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버그라면 프로그램 잘못 아닌가. 지금 저걸 핑계라고 대는 건가 싶었다. 이건 업데이트가 아니었다.
플레이어를 손해 보게 만드는 시스템이라니…. 당첨금을 저당 잡혔던 일이 겹쳐 왔다. 진짜 너무하다…….
"왜 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어느 정도 적응한 것 같았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아 버렸다. 내게 너무 잔인한 행태를 보이는 것 같았다.
경연 초입부에 들어섰다. 하필이면 이럴 때 자금줄이 반 토막 나 버렸다. 요 근래 내 행보가 순탄대로이긴 했다. 그게 시스템 눈 밖에 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안무를 외우는 와중에도 고민을 벗어나지 못했다. 버는 게 줄었으니 코인 소비를 자제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짜 놓은 계획이 무너져 버렸다.
다시 한번 저축의 중요성을 깨우쳤다. 쓸데없이 교육 이념 비슷한 게 깔려 있는 시스템이었다. 복잡한 심경을 가라앉히며 일행을 따라 움직였다.
"동작부터 따고, 그다음에 대형 정리합시다."
"네."
지금 내 댄스 스탯은 B였다. 고난도 동작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빠르고, 거칠고, 엇박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안무의 연속이었다. 이래서 이 곡이 걱정스러웠다. 멋있는 만큼 디테일이 끊임없었다.
왕창 혼날 미래가 예측되는 것 같았다. 흐려지려는 시선을 무마했다. 동태 눈은 절대 안 된다. 미간에 힘을 주며 생기 있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팔을 내리고, 쿵 쿵 따단, 쿵 따다단 쿵!"
"악, 부딪쳤다. 죄송해요, 형!"
"아니요. 저도 잘못 이동했어요."
어느새 팀 내에선 자연스러운 호칭이 칭해지고 있었다. 다른 연습생들의 깍듯한 자세는 내 이미지에도 좋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라며 받아들였다. 나름 친근하다고 여길 수 있는 포인트가 만들어졌다.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니 무난한 성격이라도 강조해야 했다.
생긴 것 때문에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쩐지 조금은 억울했다. 순한 얼굴이었으면 안 해도 될 고생같았다.
"…"
"…아."
"처음이라 잘 안 맞았죠? 이따 여기 반복해 봐요."
김찬규가 미묘한 눈길로 여기를 바라봤다. 실수를 한 팀원은 당황스러워했다. 연습은 열심히 했으나 간혹 튀어나오는 정적이었다. 역시 어딘가 딱딱한 구석이 존재했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빠져나갔다. 적당히 주제를 돌리고 물러서면 될 일이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봐주라……. 괜한 트러블은 만들지 않는 게 나았다.
"형들, 저 여기가 헷갈리는데, 좀 도와주실래요."
"네……? 네."
"지금 갈게요."
지켜보던 문채민이 우리를 구석으로 불러들였다. 아까만 해도 가장 수월하게 안무를 따던 사람이었다. 이제 와 태도를 돌변한 게 의심스러웠다.
가만 쳐다보자 지긋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모든 의도가 납득됐다. 잠시 김찬규가 식을 시간을 준 것이었다.
마이크를 차고 있어 대화는 없었다. 그래도 풍기는 기운만으로 알 수 있었다. 내게는 너무도 감사한 아군이었다.
* * *
간만의 고된 일정에 전신이 노곤했다. 이미 정신력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테마곡 무대 선공개 날이어서 그런지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가는 그림이었다.
굳이 팀끼리 이동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권혜성과 이유준을 찾기 위해서라도,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났다.
"형~!"
떠올리기가 무섭게 나타난 당사자들이었다. 아침과 전혀 다르지 않은 안색인데, 여기는 별일 없었나 보다. 시끄러운 권혜성을 상대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대충 들어 보니 둘 다 무탈한 곡을 받았다고 하는 듯했다. 게다가 이유준은 내가 원하던 제이오원에이를 받은 그룹이었다.
내 상황과 너무 비교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안 될 걸 알고 있지만 이유준과 팀을 교환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리고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부터 새로운 룸메이트들과 지내야 하는 과정이었다. 저번처럼 6명씩 순위로 묶여 잘리는 것 같았다.
