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Devastating Love'. 얼티밋 나인(Utimate'9)의 타이틀 중 가장 하드 하다는 반응을 이끈 노래였다. 사랑을 갈구하는 자의 처절함을 다룬 곡이었다. 컨셉 끝판왕이라고 불린 전적이 있었다.
진한 화장과 새까만 복장에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안무가 이어졌다. 고음부의 싸비가 유명한 노래이기도 했다. 장난 아니게 어려울 거라는 뜻이었다.
"16개 팀의 미션곡 선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최종 명단을 공개해 보겠습니다."
스크린 위로 각 팀의 리스트가 떠올랐다. 상대 팀의 선곡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리액션을 보이던 연습생 전원이 조용해졌다. 주변을 힐끔거리는 게 머리 굴리기 바빠 보이는 전경이었다.
"우정환, 너네 저거 해?"
"응, 명이 형이 힘 좀 냈지? 완전 선배님들 명곡 아니냐, 크……."
문채민이 경쟁을 해야 할 트레픽 연습생에게 다가갔다. 턱밑으로 손가락을 대며 자화자찬하는 연습생이었다. 기뻐할 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명의 운 스탯 효과를 보며 부러움에 배가 아팠다.
[Ultimate'9 - BEAT ON!]
'BEAT ON!'은 그룹이 선정되고 나왔으면 했던 곡 1순위였다. 컨셉 장인 얼티밋 나인의 몇 안 되는 하이틴 계열 댄스곡이었다.
멜로디가 친숙해서 편곡 폭이 넓고,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 여지가 충분한 스타일이었다. 어디를 봐도 쟤네가 유리한 형편이었다.
"그나저나, 넌 선배님들 곡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걸 하네."
"잘할 수 있으니까, 조용히 해."
"패기가 멋진데?"
"두고 보자."
레이저가 튀기는 둘에게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별말 안 했지만 동정의 눈빛을 느낀 참이었다.
어쩌다 저 곡을 만났냐는 뉘앙스가 풍겨 왔다. 자판기남을 우리 팀으로 데려왔어야 하는 건데. 밀려오는 후회에 윤명을 바라봤다. 본인의 능력도 모르는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전 좋아요. 저 노래 퍼포먼스 엄청 멋있었잖아요."
"그러게요~ 안무가 많이 어렵겠지만, 힘내 봅시다!"
팀원들에게는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걸 얘기하지 못했다. 그나마 의욕적인 게 장점이었다.
굳이 그걸 꺾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조용히 특단의 조치를 세우자고 다짐했다.
잠깐이나마 운전기사가 되기로 각오를 다졌다. 차 키 꽂아 놓으면 누구든 운전해 주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 * *
"좋은 곡을 하게 됐네요. 잘해 낸다면 칭찬이 따라올 것 같아요. 그런 뜻에서 파트부터 정해 볼까요."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서두는 내가 꺼내야 했다. 너무 아무것도 안 하면 민폐 캐릭터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긍정적인 모션을 이어 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때마침 문채민이 손을 들어 자신을 어필했다. 누가 봐도 진행에 힘을 보태 주는 동작이었다.
"래퍼입니다. 혹시 같은 포지션 있나요."
"아뇨!"
"그럼 제가 랩 파트 맡을게요."
"네, 좋아요!"
문채민은 열외로, 저 분야는 우리가 건들 수 없는 영역이었다. 실력으로도 걱정할 게 전혀 없었다. 한몫해 주면 도리어 이득이 될 부분이었다.
일사천리로 넘어가니 휩쓸린 팀원들이 쫓아왔다. 랭크가 높진 않았지만 제법 쓸 만한 효과를 지닌 스킬이었다.
"그럼, 나머지 파트 분배해 볼까요?"
본격적인 리드는 문채민이 맡아 줬다. 안 그래도 발을 빼야 할 것 같았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끼어들어 준다.
"네! 좋아요~"
"저, 질문 있는데요. 저희 혹시 센터는 안 정하나요?"
"…센터요?"
탭을 통해 곡을 파악하려던 참이었다. 한 명이 예민한 주제를 꺼내 들었다. 옆자리의 팀원은 당황했다는 듯 눈치를 봤다.
이런 사안은 초반에 정하지 않는 게 나았다. 잘못하면 지적만 들을 수도 있었다.
먼저 입을 열어 볼까 싶다가도 덤터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주변을 살펴보니 문채민이 대처해 줬다. 비겁한 나를 용서해 줘. 우리 중에 가장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었다.
"센터는 편곡이 정해지고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일단 파트부터 나누는 게 어떨까요."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음, 그러시다면 일단 알겠습니다."
은근한 회유의 언사였다. 너무 발을 뺐나 싶어 의견에 힘을 실어 줬다. 스킬의 효과인지 그럭저럭 넘어가 주는 뉘앙스였다.
다른 사람들이 대놓고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색해지는 게 싫어 서두르는 느낌이었다. 착하지만 뒤치다꺼리를 해 줘야 하는 팀원들이었다.
정말 조별 과제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문채민이 없었다면 탈주했겠다며 웃어 보였다. 물론 쟤한테는 나도 노 답 팀원일 예정이었다.
"그럼 각자 후렴구 한 번씩 불러 볼까요? 그리고 투표합시다. 싸비부터 정하죠. 합이 잘 맞는 분들로 배치해서 연결해요."
"넵, 좋아요!"
"와, 이거 높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힘내 보겠습니다."
긴장감이 맴도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주력 파트가 정해졌다. 무대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은근한 경쟁이 깔린 시점이었다.
어딘가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역시 인기가 많은 곳은 빠르게 정하는 게 나았다. 문채민이 몇 수 앞을 내다 본 모양이었다.
