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0화 (20/328)

20화

"안녕하세요, 문채민입니다. 그룹 팻말 좀 볼 수 있을까요?"

잠시 잊고 있던 규칙이 떠올랐다. 실력은 있었으니 괜찮은 걸 뽑아 왔으리라 믿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뽑은 팻말은 얼티밋 나인 선배님입니다."

과연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얼티밋 나인(Ultimate'9), K-POP에서 손에 꼽히는 컨셉 장인 아이돌이었다.

흔히 시도하지 않을 법한 파격적인 가사로 강렬한 노래가 많은 그룹이었다. 노래도 안무도 하드 한 걸 주력으로 하는 유형이었다. 난이도가 만만치 않을 거란 가설이 깔렸다.

"얼티밋 나인 선배님, 멋있으시죠."

"네, 그렇죠…."

제발 성의 좀 보여줘……. 문채민이 순화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경쟁이고 서바이벌이니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건 너무 힘든 선택이었다.

어째 가져온 당사자도 즐겁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대충 앞의 그림이 예상됐다. 여기서도 순서가 밀렸나 보네. 아무래도 남아 있는 걸 챙겨오게 된 모양이었다.

"선배님들 곡이잖아요? 저희 열심히 해봐요."

"맞아요! 모두 명곡이에요!"

긍정적인 멘트를 유도했다. 카메라가 돌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됐다. 눈치를 주니 팀원들이 의견을 붙여 왔다. 바로 의견을 붙이는 건 트레픽 연습생이었다. 쟤네 말고 믿을 인간이 없는 것 같았다. 얘들아, 정신 차려.

아무래도 미션곡 목록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조금 골치가 아팠다.

"이제, 각 그룹과 선배 아이돌 그룹이 모두 정해졌습니다. 지금부터는 팀원을 선발하겠습니다."

"와~ 이번에는 또 어떻게 나누려나."

"무섭다, 무서워."

"팀원 선발 방식은 간단합니다. 나와 주세요."

고우림의 손짓에 스태프가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그 위에는 8개의 원형 케이스가 세워져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었다.

그때 머릿속에 아는 낯짝 몇이 스쳐 지나갔다. 메인 사단 안에는 장난치길 좋아하는 부류가 섞여 있었다. 설마 너네… 아니지……?

"팀원은 제비뽑기로 결정됩니다. 리더들은 해당 번호가 적힌 통을 가져가 주세요."

트레이를 가리키는 고우림의 모습에 뒷골이 당겨 왔다. 앞에서 그렇게 온갖 방법으로 사람 뒤통수를 쳤다. 이제 와 제비뽑기라는 귀여운 방식을 들이밀었다.

밀당만큼은 수준급이었다. 누구 아이디어일지는 진즉 눈치챈 부분이었다. 윤희경의 오른팔인 유혜림이었다. 서브 작가……. 이런 아이템은 이 사람의 주력 분야였다.

"…제비뽑기?"

"와, 와아~."

"하긴 하겠는데, 귀엽네요……."

"통 안에는 팀원 수만큼의 막대가 들어 있습니다. 그 끝에는 빨간색과 파란색, 두 가지의 컬러 테이프가 감겨 있습니다. 같은 색을 뽑는 연습생들끼리 한 팀으로 묶이는 규칙입니다."

손에 들린 소도구들이 절그럭거렸다. 이것도 순전히 운인 룰이었다. 허탈한 방안에 기운이 빠져 어깨를 늘어뜨렸다.

뭘 뽑아야 하나 삼삼오오 모여 작은 통 하나를 노려봤다. 빨리 뽑는 것에 대한 이득을 알 수 없었으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용기를 냈다. 초반부터 호들갑을 떨던 밝은 성향의 연습생이었다.

"그럼, 제가 먼저 뽑아 보겠습니다!"

"오~ 최영서, 멋진데."

"엇, 그럼 나도 뽑을래."

"나도, 나도."

그를 시작으로 모두가 막대를 뽑아 들었다. 몇 개 남지 않은 뽑기에 서둘러 아무거나 집은 순간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남은 것은 리더인 문채민이 가져갔다.

