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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파산 안하나요-25화 (25/328)

25화

"네, 여기 출연하기 전에는 평범하게 일하면서 지냈어요."

"우와! 그럼 신청도 직접 하신 거예요?"

…그건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말아 줄래. 시스템이 신청해 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무마하기로 결심했다.

"네… 직접… 신청했습니다."

아마 시스템이… 무난한 이미지를 구축하며 수더분하게 행동했다.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가만 떠올려 보니 좋은 기회였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보여 줄 수 있었다. 생긴 것과 달리 침착한 면모도 강조할 수 있었다.

그래도 조금은 식은땀이 났다. 나도 일단 사람이었다. 과도한 거짓말이 양심을 아프게 했다. 이런 짓도 배짱이 두둑해야 할 수 있었다. 우리… 그냥 연습하면 안 될까?

"와… 형, 대단하네요."

"여러분이랑 비슷한 걸요. 크게 다를 건 없었어요."

"…꼭 하고 싶었어요?"

"…네?"

"…아니에요. 죄송해요."

어딘가 많이 가라앉은 모습의 김찬규였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선을 긋는 행동인 줄 알았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런 게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문채민이 몸을 굳히며 상황을 지켜봤다. 혹여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중재 타이밍을 재는 뉘앙스였다.

눈을 굴려 시선을 마주하곤,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내 반응에 문채민이 바로 한 발 물러섰다. 과한 경계는 자신에게 나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나와는 반쯤 편을 먹긴 했지만 본인 건 챙길 줄 알았다. 일시적인 동맹, 그 수준으로 보면 됐다. 쟤는 내게 양날의 검 같은 존재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지. 내가 한 얘기에 문제라도 있는 건가? 일단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밝은 어조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다 같은 마음으로 나온 거잖아요. 모두 대단해요."

"…형, 저 감동받았어요."

"저게 바로 어른인가……!"

"하… 하하… 민망하네요."

팀원들이 과한 행동을 하는데 내가 이렇게 나오니, 저런 방식으로 대응하는 거였다.

그러게, 질문을 잘 골라서 해야지……. 나도 난감했잖아.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건실한 면을 알릴 수 있는 장면이 나왔다. 사실 난 성실한 타입이었는데 외형 때문에 오해받아서 고생 중이었다.

그래서 직접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하긴, 모두 같은 심경으로 출연한 방송이었다. 여기서 더 태클을 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만 연습합시다. 몸은 다 풀었죠?"

"넵!"

적당히 주제를 돌리며 정해진 대형에 위치했다. 일정이 빠듯한 만큼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박자 느려요!"

"네!"

"엇, 발 꼬인다!"

"그거 놓치지 마세요!"

한밤중이라고는 믿기 힘든 현장이었다. 땀으로 전신이 축축할 지경이었다. 지급받은 연습복 티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폐에 산소가 모자라 정신이 아득했다. 소금기 때문에 눈가까지 따끔거리는 듯했다.

팔을 들어 닦아 내기 무섭게 옆쪽에서 무언가 내밀어졌다. 흐릿한 시야에 한쪽 눈을 감으니,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은 타월이었다.

"…어?"

"이걸로 닦으세요. 비비면 더 아파요."

"…고맙습니다."

앞머리가 푹 젖은 문채민이 말을 걸었다. 당사자 역시 관자놀이가 물기로 흥건했다.

어째 내게 양보한 모양새였다. ……얘는 진짜 어른스럽네. 문채민이 어깻죽지를 들어 제 뺨을 훔쳐 냈다.

그러고는 잠깐 쉬기가 무섭게 등을 돌리며 소리쳤다. 침착하던 평상시와 아주 다른 얼굴이었다. 진지하다 못해 찡그려진 미간에서 어쩐지 압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금 거기, 동선 꼬였어요!"

"죄송합니다!"

놀람과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가물거리는 눈가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건네받은 타월은 습기를 먹어 축축한 상태였다. 한참을 내려다보다 그걸로 얼굴을 닦아 냈다. 땀 냄새가 났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피식 웃어 보이곤 모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인트로부터 갑시다!"

팀이 구성된 이후 처음으로 낸 큰 목소리였다. 일단은 무대에 집중해 보기로 결심했다. 뭐, 어떻게 되겠지. 손에 들린 타월이 무거운 것 같았다. 연습할 때만큼은 앞뒤 가리지 않는 게 정답이었다.

* * *

"유어돌이라고 했나."

연구실 동료에게 듣게 된 프로그램이었다. 입사 동기였는데, 마음이 잘 맞아 친하게 지내곤 했던 인물이었다. 아이돌을 좋아해 그쪽 문화에 유달리 박식했다.

나야 별로 흥미가 없어 얌전히 들어 주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변했다. 평소처럼 밥을 먹던 점심시간이었다. 가만히 귀만 열고 있는 날 붙잡고 스트리밍이라도 봐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게 뭔데 갑자기 이러는 거지? 어이가 없는 걸 떠나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에 한해서는 헐렁해도 기본적으로 품행이 단정했다. 월말 보고서를 제출할 때만큼은 랩실 안의 에이스인 사람이었다.

일도 잘하고 똑 부러진 타입이라 간극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정 그렇다면 뭐… 본방송을 봐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몇 분짜리 짧은 동영상 하나였다.

그래서 약속을 했다. 업무에 도움을 많이 주던 사람이니까 이런 부탁 정도 들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귀에 박히게 들은 시간과 사이트였다. 알람을 맞추지 않았음에도 자동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집념의 동료에 두 손, 두 발을 다 든 입장이었다. 연구할 때보다 더 열정적이던 눈빛이 기억났다. 교수님이 보시면 큰일나겠다며 웃어 넘겼다.