"이게 바로 널 사랑하는 나의 방식- Devastating Lo… 큼! 이거 꽤 높네요."
걱정하던 부분이 등장했다. 이 곡은 호흡할 구간이 너무 부족했다. 중간 스탯 이하라면 부르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팀원들 대다수가 높지 않은 보컬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한 명만 제외한다면 나는 낮지 않은 위치에 존재했다. 푸시를 받으면 괜찮은 파트를 얻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편을 찾아야 했다.
"이번에는 제가 불러 볼게요."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시즌 4 때였나, 해당 노래의 원곡자가 게스트 트레이너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두 번째 배틀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교정해 주면서 창법에 대해 설명했다. 힘은 빼되, 포인트만 살려 부르는 타입이라고 했다. 분명 이 그룹의 메인 보컬은 가성보단 진성을 많이 썼다. 기억을 더듬어 가며 소리를 내 봤다. 특이한 음색 덕분에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다.
"새하얀 너를 물들여 이게 바로 널 사랑하는 나의 방식 Devastating Love!"
음역대 자체는 커버 가능한 선이었다. 잘하는 게 관건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허스키한 미성으로 원곡자와는 다른 무드였다.
따라 했다는 욕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의 반응을 살펴봤다. 2절까지는 안 바라도 1절은 얻어 가고 싶었다.
파트가 연출과 연관성이 깊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눈여겨보며 체크했다. 분위기 자체는 괜찮아 보이는데 말이야…….
"그럼 투표해볼까요?"
"...네!"
문채민의 지휘하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나를 뽑기는 민망했다. 그래서 적당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사람을 선정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한쪽으로 쏠린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리고 내 순서가 돌아왔다.
"다음은 신해신 연습생입니다. 저는 여기에 손 들게요."
문채민의 행보가 꽤 파격적이었다. 다른 애들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얘, 지금 날 밀어주는 건가? 확실히 보컬 스탯은 내가 제일 높았다. 공정하다면 공정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이에 불안해 보이는 팀원들이 섞여 있었다. 자기 입지가 좁아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핵심 파트를 맡고 싶은 게 당연했다.
그때, 예상외의 인물이 똑같이 손을 들어줬다. …김찬규? 표정 자체는 평소와 동일했다. 관심은 없어 보였지만, 인정은 해주겠다는 느낌이었다.
뭐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일단은 고마워하며 신기하게 바라봤다. 친절하게 대해 준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했다.
"괜찮다면 제가 해도 될까요."
완성도 있게만 해낸다면 방송에서 다뤄질 거라는 건 확실했다. 미안하지만 여기 파트는 내가 가져가야 했다. 22억이 달렸으니 양보하긴 힘든 입장이었다.
"저는 좋은데요."
"네."
"…넵. 동의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2절 싸비는 신해신 연습생이 하는 걸로 하고, 다른 곳도 마저 정하죠."
미묘한 묵묵부답 속에서 허락을 받아 냈다.
여긴 카메라가 깔려 있었다. 연습생을 할 정도라면 이런 공개된 곳에서는 조심할 줄 알 것이다.
다수결에서는 고의 편집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거기다 리더격이 반기듯 커트 쳤다. 이렇게 되면 끊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저 애와는 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실력이 보증된 랩에, 더블링으로 충분한 화음이 있는 구역에서 들어가는 도입부. 거기가 바로 2절 싸비였다. 곡 중 가장 달궈진 곳이란 뜻이기도 했다.
챙길 만치 챙겼으니 슬슬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잘못하면 욕심쟁이로 찍힐 가능성이 있었다. 방송 각을 아니, 아예 여지를 줘선 안 될 일이었다. 나머지는 긍정적인 리액션만 보이기로 다짐했다.
팀원들의 신경전을 구경하며 공감을 보냈다. 하이라이트가 빠져서 그런가, 양보들은 절대 하지 않았다. 기싸움이 끝나갈 때쯤 모든 배분이 완료됐다.
목표했던 파트도 사수하고,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도리어 너무 잘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질 정도였다. 한 단계를 넘어섰을 뿐인데 지쳐 있었다. 내일은 좀 더 평화로우면 좋을 것 같았다.
* * *
"……."
어쩐지 수월하다 싶었었다. 떠오른 상태 창에 넋을 잃었다. 근데 이건 너무한 처사 아니야……?. 지정받은 연습실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
두 팀이 한 곳을 사용하는지 먼저 온 선객들이 실재했다. 실질적인 경쟁자가 아닌 다른 그룹의 곡을 연습하는 팀이었다. 그래도 제작진에게 양심이란 게 있었나 보다. 윤명네와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 배틀에는 비효율적인 룰이 하나 있었다. 초반 점검은 원곡 기준으로 실행된다는 점이었다. 편곡하면 구성 자체가 달라질 텐데 쓸데없는 짓이었다.
소화 방향을 확인한다는 둥 핑계를 댔다. 따지고 보면 결론은 그거였다.
그냥 욕 한번 먹고 가자는 거였다. 기존 무대와 비교해 보려는 의도였다. 흥미진진한 소재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방송이었다.
인원수에 맞춰 최소한의 동선만 변경하기로 확정 지었다. 다들 이게 허튼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본경연에 들어갈 무대는 점검 이후가 진짜였다.
카메라가 돌고 있어 대충 할 수도 없었다. 포인트나 이해하자는 의미로 연습에 돌입했다.
[!Bug 발생!]
[!Bug 발생!]
[!Bug 발생!]
움직이려던 찰나, 빨간 글씨가 점멸하듯 인근을 둘러쌌다. 이번엔 또 뭔가 싶었다. 상태 창을 얻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업데이트 중 Bug가 발생했습니다!]
[!0… 10… 35… 78… 99… 100%!]
[!업데이트 완료!]
[!시스템 난이도 업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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