곡은 히트곡이 클리셰였다. 포괄적으로 따져 봤을 때는 저쪽이 최선이었다. 어려운 걸 떠나 강한 분위기는 거북했다.
"저는 문채민 리더가 있는 조를 택하겠습니다."
때마침 우리 그룹의 리더가 불렸다. 부디 제이오원에이를 가져간 연습생이길 기도했다.
…어라? 쟤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연습생은 김찬규였다.
쟤가 무슨 노래를 골랐더라. 기억을 더듬어 되짚어 봤다. 예상치 못한 연습생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뭐, 그래도 사람인데 어떻게 되겠지…….
다가오는 발걸음 고개를 들어 김찬규를 쳐다봤다. 뭐든 상관없다는 듯한 미미한 표정이었다.
그리 적극적인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적당히 대처하기로 했다. 잘 웃으면 못된 인상은 아니겠다고 믿었다.
"안녕하세요, 신해신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성격의 연습생이었다. 그래서 나직한 말투로 대화를 걸었다. 같은 그룹인 이상, 팀이 될 수도 있었다. 이건 성의를 보여주는 거였다. 친절을 베풀면 풀리는 게 인간이었다.
"…네?"
어떤 타입이든 잘해 주고 보는 거였다. 포용으로 끌고 가는 게 최선이었다. 부딪힐 일은 만들지 말아야지. 여기도 어느 정도는 사회생활이 필요했다.
먼저 말을 거니 당황한 뉘앙스였다. 눈썹이 흔들리는 게 대놓고 동요했다. 얘가 이렇게 나오니 뭔가 신선했다. 소문이 과장된 거라고 판단했다.
"네… 안녕하세요. 김찬규입니다."
떨떠름한 태도를 가리지 못했다. 무심하긴 했지만, 대답은 해줬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상황이었다.
지켜보던 문채민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안 그러는 척, 조용히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