나는 20위였으니 권혜성과 같은 방이었다. 18위였던 이유준은 바로 옆 방에 배정받았다. 저번부터 사소한 걸로 아쉬워하는 성미를 보였다.
"하나만 더 낮았어도 같은 방이었는데."
"에이, 그건 제 자리잖아요."
"바로 옆이잖아. 얼른 정리하고 휴게실에서 만나자."
그나마 오늘은 바로 취침이 아니었다. 테마곡 모니터링을 위해 다시 모이기로 합의한 시점이었다. 핸드폰을 수거당했으니 제작진이 안내해 둔 휴게실 내 PC를 이용할 심산이었다.
"이따 만나요~."
"그래, 금방 만나자."
활기찬 권혜성을 달고 방에 들어갔다. 방문을 여니 대다수가 모르는 인물이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문 옆의 캐리어를 챙겨 들었다.
빈자리를 잡아 짐을 풀고, 통성명을 했다. 저번 방보다는 조용하지만, 기싸움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은 낯을 가리는 모양이었다. 빠져나가기 쉬운 상황이 됐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내려갔다. 가까운 데 앉아 이유준을 기다렸다. 옆에선 권혜성이 능숙하게 사이트에 접속하고 있었다.
"형~ 얼른 와요!"
"죄송해요! 늦었죠!"
"괜찮으니까 여기 앉아. 시간 다 됐네."
대충 정리되자마자 연습생 몇이 뛰어 내려왔다. 점점 인파가 많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선을 돌려 컴퓨터에 집중했다. 와이튜브 해당 링크 밑에는 실시간 대화 창이 재생되고 있었다.
접속자 수가 제법 많은 것 같은데. 새로운 채팅이 끊이지 않고 올라온다. 다들 욕하면서도 찾아보긴 하는 것 같았다.
- 뭐야 사람 개 많네
- ㅋㅋㅋㅋㅋㅋㅋ 아 드디어 공개된다
- 노이즈 마케팅이라면 성공한 듯
- 호기심에 보러 왔는데 ㅋㅋㅋ
- 님 같은 사람이 이거 끝나고 입덕 해서 티위터에 글 쓰러 감
-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겠어 ㅎ
- 오 한다 한다!
새까만 화면 위로 푸른 커튼이 등장했다. 웅장한 BGM이 깔린 편집이었다. 그 앞으로 고우림이 마이크를 들고 걸어 들어왔다.
핀 조명에 깔끔한 차림까지 갖추고 있으니 절로 믿음이 샘솟았다. 왜 MC로 기용했는지 알 것 같은 외형이었다.
[시청자 마스터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대표가 된 고우림이라고 합니다.]
- 미쳤다 갓 우림
- 고우림을 픽하겠습니다
- 제작진 너네 돈 좀 썼다? ㅋㅋㅋㅋ
- 벌써 재밌네 대표 얼굴 대유잼
- 고우림만 2시간 보여주면 안 되냐?
- 아 공감되네 ㅋㅋㅋㅋㅋ
[지금 100명의 소년이 마스터 여러분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마스터 ㅇㅈㄹ 아 저건 들어도 들어도 적응 안 되는 것 같은데
- 제작진 제정신 아닌 거 하루 이틀인가 ㅋㅋㅋㅋ
- 한결같은 변태성에 박수 쳐주고 싶다;;
[당신의 아이돌 시즌 2 take off, 지금 바로 도약합니다!]
양쪽으로 갈라지는 커튼 뒤로 화려한 무대가 포커싱됐다. 영상 이펙트가 스크린을 따라 움직이고, 무대 위로 100명의 연습생이 나타났다.
세트장 바닥 부분이 점멸하듯 빛났다. 비슷한 타이밍에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볼륨이 커지며 본격적인 영상이 시작됐다.
발맞춰 움직이는 군무에 따라 전체를 잡던 앵글이 A 등급의 2층을 줌인 했다.
- 방금 센터 누구야 ㅠㅠㅠㅠㅠㅠ
- 얼굴 ㅁㅊㄷ 존잘
- 강태오 나오는 거 진짜였엌ㅋㅋㅋ
- 와… 케이팝 존나 긴장해라 와꾸인데
뭔가 어색한데, 녹화할 때는 몰랐는데 미묘한 심경이 들어왔다. 노래가 나옴에 따라 대형 군무와 연습생들이 바뀌어 나갔다. 360도로 깔아 놨던 카메라가 이해 가는 무빙이었다.