PC를 켤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서 핸드폰으로 접속했다. 실시간 스트리밍답게 많은 인파가 눈에 띄었다. 인기가 엄청나다더니 전부 사실인 모양이었다.

흐음, 빠르게 지나가는 채팅들을 구경했다. 어투는 날카로웠지만, 그 속에 숨은 기대감이 엿보였다. 특이한 문화네…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내겐 새로운 세상이었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공개되기를 기다렸다. '약속만 지키면 되는 거니까.'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어? 고우림이 대표였어?"

다른 건 넘긴다 쳐도 아는 인물이 하나 나왔다. 얼마 전 괜찮게 봤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런 것도 했나 보네? 약간의 흥미가 샘솟았다. 얼굴도 잘생겼고, 연기력도 좋아 인기가 많은 배우였다. 활동이 없어 휴식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나와 그런 것 같았다.

이쪽 업계는 잘 몰랐지만, 뭔가 대단한 걸 하려는 모양이다. 동료의 그 흥분한 얼굴이 영상 위로 오버랩됐다. 아, 그 드라마 엄청 재밌었는데. 나중에 이것도 얘기해 주자고 마음먹었다.

시작과 동시에 화려한 이펙트의 무대가 나타났다. 척 봐도 갓 성인으로 보이는 애들이 가득했다. 열심히 하네.

채팅 창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왠지 이런 열정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노래는 자주 듣는 계열이 아니었지만, 훅 송이라 중독성이 강한 느낌이었다.

하긴 이런 프로그램은 시선을 끄는 게 최고의 흥행이었다. 시간만 때우고 말겠다는 일념과 달리 제법 즐겁게 구경했다. 보는 재미도 있고,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가슴 뜨거워지는 일이었다.

유치한 듯 그렇지 않은 가사가 입에 착 붙었다. 작게 웃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찰나였다. 꽤 큰 실루엣이 영상 위로 비쳤다.

"…이런 애도 아이돌을 해?"

타입이 달라 눈에 띄는 느낌이었다. 체구가 큰 편이었는데, 이미지 때문인지 오래 각인됐다.

이름이 뭐지? 정말 초반의 무대라 별다른 정보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찾아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어? 뭐야, 괜찮네. 음, 좀 내 스타일?"

카메라가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귀에 달고 있던 피어싱이 반짝 빛났다. 일순간 얘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군무에 떼창이라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더 궁금했다.

동료는 얘를 알고 있겠지? 출근하면 조용히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들어 줄 대화, 나도 말 몇 마디 해 볼 요량이었다.

노래도 좋고, 애들도 열심히 하고, 어차피 집과 연구실만 병행하는 심심한 인생이었다. 이참에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하나 보자며 턱을 괬다.

연구와 함께하는 삶에 유쾌한 취미를 만들고 싶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았다. 동료의 속사포 수다가 벌써 예상됐다. 출근이 기다려지기는 오랜만이었다.

* * *

온종일 연습만 반복한 하루였다. 열정 어린 분위기에 숙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다른 팀들도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경쟁에 불이 지펴진 시점이었다.

잠자기는 글렀다 싶어 쉬는 시간을 가졌다. 이거라도 없으면 누구 하나 쓰러질 일이었다.

최종 평가를 준비하며 깨달은 점이었다. 여기서 버티는 방법은 커피밖에 없었다. 아, 위약을 같이 가져왔어야 했는데……. 자취방 책상에 올라가 있을 영양제가 떠올랐다.

회귀로 신체도 젊어진 상황이었다. 근데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오래가지 못할 건강이었다. 욱신거리는 위장 때문에 명치를 부여잡았다. 그러곤 연습을 위해 카페인을 밀어 넣었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지 오래 안 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벌써 1층 24시 카페의 단골이 되어 있었다. 수중의 지갑 사정을 따지면 이럴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보다는 지금이 더 중요했다. 이렇게 가면 얼마 안 돼 쿠폰의 도장을 전부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탈락하면 기념품으로 가져가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진짜 피곤하긴 한 모양이었다. 손끝을 튕기며 벽면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걸려 있는 시계의 시침이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30분 정도였지만 잠깐이라도 느슨하게 몸의 힘을 뺐다. 내 체력이 이렇게 별로였던가.

과거를 떠올리며 턱을 괬다. 나름 세트 작업도 하고 바쁘게 살던 사람이었다. 큰 병은 무슨, 잔병치레 하나 없었던 장성한 청년이었다. 신해신, 너 진짜 다 죽었구나.

코웃음 치며 눈을 감았다. 피로에 찌든 게, 완벽한 사회인의 말로였다. 회귀 전의 스트레스를 그대로 끌고 온 기분이었다.

아이돌이나 직장인이나 만성피로는 똑같았다. 차라리 그때는 월급이라도 받았지……. 혼자 농담하고 혼자 웃고 있는 이상한 휴식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어 다행이라고 되짚었다. 누가 봤다면 이상하다며 피했을 장면이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낯선 인영이 나타났다. 본 건가……? 당황스러움에 그만 시선을 마주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

"……."

예상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쟤는 차분한 안색의 연습생, 이정원이었다. …어? 얽히면 안 되는 애다.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렇게 가까이 마주한 적은 없어서 생소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내 원맨쇼를 목격한 느낌이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트는 게 큰일 났다는 생각뿐이었다. 너, 다 봤구나……. 귀 끝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아 민망함에 이마 위로 날을 세워 눈가를 가렸다.

"……."

"……."

계속해서 침묵만이 이어지던 공간이었다. 손에 들린 걸 보면 나와 같은 카페를 다녀온 듯했다. 비슷한 또래라 그랬는지 찾는 게 거기서 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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