내 손에 들린 막대는 빨간색의 테이프를 감고 있었다. 같은 걸 뽑은 애들이 누구지. 아무나 좋으니 부디 A 등급 한 명만 데려가고 싶었다.

"난 파란색이다. 명이 형도?"

"…응."

트레픽 연습생과 윤명은 파란색을 뽑은 것 같았다. 아쉬워하며 나머지 한 명을 찾아봤다. 문채민의 손에 들린 막대 끝을 쳐다봤다.

나와 동일한 색상의 테이프가 감겨 있는 걸 확인했다. 안도를 했다. 마주쳐 오는 시선에서 든든함을 느꼈다.

몰려오는 동지 의식에 먼저 손을 내밀어 줬다. 일시적이었지만, 손익 계산 빠르고 실력 좋은 아군이 생겼다.

"저희 같은 팀이네요."

"그러게요. 잘 부탁드려요."

"…저도 같은 팀인 것 같은데요."

아까부터 조용하던 김찬규였다. 입을 꾹 다문 게 고집스러워 보였다. 난처함을 가리며 슬쩍 웃었다. 신해신, 뇌에 힘주자.

당분간은 경련이 날 정도로 미소 지어야 할 것 같았다. 내숭을 부리는 것 같아도 살려면 이래야 했다.

그나저나 얘는 진짜 어떤 스타일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우리 좀 더 열심히 해 보면 안 될까?

마음속으로 싹싹 빌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태평한 척을 했다. 로또에 당첨됐다는 게 내 죄명이었다.

"그러게요. 반가워요. 다 같이 힘내 봅시다."

"저희 한번 열심히 해 봐요."

"…네."

문채민이 어드바이스를 해줬다. 얼추 이런 식으로 끌고 가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 치고, 똑똑한 타입이 함께 있었다. 그걸 위안 삼아 심기일전해 보기로 결정지었다.

서바이벌이 아닌 동기가 100명 있는 기업에 입사한 것 같았다. 산전수전 생고생 경력에 이게 한 줄 추가됐다.

좋은 거 맞나……. 이력서에도 못 적을 특이한 경험이었다. 일단 나는 직장인 출신이었다. 사건은 만들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 * *

그룹 내 팀이 두 개로 나뉘었다. 이쪽은 A 등급 하나와 B, C, D, E, F 한 명씩인 구성으로 만들어졌다.

A 등급 둘 중 한 명이 이리로 왔지만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중상위에 랭크된 B 등급 삼인방이 상대편으로 넘어갔다.

A 하나에 B 셋, 거기에 C와 E가 하나씩. 밸런스로는 누가 봐도 저기가 유리했다.

"포지션이 되게 다양한 것 같아요. 래퍼에, 보컬에, 댄서도 있고! 올라운더 성향도 강하네요!"

"그러게? 이제 곡만 잘 뽑으면 되겠다!"

아무래도 저 올라운더는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코인과 버스 탑승을 통해 만들어 낸 이미지였다. D 등급과 E 등급의 눈이 빛나며 내 쪽을 응시해 왔다.

비중 있게 봐 준 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부담스러웠다. 나는 나서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열심히 시선을 피했다.

"…그래요?"

옆에서 무심한 말이 들렸다. 미운 7살……? TV에서 본 적 있는 미취학 아동이 떠올랐다. 쟤는 악인보다 그쪽 계열이었다. 기본적으로 조금 선을 긋는 기질이 있었다.

그래도 괴롭힘 받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키도 크고, 진한 인상이었는데 신기할 따름이었다.

포커스를 쟤한테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어린애들은 칭찬에 약하다는 조언이 떠올랐다.

"보컬이시죠?"

"…어, 아시네요?"

"그럼요. 포지션이 골고루 분포된 것 같은걸요. 아주 좋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누군가와 싸울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화내서 변하는 것도 없을 일이었다. 저런 타입은 어르고 달래는 게 가장 좋았다.

내게 중요한 건 돈을 돌려받는 일이었다. 저당 잡힌 이후에는 화도 잘 나지 않았다. 사실 해탈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 * *

"인사들은 나누셨나요? 그럼 선곡을 해 보겠습니다."