"어! 나 나왔다!"
- 방금 갓기 댕댕이 찾습니다 ㅠㅠㅠㅠㅠ
- 2분 37초 청순남 누구야 ㅜㅠㅠ 이번 시즌 왜 이래??
- 남 사단 미쳤냐고 ㅋㅋ 어디서 긁어모은 거야 ㅋㅋㅋㅋㅋ
- 노래 좋아서 당황스럽잖아; 유어돌 많이 컸다;;
- 중간에 몇 빼면 괜찮은데?
- 이게 케이팝이지 ㅠㅠㅜㅠㅠㅠㅠㅠㅠ
- 가슴이 웅장해진다…
- 유어돌 기강 쎄게 잡는다!
- 또바이벌이라고 욕해서 죄송합니다 ㅠㅠㅠㅠㅠㅠ
- 이게 찐바이벌이지 죽을 때까지 만들어
- 남사단 욕하면서도 기다리는 건 다 이유 있음
- 감동이 과하다 ㅠ 나 지금 눈물로 한강 만들었잖아 ㅠ
중간에 이유준과 권혜성이 클로즈업으로 잡혀 나왔다. 실력이 좋아서인지 개인 컷으로 주목받은 것 같았다.
천장 조명의 색상이 바뀌며 싸비 도입부에 들어갔다. 음악이 최고점에 달했는지 현란한 효과도 함께 있었다.
악플들이 있기는 했으나, 일단 자연히 흘려 넘겼다. 특출나게 파트랄 것도 없으니 판단 기준은 외모가 전부였다. 역시 아이돌은 얼굴이 재산인가. 이 부분을 체크했다.
그나저나 나는 아직 제대로 된 분량이 없었다. 양 사이드 인물은 나왔는데, 왜지. 이거 좀 위험한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었다.
B 등급이라고 우대해 주리라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수준일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잠깐 정도는 내보내 줄 것 같았는데, 제작진을 완전히 파악하진 못했나 보다.
그때였다. 새로 올라온 댓글이 눈에 띄었다. 저게 내 얘기라는 건 단박에 알아챘다.
- 미친아 4:12초 십자가남 찾아요!
때맞춰 하늘에서 꽃가루가 쏟아졌다. 카메라를 발견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조명에 피어싱이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십자가남이란 호칭이 뭔지 알 것 같았다.
- 저 양아치 와꾸가 미친 내 취저임 이름 좀 알려줘 ㅜ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신기한 기분이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한참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려 왔다. 돌아보니 이유준이었다.
"형, 무대 끝났어요."
"아……? 미안."
이상한 감회에 빠져 있는 사이, 테마곡 스트리밍은 끝나 있었다. 호흡을 가누던 강태오를 마지막으로 까맣게 방송이 점멸해 버렸다.
과연 엔딩 요정은 강태오였다. 근데… 쟤를 요정이라고 할 수 있나? 일단 그건 넘기기로 결정했다. 삐딱하게 추켜올린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댓글 창이었다. 남현욱이 강태오를 사용해 관심 끌기에 성공했다. 굳이 따지자면 상부상조라고 분석했다.
- 본방 절대 사수해
- 인정한다 이번 편에 목숨 건 거 ㅋㅋㅋ
- 극락이다 얼굴 맛집 ㅠ
- 아 존나 잘생겼어…
- 케이팝 개같이 부활!!
- 남피디한테 기강 잡혔어 ㅜㅠ
- 자존심? 바로 버리겠습니다.
- 엄마 나 남편 찾은 것 같아
"…난 한 컷도 안 나왔어."
"언급됐던 것 보니까 괜찮은데?"
어느덧 인근에는 연습생이 한가득 내려와 있었다. 휴게실이 대화 소리로 시끌벅적하게 울려 왔다. 본인의 장면에 대해 서운함을 토로하거나 자랑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거론됐으니 얻은 게 아예 없지는 않아 보였다. 적어도 찾는 이가 있을 거란 생각에 안도할 수 있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쉴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