주목을 끄는 와중에 등 뒤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물음표 스티커가 붙은 패널이 벽 한가득 들어찬 풍경이었다. 그룹도 팀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정해졌다. 이제는 어떤 기행을 선보일까 궁금할 정도였다.

"벽에는 4개씩 총 8그룹의 선곡 표가 붙어 있습니다. 각 팀은 달리기를 통해 원하는 패널을 뽑아 미션곡을 고르겠습니다. 팀 대표분들은 앞으로 나가 정해진 라인에 위치해 주세요."

가만 지켜보니 체력 경쟁을 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어차피 곡 제목도 모르는데 빨리 뛰는 게 의미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관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적당히 양보하는 척 발을 빼면 될 일이었다.

"혹시 달리기 자신 있으신 분?"

"엇, 전 잘 못 뛰는데."

"하시고 싶으시면 나가도 괜찮아요. 스티커로 가려져 있어서 모르잖아요."

이런 운 게임에선 남 탓 하기도 애매한 입장이었다. 뭔지도 모르는데, 애먼 사람 잡는 건 팀워크만 망가트렸다.

"…그럼 제가 한번 나가 볼게요! 혹시 생각해 두신 것 있으세요?"

"저는 뭐가 나올지 잘 모르겠어 가지고요… 리더님은 어떠세요?"

"그룹 선정 때만 리더였지, 지금은 괜찮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세 번째 걸 부탁드릴게요. 안 되겠으면 마음 가는 걸로 가져와 주세요."

주먹을 움켜쥔 팀원이 앞으로 나서 보였다. 무난한 곡이 최고였지만, 기대하지 않는 게 현명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쪽 대표를 못 본 찰나였다. 눈을 돌리다 목격한 사람에 조용히 한숨을 삼켜 냈다.

하고 많은 인물 중에 하필이면 윤명이 나와 있었다. 쟤는 운 스탯이 높은 연습생으로 손꼽아 볼 수 있었다.

뭐가 됐든 원하는 곡을 획득해 가겠다고 장담했다. 최선이 안된다면 차선이라도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룹이 그룹인 만큼 말도 안 되는 것만 하지 않으면 괜찮았다.

삐익-

"와악! 달려라!"

"어, 어, 넘어지지만 마!"

팀 대표들이 전력으로 패널을 향해 달려 나갔다. 빠른 몸놀림이었으나 윤명에겐 밀려 버렸다. 그럼에도 책임감을 느꼈는지 참 열심히 하는 광경이었다.

"앗, 세 번째는 놓쳤네요."

"그래도 빨랐죠?"

저 멀리 벌겋게 달아오른 팀원이 합류를 위해 돌아오고 있었다. 이야기 나왔던 패널을 놓친 게 미안한 모양이었다. 우물쭈물 머뭇거리는 행동에 수고했다는 말을 남겨 줬다.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우리 팀의 몫은 첫 번째 패널이었다. 두꺼운 스티커로 가려져 당최 곡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경연곡을 발표하겠습니다. 각 팀은 스티커를 떼어 주세요."

"하나, 둘, 셋!"

구호와 함께 소품 위의 스티커들이 떨어져 나갔다. 여기저기 비명과 외침으로 혼란스러운 장면이었다. 우리는 무슨 노래일까, 드러나는 글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Ultimate'9 - Devastating Love]

"와! 나 이 노래 좋아하는데!"

"Devastating Love? 내가 아는 그거?"

"우리가 디베럽을 하는 거예요? 진짜? 거짓말 아니고?"

"대박! 완전 멋있겠다!"

좋아하는 멤버들이 섞여 있었다. 멋있는 곡이기는 했으나, 저걸 추고 있을 자신이 그려지지 않았다. 어려운 게 걸려 걱정스러웠다. 수직 상승한 난이도가 느껴졌다.

"이 무대 퍼포먼스 멋있었잖아요~"

"맞아요, 명곡이니까요! 엄청나게 두근거려요!"

"…할 수 있겠죠?"

팀원 한 명이 마음의 소리를 내뱉었다. 비슷한 심정이었으나, 이런 건 혼자 알고 있으면 될 사실이었다. 왠지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았다.

"반드시 해내야죠."

문채민, 상황 틀어막는 게 아주 수준급이었다. 고등학생이라고 들었는데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런 것에 재능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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